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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과학의 발전과 철학의 한계 본문

과학철학

근대과학의 발전과 철학의 한계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2. 2. 12. 10:06

근대과학의 발전과 철학의 한계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과학혁명 이후 인생과 우주 전반에 대한 지식체계로 군림했던 철학은 개별학문으로 쪼개져나가고 과학이 새로운 종합학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물론 초기 과학은 부분적이었다. 철학이 세계 전체를 일관되게 설명할 당시 과학은 자연현상을 새롭게 설명하는 지엽적인 학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과학은 보편이론으로 등장한다. 혁명의 첫 방아쇠는 코페르니쿠스였다. 경험을 무시하고 오로지 이성으로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던 스콜라철학자들과 달리 코페르니쿠스는 정확한 관측과 수학을 통해 천체의 운동을 증명했다. 그가 출판한 『천구의 회전』에서 회전을 뜻하는 ‘revolution’은 이후 ‘혁명’의 의미까지 갖게 되었다. 근대 과학은 뉴턴에 와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다.


뉴턴의 물리학은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학문 전체의 표준적인 모델로 간주되었다. 과학적 지식은 이제 진리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다양한 학문과 이론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과학임을 경쟁하게 되었다. 과학은 자연의 운동과 변화를 더 잘 설명하는 것에서 나아가 자연을 지배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러한 실제적인 힘을 통해 과학은 사회질서 역시 혁명적인 변화를 가능케 했다. 과학은 기본적으로 권위에 의존하지 않는다. 실험에 의존하는 과학은 기존 지식을 자유롭게 비판하며 누구든 같은 실험을 해볼 수 있고 남들이 해보지 않은 실험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과학은 탈권위주의와 탈신비주의를 추동한다. (과학자들은 신비함에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따라서 과학은 민주주의와 연결된다. 종교가 지배하던 시대는 과학의 부흥과 함께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과학의 출현에 대해 근대 철학자들은 놀라움과 함께 과학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려고 했다. 철학자들에게도 과학적 지식은 신학적 지식보다 더 확실하고 보편타당한 일반법칙이었다. 그들은 과학적 인식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사유했다. 합리론의 대표자 격인 데카르트는 자기의식 능력, 즉 본유관념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이성이란 ‘질서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으로 끝없는 연역을 통해 모든 것의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등이 그 계보를 잇는다. 이와 달리 경험론은 본유관념 자체를 경험에서 축적된 것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이성도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로크는 경험이란 대상에 의한 자극이라고 보았다. 그는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외부의 대상을 상정했지만 버클리는 자극을 주는 외부의 대상에 대해 의심했다. 대상이 외부에 있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경험을 통해 증명할 수 있는지 질문했다. 흄은 외부의 대상이 존재하는지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대상의 인과율에 대해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에게 지식은 오직 경험에서만 오는 것이다.


경험론과 합리론을 종합한 것은 칸트였다. 칸트는 데카르트도 받아들이고 흄도 받아들였다. 그는 흄이 진짜 관념이라고 결론 내렸던 심리, 즉 단어를 분해하고 결합하여 인상을 관념으로 바꾸는 심리적 속성이 데카르트의 본유관념과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그에게 경험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경험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경험을 하기 위한 선험적 조건이 이성이라고 생각했다. 이성 능력이 없다면 과학적 인식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었다. 그러나 결국 칸트는 과학을 설명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인간의 경험이나 이성과 상관없이 과학자들은 대상이 존재하며 대상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전제한다. 이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철학은 과학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칸트에게 과학적 인식(순수이성)이란 오직 경험될 수 있는 것에만 쓸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본유관념을 갖게 되지만 그러한 인식능력은 경험에 적용될 때만 과학적 지식이 되는 것이지, 경험될 수 없는 것, 예를 들어 신, 정신, 자유, 물자체, 원인세계 등에 적용된다면 과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영역은 철학에서 다뤄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칸트에게 사회과학은 불가능하다. 사회철학이 필요한 것이다. 신칸트주의에서는 그래서 자연과학은 과학적으로 할 수 있지만 사회과학은 개별적인 것들을 해석학적으로 다뤄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경험 너머의 원인까지 나아간다. 자연과학은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결과를 낳은 실체에 도달하려고 한다. 이로써 근대철학은 과학적 인식론이 무엇인지 규명하는 데에 실패하고 만다. 과학이 전제로 하고 있는 세계관이 무엇인지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학의 핵심 전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신은 자연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 말은 본래 뉴턴의 말이다. 뉴턴은 신학자였지만 자연현상을 탐구하면서 신이 자연을 만들었으나 자연의 질서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확립했다. 과학자들은 종교적으로 신을 믿을지는 몰라도 자연에는 자연 고유의 질서가 있다고 본다.

둘째, 존재가 인식보다 먼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와 달리 우주는 인간의 인식과 상관없이 존재한다고 과학자들은 본다. 자연은 독립적 존재이다.

셋째, 자연 자체에 인과율이 내재해 있다. 모든 현상은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관계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넷째, 인간은 인과적 관계에 대해 인식할 수 있다. 과학은 현상을 일으킨 인과적 힘을 찾는 학문이다. 따라서 초월적 신비는 인정하지 않는다.

“돌을 던지면 항상 땅에 떨어진다”라는 규칙성을 관찰한다고 해보자. 우리는 관찰된 규칙성으로 인해 돌을 던지는 사건(A)과 땅에 떨어지는 사건(B) 간에 항상적 연접(C)의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흄과 같은 경험론자의 관점에서는 A와 B, 그리고 C만 경험할 수 있을 뿐, 감각 경험으로 증명할 수 없는 필연적 법칙이라든지 인과관계 같은 것은 경험할 수 없기에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비판적 실재론의 관점에서 이는 존재에 대한 지식을 존재에 대한 ‘인간’의 지식으로 환원하는 ‘인식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은 인간에 의존적이지만, ‘돌을 던지면 땅에 떨어지는’ 사건을 발생시키는 자연의 인과율은 인간과 독립적으로 실재한다. 경험론의 인식적 오류는 실재를 감각 경험의 현상에만 국한시키는 인간중심적 존재론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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