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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 깊이의 인식과 인식론적 상대주의의 실천 (1) - 서영표 본문
존재론적 깊이의 인식과 인식론적 상대주의의 실천
: 포스트-혼종성 시대 지식생산과 교육 패러다임의 전환
서영표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사회학과 교수
Ⅰ. 머리말
Ⅱ. 비판적 실재론의 간략한 설명
Ⅲ. 낡은 과학/지식패러다임-경제학의 사례
Ⅳ. 지식 생산/학습의 새로운 방향-생태경제학의 도전
Ⅴ. 맺음말
국문초록
이 논문은 다양성과 혼종성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낡은 지식생산과 교육 패러다임을 비판한다. 세계의 깊이와 복잡성을 평면화하는 경험주의와 실증주의를 비판하지만, 인식의 대상을 담론적 구성물로 환원하는 포스트모던적 사고에 대해서도 거리를 둔다. 존재론적으로 실재론을 옹호하면서 인식론적으로는 상대주의를 받아들이는 로이 바스카의 비판적 실재론으로부터 포스트-혼종성 시대의 지식과 교육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 인식론적 상대주의와 존재론적 실재론은 대상에 대한 민주적 토론과 숙의의 여지를 열어둔다. 당연히 토론과 숙의는 합리적이어야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현재의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삶을 지배하고 있는 ‘지배적 과학’이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혼종성 ‘이후’로 나가고 있는 사회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을 논증할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신고전파경제학을 대상으로 이러한 논증을 시도한다. 신고전파경제학은 인간을 계산하는 고립된 행위자로 가정하고, 시간을 선형적이며 분절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공간은 평면화하여 구획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깊이를 가지는 발생적 기제인 세계를 협소한 이론적 격자에 맞추어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새롭게 제기되는 생태경제학적 경향은 신고전파경제학의 허구적 가정을 공격한다. 이런 맥락에서 비판적 실재론이 제기한 방향전환과 공명한다.
Ⅰ. 머리말
근대적 지식의 바탕은 물리학에서 나왔다. 갈릴레이와 뉴턴에 의해 수학적으로 논증된 힘의 세계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며, 관찰과 경험에 기초해 보편 법칙을 찾아내고 그것에 따라 미래에 발생할 일을 예측할 수 있다는 믿음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미신과 신화의 세계 속에 사로잡혀 있던 인간의 이성은 명증하고 논리적인 과학에 의해 깨어나야만 했다. 미몽 상태에 빠져 있는 이성에 빛을 던져주는 것(Enlightenment, 啓蒙)이 과학의 역사적 책무였던 것이다. 분명 근대과학은 자신의 역사적 책무에 충실했다. 종교적 특권과 미신이 뒤섞인 낡은 체제를 합리성의 힘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모든 것은 의심받아야 했고, 그 의심은 과학적 논증에 의해 검증되어야만 했다. ‘주관적’ 편견은 ‘객관적’ 기준에 의해 비판되었고 모든 주장은 사실(facts)에 근거한 검증절차를 견뎌낼 때에만 지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온갖 이데올로기와 편견과 확연하게 분리된 과학이 ‘특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러한 과학적 태도가 또 하나의 신화가 되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이 새로운 신화는 모든 것을 의심하면서도 가장 날카로운 의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인간의 이성에 과도한 특권을 부여했다.1) 모든 인간은 심리적으로 불안정하며, 사회적으로 타자에 비추어 스스로를 파악할 수밖에 없는 상호의존적 존재다. 실존적으로 ‘나’의 정체성을 가져야만 살아갈 수 있지만 ‘우리’라는 공통의 문화적 서사(narrative)가 없다면 무의미한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2) 또한 역사적 존재이지만 과거를 부정해야 하고, 미래를 걱정해야 하지만 현재에 충실해야만 하는 모순적인 존재다. 더 결정적으로 이 모든 존재의 불안정성은 인간이 언어적 존재로 언어를 통해서만 대상과 관계들을 인식하지만 그 언어와 대상 사이에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틈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해 강화된다.3) 인간 지식이 가지는 근본적인 한계는 불가피하다. 인간의 삶이 자연적 조건 속에서 자연적 대상과의 상호 교호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면 대상으로서의 자연 또한 언어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결코 자연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으며, 계몽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길들일 수도 없다.
그래서 20세기 중후반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는 계몽주의적 거대서사를 근본에서부터 비판했다. 계몽주의적 해방의 기획은 다양성(diversity)과 차이(difference)를 억압하는 ‘폭력’과 동일시되었다. 데카르트적 이원론(Cartesian dualism)에 근거한 이성과 감성, 문명과 야만, 서구와 비서구, 남성과 여성의 위계질서는 전복되어야 할 운명이었다. 순수한(pure) 것과 고정된(fixed) 것은 혼종성(hybridity)와 유동성(fluidity)의 이름으로 부정되어야 했다. 이제 세상은 고전역학에서 기원하는 필연성(necessity)이 아니라 우연성(contingency)으로 이루어진 곳으로 이해되어야 했다.4)
1960년대 말 서구사회를 휩쓸었던 급진주의의 물결에 동참했던 세대에게 이러한 포스트모던 비판은 낡은 지적 권위를 무너뜨리는 역사적 전환이기도 했다. 서구제국주의에 도전하는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 남성중심의 가부장제를 비판했던 페미니즘(feminism), 백인중심의 차별을 넘어서려 했던 반인종주의(anti-racism), 이성애와 가족중심주의를 깨고 나가려 했던 퀴어(queer)운동, 그리고 자연을 인간 욕구 충족의 대상으로 착취하는 인간중심주의에 도전했던 생태주의(ecology)까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상식의 세계를 문제시하는 새로운 지적 운동들은 순수하고, 고정되고, 결정되어 있는 것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근대적 지식 패러다임을 극복하려 했다.5)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은 권력 관계에 깊숙이 연루된 담론적 실천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비판되었다.6)
분명 포스트모던 비판은 남성중심주의, 서구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앞에서 언급한 계몽주의적 기획의 한계를 폭로했다. 하지만 이론적인 수준에서 현실을 짓누르고 있는 억압적 구조를 비판하는 데까지는 효과적이었지만 비판 이후 여전히 실재하는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현실을 변화시키는 사회적 실천의 좌표를 설정하는 데에서는 약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7) 모든 것을 담론이라 불리는 언어적 세계 안에서의 우연성으로 설명하는 것은 좌표를 상실하게 했다. 위르겐 하버마스(Jügen Habermas)가 포스트모던 비판의 선봉에 섰던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을 보수주의자로 비난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8)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모든 것이 상대주의적이라면 어떤 근거로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가?
포스트모던 비판은 세상을 혼종성의 시각에서 바라보게 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혼종성 ‘이후’를 말하기 시작했다. 물론 혼종성 이후, 즉 포스트-혼종성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포스트모던 비판을 더욱 강하게 밀고 나가 포스트-휴머니즘 (post-humanism)의 단계로 밀어붙이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체성(corporeality)과 세계의 실재(reality)를 기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대성의 지반에 남아 있으면서도 포스트모던 비판이 제기한 인식론(epistemology)을 적극 받아들이는 새로운 종합으로 나갈 수도 있다. 이 글의 주장은 두 번째 입장에 서 있다. 인식론적으로 언어를 매개로 해 세상을 인식할 수밖에 없는 인식론적 상대주의(epitemological relativism)를 받아들여 지식은 언제나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와 동시에 인식의 대상이 되는 세계는 인지행위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존재론적 실재론(ontological realism)을 옹호한다. 그리고 과학적 실천은 실재하는 세상에 대한 상대적 인식 사이에서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행위다. 이것을 판단적 합리성(judgemental rationality)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생각은 영국의 철학자 로이 바스카(Roy Bhaskar)가 제시한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의 핵심 주장이다. 바스카는 자신의 철학적 작업을 과학적 실천의 장애물을 청소하는 것에 비유했다.9) 바스카가 장애물로 지목한 것은 지식의 존재론적 대상성(실재)을 기각하고 담론적 또는 언어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인식적 오류(epistemic fallacy)와 실재를 감각적 경험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평면으로 간주하는 현상주의(actualism)였다.10) 비판적 실재론은 인식적 오류와 현상주의를 비판하고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함의가 담겨 있다. 첫째, 얕은 경험주의를 넘어서는 순간 세계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들 사이의 숙의(deliberation, 熟議)가 과학의 기준으로 스며들 수 있게 된다. 과학의 기준 안으로 민주주의를 도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는 것이다. 둘째, 민주주의의 도입은 과학적 합리성이 훈련받은 전문가들의 협소한 기준을 벗어나게 한다. 과학적 실천은 실험실과 연구실에 한정되지 않고 일상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과학적 실천이 공론장(public sphere)으로 확장될 때 지식의 생산은 일상적 삶에서의 학습(learning)과 분리될 수 없게 된다.11)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모두 포함하는) 과학적 실천과 지식의 생산은 곧 학습의 과정이며, 학습은 교육과 겹쳐질 수밖에 없다. 세상의 존재와 세상을 알아가는 지적 실천의 성격을 규정하는 존재론과 인식론은 곧 학습과 교육에 대한 이론이기도 하다. 팬데믹과 기후위기, 그리고 경제위기와 정치적 정당성의 위기, 그리고 여기에 더해진 사회적 연대의 위기는 복합적이다. 이러한 위기는 단지 담론적 실천만으로 극복되기 어렵다. 구조적 조건과 제도적 관행에 대한 비판과 변형이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과 변형은 일상의 학습과정을 통해 문제를 인식할 수 있는 ‘다수’가 존재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복합적 위기의 실체를 설명하고 대안을 찾는 공동의 지적 실천과 정치적 실천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Ⅱ. 비판적 실재론의 간략한 설명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글의 목표는 포스트모던 비판을 수용하여 실증주의적 지식 패러다임을 현상주의로 비판하지만 사회구성주의라는 이름의 인식적 오류로부터도 거리를 두는 것이다. 그럴 때에만 우리가 함께 겪고 있는 구조적 문제에 대한 이해를 전문가의 독단으로부터 되찾아와 서로 다른 해석들 사이의 토론에 의한 공동의 학습과정으로 위치지울 수 있다. “환경이 인간들에 의해 변화되며 교육자 자신도 교육되어야 한다”12)는 사실이 너무나 오랫동안 망각되어 온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비판적 실재론의 개요를 설명해야 한다.13)
1. 자연주의와 실재론
비판적 실재론은 비판적 자연주의(critical naturalism)와 초월적 실재론(transcendental realism)의 합성어다. 여기서 자연주의란 자연과 인간사회를 연구하는 방법이 다르지 않다는 주장이다. 이런 의미에서 실증주의 과학관은 자연주의적이라고 불릴 수 있다.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는 근대 과학혁명을 목격하면서 사회에 관한 학문, 즉 사회학이 자연과학이 이미 성취한 것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관찰과 비교를 통해 법칙을 찾아내고 예측하는 것이 과학이 갖추어야 할 기본 요소였다.14) 콩트는 경험주의에 바탕한 실증주의(positivism)를 정립했다.
이미 19세기에 신칸트주의자(Neo-Kantian)들로 분류되는 일군의 학자들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방법론은 달라야 한다는 반자연주의적 입장을 개진했다. 신칸트주의자였던 막스 베버(Max Weber)는 사회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로 구성되어 있고, 인간사회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행위의 의미라고 말했다. 그에게 경험적인 감각자료만으로 사회적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베버가 사회과학의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이해(understanding)이며 해석(interpretation)이다.15) 20세기 중반까지 이 논쟁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16)
이러한 논쟁 지형에 충격을 준 사건은 1962년 토마스 쿤(Thomas Kuhn)의 <과학혁명의 구조>의 출간이었다.17) 쿤은 과학적 패러다임(paradigm)이 실증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초역사적인 방법론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정상과학(normal science)이라고 불리는 인식의 틀과 분석의 방법은 과학자 공동체의 합의에 의해 구성되는 것일 뿐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적 패러다임, 코페르니쿠스적 패러다임, 뉴턴적 패러다임, 아인슈타인적 패러다임, 양자역학적 패러다임이 그러했다. 과학적 패러다임이 정상과학으로 인정되는 시기에 그것은 안정적이다. 그러나 하나의 패러다임이 설명하지 못하는 현상들이 누적되면 정상과학은 그 ‘정상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정상과학의 위기이며 곧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 즉 지배적 패러다임의 교체로 귀결된다.
비판적 자연주의는 이러한 이론적 맥락에서 등장한다. 우선 비판적 자연주의는 지배적 자연주의, 즉 실증주의-경험주의적인 자연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여기까지는 쿤, 그리고 그를 뒤이은 포스트모던 또는 포스트구조주의적 입장과 동맹관계에 있다. 하지만 ‘비판적’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주의, 즉 자연과 사회를 탐구하는 방법론은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입장은 지키려 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바스카와 그의 지적 동지들은 실증주의-경험주의의 방법론이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데에도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자연은 다양한 기제들이 서로 중층적으로 작용하고 하나의 기제가 다른 기제의 발현을 억제하거나 왜곡할 수 있기 때문에 표층적 수준에서 얻어진 경험적 자료를 통해 자연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조차도 경험적 수준(empirical level)을 넘어서, 현상적(actual), 실재적(real) 수준으로 층화된(stratified) 대상으로 분석되어야 한다.18) 경험적 수준에서 얻어지거나, 현상적 수준에서 확인된 사건들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기제(mechanisms)가 있어야 했다. 경험적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그러한 경험적 사실을 발생시키는지에 대해 질문해야 하는 것이다. 이같은 방법은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에도 적용될 수 있다. 물론 주의할 필요가 있다. 자연과학은 특정한 기제를 찾아내기 위해 다른 기제를 통제할 수 있지만(실험실에서의 통제) 사회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19) 바스카가 지적하고 있듯이 사회는 자연과 달리, 개념 의존적이고, 행위 의존적이며, 그래서 자연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만 지속되는 구조이다.20) 그럼에도 자연주의는 지지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비판적 자연주의를 통해 초월적 실재론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자연과 사회 모두 심층적인 구조를 가진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자연적 구조이든, 사회적 구조이든 인식과 해석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사회가 행위 의존적이고, 개념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후에도 그렇다.21) 그런데 초월적이란 수식어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transcendental idealism)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바스카는 칸트와 자신을 비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초월적’이라는 수식어를 선택했다. 실체(noumenon)의 세계는 인간의 지성(understanding)으로는 인식될 수 없으며 인과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도덕의 영역이며 이성(reason)의 영역이다. 그리고 지각의 대상인 현상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선험적 범주에 의한 것이다. 이와 반대로 바스카가 의도한 것은 초월적이라는 수식어를 통해 인식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을 강조하지만 ‘실재’라는 개념을 통해 그것을 인식 지평으로 되돌려놓는 것이다. 실재는 초월적이지만 언제나 우리의 인식과 해석의 대상이며, 그 인식과 해석은 실재에 반작용함으로서 그것을 변화시킨다.22) 바스카에게 선험적 범주는 불필요하다.
2. 지식의 자동적 차원과 타동적 차원
바스카는 비판적 실재론을 방어하기 위해 존재론적 실재론과 인식론적 상대주의를 제시했다. 이 두 견해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바스카가 제시하는 자동적 차원(intransitive dimension)과 타동적 차원(transitive dimension)의 구별을 이해해야 한다.23) 바스카는 지식과 독립적인 현실 대상이 존재하지만 인지적 개념화24) 없이는 현실 대상이 인식될 수 없음을 주장하기 위해 타동적/자동적 차원의 개념을 활용한다. 자동적 대상은 지식/담론과는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대상의 차원을 지칭하며 타동적 대상은 그것에 대한 지식의 차원을 말한다. 비판적 실재론의 관점에서 보면 자동적 차원은 현실의 사건들을 생산하는 발생적 기제들(generative mechanisms)을 의미한다.25) 그런데 경험적으로 드러나는 사건들, 즉, 현실의 사건들 사이의 관계는 과학적 법칙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복잡한 기제들로 이루어진 심층구조의 효과(effects)로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경험론 또는 실증주의의 오류(현상주의)는 이렇게 복잡한 기제들의 심층 구조를 과학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 간의 관계를 과학적 법칙으로 정립하려는 데 있다.
비판적 실재론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간다. 과학적 실천은 발생적 기제들로부터 심층적인 과학적 법칙을 밝혀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심층적 구조/기제는 인간의 인지적 실천, 말하자면 사회적 실천으로서 과학적 실천에 의해 생산되고 변용된 매개적 개념화―과학의 타동적 차원―없이는 밝혀질 수 없다. 역으로 타동적 차원 내에서 과학적 실천은 그것이 분석 대상으로 하는 자동적 대상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즉 과학적 실천은 이론적 일관성, 사용된 모델의 개연성 등의 과학적 기준을 통해 현실 대상에 관한 지식을 끊임없이 심화시키는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적 실천의 목적은 언제든 수정될 수 있는 발생적 기제들의 경향들(tendencies)을 발견하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과학적 지식은 누적되지만 실증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연속적인 방식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다양한 체험, 다양한 해석, 다양한 실험 사이의 논쟁이 생산하는 잠정적 지식에 의해 세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뿐이다.
세계의 두 차원의 구분은 층화된 실재(stratified reality)라는 개념과 관련된다.27) 이 개념은 한편으로 앞에서 언급한 실재적인 것(the real)의 영역과 현상적(the actual)이고 경험적인(empirical) 영역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비판적 실재론의 층위 이론은 실재적, 현상적, 경험적 차원을 구분하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은 (학문 분과를 통해 설명하자면) 물리학으로부터 시작해서, 화학, 생물학, 생리학, 심리학, 사회과학의 단계로 올라가는 서로 다른 차원의 층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28) 비판적 실재론은 하위 층위가 상위 층위의 기제들의 토대를 설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기제들의 속성의 발현을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상위 수준에 관한 설명은 하위 수준의 특징으로 환원될 수 없다. 각 층위는 발현적 속성(emergent powers)을 보유하며 이것이 하위 층위에 반작용하고 또 그것을 수정한다.29) 인간의 언어활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성대구조에 대한 물리학적, 생물학적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이 곧 인간의 언어활동이 물리학적, 생물학적 구조로 환원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역시 인간의 두뇌활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생물학적 또는 생화학적 지식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인간의 정신활동을 생물학적 또는 생화학적 구조로 환원하는 것은 아니다.30) 구조에 관한 지식의 심화는 수평적 차원 내부의 다중적 기제들의 식별뿐만 아니라 위계적 층들 사이의 수직적 관계들의 분리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층위를 식별하는 것 자체가 과학적 지식이 심화된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비환원론적 자연주의(non-reductionist naturalism)라고 부를 수 있다.31)
자신의 지적 경력의 마지막 단계에서 바스카는 비판적 실재론을 교육에 적용하려고 했다. 앞의 논의에서 분명해졌듯이 세계에 대한 인식과 설명은 평면적인 실증주의나 담론환원론적인 포스트모더니즘에 의지할 수 없다. 바스카는 현세대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도전인 기후위기를 설명하고, 위기에 처해 있는 인간 복지(human well-being)를 해명하는 데 자신의 이론을 적용하면서 비판적 실재론의 교육학적 활용을 깊이 고민했다.32) 기후위기는 다양한 학문분과들 사이의 공동의 작업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으며, 그것을 체험하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반영될 때에만 극복방향을 찾을 수 있다. 인간복지는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관계를 통합적으로 고려할 때에만 제대로 해명될 수 있다. 경제적 성장만으로 인간의 복지를 해명할 수는 없으며, 삶의 사회적 의미와 정체성과 함께 인간의 신체성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자 자연적 존재인 것이다. 벤턴의 비환원론적 자연주의가 가리켰던 바로 그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의 길을 따라 한 발자국 더 내딛어 보자.
[출처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830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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