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존재론적 깊이의 인식과 인식론적 상대주의의 실천 (3) - 서영표 본문
Ⅳ. 지식 생산/학습의 새로운 방향
- 생태경제학의 도전
실재론으로부터 제기된 비판에서 드러났듯이 신고전파경제학은 인간사회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데서 많은 한계를 가진다. 효용/편익의 극대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시장의 최적화/균형에 대한 부당한 믿음은 경제학을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관념적 체계로 전락시켰다. 이러한 관념성은 생태적 위기를 설명하지 못하는 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현실을 평면적으로 이해하고 단위로 쪼개서 계산할 수 있게 하는, 그래서 모든 단위가 교환가능하고 하나의 단위를 다른 단위로 보상할 수 있게 하는 경제학적 기법은 생태위기를 설명하고 대응하기보다는 그것의 양상을 축소하게 한다. 기껏해야 환경적 충격을 전통적인 가격과 시장 체계 안으로 통합하는 것에 멈춘다.57) 사실 우리는 일상에서 생태적 위기 현상에 의해 나타나는 수많은 위험신호를 체험하고 있다. 그런데 일상을 위협하는 수많은 위험들은 신고전파경제학이 고려할 수 있는 특정 단위로 표현될 수 없기에 무시되기 일쑤다.58) 기후변화, 먹을거리 안전성, 물 부족, 미세먼지 등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 위험신호는 경제학적 패러다임에 의해 지속적으로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다.59)
경제학적 패러다임이 위험신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실재가 가지는 불확실성(uncertainty)과 다중성(multiplicity)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확실성과 다중성, 즉 실재의 복잡성을 받아들인다면 정당성을 가진 관점은 여러 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60) 하나의 기준으로 환원하여 측정할 수 있다는 관념적 전제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다양한 입장에서 인식하는 다양한 가치판단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제 과학은 그렇게 다양한 가치판단들을 ‘합리적으로’ 모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을 향해야 한다. 과학적 지식은 중립적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standpoints)으로부터의 현실 인식이 합리적 절차를 통해 논의됨으로 도달하게 되는 잠정적 합의(provisional consensus)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민주적’ 과학관 또는 지식관은 다양한 분과과학들 사이에도 적용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토 노이라스(Otto Neurath)의 표현을 빌자면, ‘과학들 사이의 협력’(orchestration of the sciences)인 것이다.61) 과학적 실천이 일상의 학습과정과 깊숙이 연루되는 것은 이러한 숙의 과정을 통해서이다. 비판적 실재론의 길을 따라 일군의 생태경제학자들의 주장을 좇아가 보자.
1. 지식/과학 패러다임의 전환
생태경제학자들은 낡고 협소한 경제학적 패러다임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것이 터하고 있는 오래된 과학적 지식의 기준을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지적 도구가 필요한 것이다.62) 그리고 비판적 실재론과 유사한 입장에서 생태경제학은 인간 삶을 틀 지우는 복잡한 체계들이 가지는 불확실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사회의 문화, 경제, 정치, 그리고 생태계는 복잡하게 얽혀 공진화(co-evolution)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공진화의 과정에서 우발성을 통해 드러나는 현상들은 절차적 합리성(procedural rationality)에 근거한 숙의제도에 의해서만 지식의 영역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된다는 점도 비판적 실재론의 주장과 겹친다. 생태경제학에서 바스카가 제시한 층화된 복잡한 기제는 복잡계(complex system)로 제시된다. 모든 체계는 근본적으로 불확실성을 띠고 있다.63) 단순한 체계는 결정론적이고 선형적인 인과 분석으로 설명될 수 있다.64) 문제는 경제학이 복잡한 실재를 단순한 체계로 가정하고 분석을 진행함으로써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여기서 지적해야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이러한 체계는 일련의 현상에 대한 인간의 지적 구성물이라는 것이다.65) 바스카의 자동적 대상과 타동적 대상의 구분과 일치하는 생각이다. 일치된 생각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인간 지식이 가지는 이중의 불확실성(대상이 가지는 복잡성과 대상을 향한 관점의 다중성)은 과학적 지식의 커다란 장애물처럼 보이지만 직면한 문제에 대한 상이한 과학적 견해들을 공존하게 하는 긍정적 조건으로 해석된다.66)
이렇게 관점을 뒤집으면 과학적 실천은 평면에서 점을 찾아 직선으로 연결하는, 현실을 왜곡하는 단순성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process)이 과학의 객관성을 보장하는 핵심으로 대두된다. 과학적 실천은 ‘문제 해결 과정’(problem-solving process)인 것이다.67) 문제 해결 과정은 과학적 논의와 학습,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정책 결정을 포괄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확장된 참여의 여지가 주어진다. 상이한 가치 판단에 따른 다양한 견해들이 반영된다면 문제해결과 정의 불확실성과 복잡성을 인정하면서도 결과로 얻어지는 지식의 질을 보증할 수 있게 된다.68) 과학의 역할은 포기되지 않고 여전히 핵심적이지만 “자연적 체계의 불확실성”과 “인간 가치의 관련성”의 맥락에서 다시 정의되어야 하는 것이다.69) 과학적 지식의 생산과 교육에서 유일하게 올바른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과학자와 교육자는 “타협의 해결책”(compromise solutions)을 추구해야 한다.70) 그리고 과학의 기준을 단순화된 평면의 명증성에서 복합적 체계에 대한 다면적 이해와 민주적 합의 과정으로 변경하게 되면 과학적 발견의 과정은 학습과정(learning process)과 중첩된다.71) 이제 과학적 실천은 가치를 담고 있는 다양한 견해들의 ‘두꺼운’ 내용이 다소 ‘정제된’ 형태로 공유되고 토론될 수 있는 방향과 틀을 제공하는 것에 맞추어져야 한다.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실재론적 근거를 가져야 하지만 인식론적인 상대주의를 수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대주의가 지적 허무주의로 치우치지 않는 것은 실천적 지식의 두터움과 그것에 기반한 민주적 토론이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이러한 지식의 공유와 토론이 생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과학적 실천은 문제해결의 과정이자 학습의 과정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전문가/교육자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펀토위츠와 레베츠가 이름붙인 탈-정상과학(post-normal science)은 실증주의적 정상과학에 도전하면서 전문가/교육자의 역할도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이 그 자체로 공인된 전문가/교육자의 위치를 공격하는 것은 아니다.72) 전문가/교육자의 역할을 재정립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전문가/교육자는 촉진자(facilitator) 또는 촉매(catalyst)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지식의 자동적 차원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치로 충만한 특정한 관점들로부터만 인식된다.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문가는 특정한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빠지기 쉬운 독단적 태도를 넘어, 다양한 생각들이 어떤 대상을 향한 것인지,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서는 어떤 절차와 과정을 거쳐서 논의를 진행해야 하는지의 규칙을 제공해야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다양성과 갈등은 우월한 과학에 의해 제거될 수 있는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실존 조건이며, 그 아래서 보다 풍부하고 두터운 과학적 지식의 성취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73) 우리 모두는 산비탈의 특정한 지점에서 산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래서 부분만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이 환영은 아니다. 각자의 시점에서 산의 윤곽을 이야기하고, 결코 완벽한 그림을 그릴 수는 없겠지만, 퍼즐을 맞추어 가는 논의를 발전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74)
2. 방법론적 다원주의
다양한 형태의 지표들을 동시에 고려하는 생태경제학적 기법으로 제안된 다중기준 분석(multi-criteria analysis)을 통해 앞의 이야기를 조금 더 진전시켜 보자. 다중기준 분석은 직면한 문제에 대해 여러 관점에서 풍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이해당사자들에게 여러 대안적 가능성을 숙의할 수 있게 한다. 다중기준 분석은 신고전파경제학처럼 깔끔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사태의 갈등적 측면을 충분히 고려하고 다양한 입장들 사이의 논의에 의해 합의에 이를 수 있게 한다.75) 이러한 “방법론적 다원주의”(methodological pluralism)76)는 대화의 맥락(context of dialogue)에서 의미를 얻게 된다.77) 경제적 문제에 대한 분석과 이해는 전문가들에 의해 확정되어 통보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대화와 토론을 거치면서 신뢰와 객관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이러한 숙의 과정은 동시에 학습의 과정이기도 하다.78)
다중기준 분석의 철학적 토대는 공약가능성(commensurability)과 비교가능성(comparability)에 대한 논의로부터 도출된다. 전통적인 경제학은 공약가능성을 전제한다. 강한 공약가능성은 공통의 기준으로 행위의 결과들을 측정하여 순위를 매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수적 등급(cardinal scale)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A, B, C 세 명의 성적을 90, 85, 83점으로 점수 매기는 것이 강한 공약가능성의 표현이다. 이에 반해 약한 공약가능성은 서수적 등급(ordinal scale)만을 나타낼 수 있다. 점수로 표시할 수는 없지만 A, B, C 세 명을 1등, 2등, 3등으로 순위 매기는 것이 약한 공약가능성의 표현방식이다. 약한 공약가능성과 강한 공약가능성은 모두 강한 비교가능성으로 분류될 수 있다. 강한 비교가능성은 서로 다른 행위들의 순위를 매길 수 있는 하나의 비교항(comparative term)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약한 비교가능성은 환원 불가능한 가치 갈등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지만 실천적 판단을 포함하는 합리적 판단은 인정한다.79)
논리적으로 예상할 수 있듯이 생태경제학은 공약가능성을 모두 기각한다. 그리고 강한 비교가능성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직 약한 비교가능성만이 생태경제학이 표방하는 다중기준 분석과 충돌하지 않는다.80) 다중기준 기법에 근거한 평가 기법은 “건설적인 합리성”(constructive rationality)에 토대를 두고 갈등하는 서로 공약불가능한, 그래서 다차원적일 수밖에 없는 결정들의 효과들을 모두 고려하게 하기 때문이다.81) 바스카의 판단적 합리성은 이러한 약한 비교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고전파경제학이 비판에 직면하여 제기하는 반론은 사회가 지탱되기 위해 요구되는 수많은 결정들은 짧은 시간 안에 서로 부딪치는 갈등을 조정해야 하는데, 다차원성을 고려하는 숙의는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비효율적 방법이라는 것이다. 직면한 문제가 논쟁적이고 이해관계가 복잡한 데다가 결정까지 긴급하게 요구된다면 화폐적 양으로 표현된 선호의 계산을 통해 결정에 도달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이다.82) 이미 충분히 논의되었듯이 신고전파경제학의 주장은 잘 못된 인간관, 시간관, 공간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의 교호과정을 복합적 시간성 속에서 생산되는 공간적 실천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효율성이라는 기준은 경제학적 결정이 초래하는 인간성 파괴, 사회파괴, 자연생태계 파괴를 다음에 오는 분절된 시간 단위 속의 비용으로 축소시킴으로써 그것이 가지는 재난적 결과를 은폐하는 효과를 가진다. 따라서 계산되는 시간 단위 안에서 효율적일 뿐이다. 앞에서 주장한 것처럼 과거-현재-미래의 연속성을 고려한다면 전혀 효율적이지 않다. 경제학의 효율성은 기후위기 재난에 맞서 장기적인 대책을 수립하지 못하고 주먹구구식으로만 대처하고 있지 않은가?
약한 비교가능성과 다중기준 평가 기법은 경제학 안으로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생태경제학은 공진화 과정의 인식에 따라 인간만이 아닌 생태계 전체를 경제학의 고려 대상으로 끌어들이면서, 그 조건 아래서 가치평가와 경제학적 논의의 주체가 되는 사람들에게 서로 겹쳐지는 다양한 관점을 되돌려 줄 수 있다. 우리는 단지 효용을 계산하는 기계이기를 멈추게 된다. 그다음 단계는 이렇게 자신의 다양한 목소리를 돌려받은 사람들이 이해당사자(stakeholder)로 경제적 지식 구성과 학습, 그리고 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하는 제도적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결정은 언제나 “확장된 동료공동체”(extended peer community)의 토론을 거쳐서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지금 당장의 이익과 이윤을 넘어 장기적 안목에서 사태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당장의 이해 관계를 넘어 예방의 원칙(precautionary principle)을 통해 합리적으로 판단해야 한다.83)
경제학의 전통적인 접근이 생산된 지식의 질을 보증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 지금 확장된 동료공동체를 통한 이해당사자들 사이의 숙의 과정의 출현은 과거에도 여러 번 경험했던 것처럼 정치적 참여의 권리, 그리고 정책과 관련된 지식 생산의 과정이 확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 노동조합에 관한 노동자의 권리와 여성의 선거권이 확장되었던 것처럼 사람들의 누려야 하는 권리를 확장하는 것이다.84) 민주적 참여의 과정은 학습의 과정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참여라는 학 습을 통해 시민의 역량을 발전시킬 수 있을 때에만 온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태경제학이 주장하는 확장된 동료공동체를 통한 숙의의 과정은 전문가들에 의해서는 파악되기 어려운 보통 사람들의 필요와 욕구를 반영할 수 있는 갈등 해결 방식을 정식화하는 통로이기도 하다.85)
이러한 학습의 과정은 모든 사람을 모든 영역에 정통한 행위자로 키워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는 목표다. 생태경제학이 표방하는 학습과정으로서의 참여는 행위자들이 민주적 절차를 통해 전문가 지식이 가지는 진실성을 회의하고 평가하고 때로는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의 지식이 가지는 권위가 무조건적으로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공론의 장에서 비판되고 검증되어 수용 여부가 결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신고전파경제학이 옹호하는 시장의 원리와는 공존하기 어렵다.86) 생태경제학이 제시하는 사회 속에서 전문가들의 지식은 지방적(local)이고 구체적인 (concrete) 체험으로부터 나오는 지식과 나란히 중요성을 얻는다. 전문가 들의 지식은 구체적, 실천적 지식이 개인의 욕구를 넘어 타자와의 대화를 가능하게 돕는 것이다. 이제 지식은 시장에서 고립된 개인들의 선택이나 전문가의 독단적 지식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들의 과학적 지식과 사람들의 실천적 지식이 결합되고(수직적 축), 개인이 아닌 모두의 지식이 논증을 통해 수렴되는 것(수평적 축)을 통해 도약한다. 이제 지식은 민주적 과정을 통해 집합적으로 생산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87)
경제적 정책 결정과정이 동료공동체의 확장을 통한 민주주의의 심화라면 경제학은 정치로부터 분리된 중립적 과정이기를 멈춘다. 경제는 그 자체로 정치적 성격을 띠며 경제적 정책 결정은 정치적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자체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중립적 관점이 존재하지 않는 한 문제해결은 언제나 타협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서로 갈등하는 가치들을 중재할 중립적 입장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88) 그러나 타협적 해결이 단순한 협상(negotiation)으로 오해되어서 는 안 된다. 타협적 협상은 합의된 판단(judgement)에 이르는 논증의 과정을 생략한 채 서로의 입장을 절충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다. 생태경제학이 주장하는 타협적 해결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상대주의적 태도를 비판해야 한다. 직면한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가치들이 충돌하지만, 비록 잠정적일지라도 해당 문제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합리적인 논증 과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증 과정이 없는 협상은 권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굴복하는 것 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형식적으로만 주어지는 대화는 있으나마나 한 것이다.89) 이런 맥락에서 생태경제학이 추구하는 문제해결 방식은 타협보다는 판단에서의 수렴(convergence in judgements)이라고 할 수 있다.90)
Ⅴ. 맺음말
과학은 그 자체로 언어적 실천이다. 인간 주체들의 불안정성과 관계들의 다중성, 자연과 사회의 불확실한 상호작용이 과학이 대결해야 하는 대상이라면, 과학은 언제나 유동하는 복잡한 대상을 불완전한 언어를 매개로 분석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은 ‘어떤 것도 괜찮다’(anything goes)는 상대주의적 지식이론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과학의 절대적 권위, 과학주의적 태도를 비판하는 것은 상대주의의 옹호가 아니다. 과학을 항상적인 자기비판, 즉 성찰성(reflexivity)에 개방함으로써 보다 단단 하게 현실에 토대를 둔 객관성을 향하도록 방향을 재설정하는 것이다. 과학이 ‘과학주의적’ 태도로 퇴행할 때 나타나는 ‘비과학적인’ 관념적 전제에 대한 부당한 옹호를 극복하려는 것이다. 즉 독단으로 전락한 과학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을 분리하고’, ‘수량적으로 측정될 수 없는 것을 측정하고’, 근대적 자유주의가 열어젖힌 다원주의를 부정하는 환원주의에 경도되어, ‘결코 비교될 수 없는 것들을 단일한 기준으로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왜곡된 과학과 지식이론을 떠받치는 비용과 편익을 계산하는 인간주체를 가정한다. 이 논문은 포스트모더니즘/포스트구조주의의 경험주의/실증주의(현상주의) 비판에 공감하면서도 지적 상대주의를 조장하는 사회구성주의와는 거리를 두는 실재론적 전환을 낡은 지식 패러다임 비판의 도약대로 삼았다. 그리고 신고전파경제학을 구체적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 지식생산과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려고 시도했다.
이런 맥락에서 본문에서 논의된 새로운 지식/교육 패러다임은 다음과 같은 기여를 할 수 있다. ① 결정론적 입장을 피하면서도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와 자연을 인간 행위의 조건으로 인식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지식구성이 가능한 것은 우리의 인식으로부터 독립적인 실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② 실재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두면서도 지적 상대주의가 초래하는 허무주의로부터 거리를 둔다. 타동적 차원에서 구성되는 다양한 해석은 자동적 차원과 연결될 때에만 온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③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서로 다른 가치와 해석을 과학적 지식구성과 결부시킴으로써 사회적 적대의 문제를 지식구성과 연결할 수 있게 한다. ④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다양한 해석들 사이의 합리적인 대화와 그를 통한 잠정적인 합의를 가능하게 한다. 과학적 실천, 지식구성, 교육을 적대-연대의 정치적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게 한다. ⑤ 일상에서 구성되는 지식, 즉 실천적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과학적 지식의 역할 또한 간과하지 않는다. 실천적 지식은 문제해결 중심으로 구성되며 대상을 완결적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오인할 수 있다. 과학적 지식은 이러한 실천적 지식의 한계 지점들을 성찰적으로 제기하고 그것의 지평을 넓혀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다. ⑥ 민주적인 지식생산과 학습의 과정은 행위자들의 문제해결 역량(capacities)을 강화하는 실천으로 위치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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