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존재론적 깊이의 인식과 인식론적 상대주의의 실천 (2) - 서영표 본문
Ⅲ. 낡은 과학/지식패러다임-경제학의 사례
서론에서 언급한 레이먼드 윌리엄스에 따르면 지식생산과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은 정치적이며, 정치는 경제적 조건과 깊숙이 연루된다. 그리고 이것은 물질적 배경에 의지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재생산/변형하는 문화적 실천과 분리될 수 없다33). 이런 생각에 비추어 보면 얕고 평면적인 실증주의/경험주의는 불평등과 착취, 사회적 모순의 근원을 찾아 비판하고, 그에 따라 사회를 보다 나은 상태로 이끌고 갈 수 있는 전망을 제시하는 데 취약했다. 경제적 불평등과 착취를 감싸고 그것을 재생산하게 하는, 하지만 그 안에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맹아를 담고 있는 문화를 설명할 수 없었다. 압력을 행사하고 조건 짓는 경제와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문화의 복잡한 관계들은34) 실증주의/경험주의의 현상주의로는 파악될 수 없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는 이러한 지배적 지식-교육 패러다임을 비판하려고 했지만 과잉된 반응으로 비판의 준거를 상실하고 지적 상대주의로 기울게 된다. 이것이 비판적 실재론의 개입지점이었다.
이제 이러한 논쟁의 맥락에서 현실의 모순과 위기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가로막는 낡은 지배적 지식/과학 패러다임을 구체적으로 비판할 차례다. ‘장애물’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이 글의 구체적 비판 대상은 지배적인 지식/과학 패러다임이 응축되어 있는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이다.35) 경제학은 마치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정복하고 지배하듯 스스로가 세워놓은 ‘관념적 전제들’ 위에 수학적 모델을 모래성처럼 쌓아올린 후 인간과 사회의 비밀을 해결한 것처럼 모든 분과학문을 통치하고 있다.36) 그 어떤 명분으로도 식민통치가 정당화될 수 없듯이 경제학적 ‘제국주의’도 정당화될 수 없다. 비판적 실재론이 제기한 인간사회의 다층성, 복합성, 복잡성은 식민통치의 이데올로기인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이 역설적으로 근대과학이 옹호하는 사실적 근거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보여준다. 인간의 본성, 시간과 공간이 경제학에 의해 어떻게 왜곡되고 있는지 실재론의 관점에서 검토해야 한다.
1. 공리주의적 인간론
주류경제학의 토대는 인간을 고립된 원자(原子)로 ‘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론은 공리주의(utilitarianism)라는 철학적 배경을 갖는다.37) 공리주의의 기본은 '인간은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최소화하는 본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의 양적 공리주의를 세련화한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질적 공리주의에서도 이 원칙은 변함없이 견지되었다. ‘근대적’ 인간은 공리주의적 원칙에 따라 모든 행위에서 거래비용을 계산하여 편익(benefit)을 극대화하는 선택을 한다고 가정된다.38) 경제학은 이러한 ‘관념론적’ 전제를 가지고 과학의 지위를 주장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발명한다. 경제학의 수학화가 대두되는 것이다. 윌리엄 스탠리 제본스(William Stanley Jevons)에 의해 ‘발명’되었고 알프레드 마셜(Alfred Marshall)에 의해 완성된 신고전파경제학은 미적분학을 적용한 한계효용(marginal utility) 개념으로 쾌락과 고통을 단위(unit)로 나누어 측정하고 계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39)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을 나누는’, 그리고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측정하는’ 잘못된 전제가 수학적 논리에 은폐되어 과학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관념적인 공리들에 의해 도출된 명제들은 계속해서 부당한 전제들에 의해 뒷받침된다. 비용-편익분석(cost-benefit analysis)의 사례로 좀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비용-편익 분석은 고립된 원자로서의 개인, 공리주의적 인간론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에 근거해서 도출된 파레토 최적(Pareto Optimality) 또는 파레토 향상(Pareto Improvement)을 적극 활 용한다. 파레토 최적은 누군가의 편익(효용)을 감소시키지 않고서는 다른 이의 편익(효용)을 증가시킬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40) 따라서 균형 상태에 있지 않을 때, 사회 전체의 자원은 모두의 편익(효용)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조정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 누구도 A상태보다 B상태를 선호하지 않을 때, A상태가 그 전에 존재했던 B상태에 비교해 사회적 향상을 의미한다”는 것이다.41)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파레토 최적은 불평등한 자원배분에 대해 무관심하다. 파레토 향상 과정에서, 그리고 파레토 최적 상태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전제가 도입된다. 칼도어-힉스 보상 테스트(Kaldor-Hicks compensation test)가 그것이다. 이 원리에 따르면 누가 편익(효용)을 얻고 잃는가에 상관없이 사회의 총편익(aggregate benefits)이 총비용(aggregate costs)보다 크다면 효율적이다.42)
바스카의 비판적 실재론에서 배웠듯이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회는 매우 복잡한 관계망들에 의해 만들어진, 그리고 한 순간도 멈추어섬 없이 지속적으로 변형되는 다층적인 기제들의 복잡한 상호작용 그 자체이다. 인간들이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는 자연생태계도 그 자체로 복잡한 체계로 운동하고 있다. 이 두 개의 복잡한 체계 사이를 언어와 상징이 매개하게 되면 의미, 해석, 실천으로 가득찬 삶의 양식이 나타난다. 아주 작은 언덕, 나무 한 그루, 오래된 골목조차도 생태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의미들이 중첩되어 있다. 고립된 원자로서 비용과 편익을 계산하고 모든 선택을 도구적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비교하기(comparable) 어려운, 그리고 공약불가능한(incommensurable) 가치들로 충만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신고전파경제학의 공리주의적 전제를 비판하는 것이 철학적 라이벌인 의무론(deontology)을 옹호하는 것일 수는 없다. 공리주의는 결과의 좋고 나쁨에 근거해서 가치를 판단한다. 결과주의(consequentialism)라고 불리는 철학적 입장이다. 이에 반해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에서 연원하는 의무론은 결과와 무관하게 합리적 주체로서 가지고 있는 인간의 의무에 호소한다. 칸트에게 인간은 현상계의 인과법칙에 완전히 지배되지 않은 자율적 주체, 즉 계몽된 주체여야만 했다. 현상(phenomenon)과 실체(noumenon), 즉 지성의 세계와 이성의 세계는 구분되어야 했다. 그래서 칸트는 결과보다는 절차를 중요시하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철학적 입장은 공리주의가 전제한 부당한 인간론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있겠지만 ‘살아 숨 쉬는, 피와 살이 있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관념론적인 인간론을 전제하기는 마찬가지다. 칸트에게 합리적 주체는 오직 자신의 자율적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이다. 그런데 무수히 많은 의미의 망, 상징의 체계, 가치 들의 중첩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은 칸트가 가정한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결국 공리주의적 자유주의 비판을 자신의 철학적 과업으로 생각했던 존 롤스(John Rawls)는 재분배를 허용하는 자유주의 체제를 도출하기 위해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에 가려져 생존에 필수적인 기초재(primary goods) 이외는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하는 ‘가상의’ 사람을 출발점으로 삼아 주장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43)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으면서도, 그리고 차등을 받아들이면서도, 불평등을 해소하는 개입을 허용할 수 있는 사회를 옹호하기 위해 논리적인 명제들을 쌓아 올리지만 그 맨 밑단에서는 실재로부터 한참이나 멀리 있는 관념론적인 인간을 주춧돌로 삼은 것이다. 실증주의와 결합한 공리주의가 현상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면 칸트-롤스의 의무론은 인식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2. 선형적 시간(Linear Time)
상식적인 수준에서 인간이 역사적 존재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실’이다. 그런데 경제학은 이렇게 당연한 사실을 부정한다. 과학의 이름으로 그렇게 한다. 그래서 인간을 역사적 존재로 이해하는 순간 경제학의 기본토대가 붕괴한다. 고립된 원자, 합리적으로 비용과 편익을 계산하는 이기적 주체에게는 역사가 없다. 인간이면 ‘누구나 그러해야 한다’는 보편성(universality)이 역사적 특수성(particularity)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의 인간은 언제나 다양한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ensemble)이다.44) 우리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보편성은 언제나 역사 속의 특수성 속에서 불완전하게 확인되는 것일 뿐이다.45) 삼국시대의 사람, 고려시대의 사람, 조선시대의 사람, 그리고 지금 현재의 사람들의 인간에 대한 정의와 가치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을뿐더러 논리적이지도 않다.
경제학적 시간 이해는 거꾸로 생각해도 문제가 있다. 비록 정확히 시기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라도,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사람들은 자연과의 교호 방식의 변화를 통해 공진화(co-evolve)해 왔고, 그럼으로써 서로 다른 삶의 방식과 가치(종교와 문화)를 만들어 왔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의 역사, 즉 앞선 세대 사람들의 기억들이 현재의 삶의 방식과 가치 속에 침전되어(sedimented) 있음을 알고 있다.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현재에서 다시 정의되고, 심지어는 새롭게 발명되기도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한국인으로서의 감정을 가진다. 외국어로 번역될 수 없는 한국인만의 정서, 그리고 그 정서를 응축해서 표현하는 말들은 고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성을 가진다고 이야기된다. 우리는 역사를 초월한 보편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역사적 특수성을 가지지만 동시에 역사를 관통하는 (비록 변형되고 갱신되지만) 가치와 문화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46) 종족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할 때조차 이러한 가치와 문화를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경제학의 시간개념이 왜 문제인지 보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신혼여행을 간 부부 두 쌍의 다음과 같은 가설적 이야기를 들어보자.47)
A. 막 결혼한 커플A가 2주의 신혼여행을 떠났다. 휴가의 시작은 재난에 가까웠다. 각자는 전에는 알아채지 못했던 것들을 너무 많이 알게 되었다. 그들은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첫 나흘은 엄청난 소동 속에 지나갔다. 그러나 그다음 8일 동안 계속해서 논쟁하면서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각자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되었다. 휴가의 마지막 이틀 동안 그들은 무척 행복했고, 각자는 논쟁 이전보다 더 좋아진 관계가 실현되었다고 느꼈다. 휴가는 행복하게 끝났다. 슬프게도 돌아오는 여행 중에 비행기 폭발사고가 났고 둘 모두 사망했다.
B. 막 결혼한 커플B가 신혼여행을 떠났다. 처음 열이틀 동안은 아주 좋았다. 열세 번째 되는 날 각자가 싫어하는, 서로에게서 알아채지 못했던 특징을 알게 되면서 관계가 매우 악화되었다. 서로가 둘의 관계에 대해 매우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휴가의 마지막 날 최악의 소동을 겪게 되었고 돌아오는 비행기를 탈 때도 서로 반대편 좌석에 앉았다. 둘 모두 비행기 폭발 사고로 사망했다.
사람들에게 이 두 경우 중 어떤 경우를 선택할지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A를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적으로 사고하면 B의 총효용이 더 크다. 시간의 흐름 속에 내포되어 있는 내러티브는 고려되지 못하고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시간 속의 체험이 단위로 쪼개져 합쳐질 수 있다고 믿는 경제학적 패러다임 안에서는 B의 총효용이 더 크기 때문이다. 경제학은 스스로가 설정한 협소한 과학의 기준에 욱여넣기 위해 현실을 왜곡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고전파경제학의 이러한 시간 관념은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 지속가능성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여지가 크지만 가장 기본적인 정의는 현세대가 필요를 충족하는 방식이 다음 세대의 필요충족을 위협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와 현재의 시간적 겹쳐짐을 부정하고 현재 세대의 선호(preference)에만 관심을 갖는 경제학적 패러다임은 미래세대의 비용과 편익을 축소할 수밖에 없다. 현재를 사는 사람들과 미래에 올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연관도 없고 각각이 가지고 있는 비용과 편익은 수량적으로 계산되어 합산될 뿐인데, 현재로부터 멀어질수록 비용과 편익은 할인되어 계산된다.
우리 모두는 과거의 문화적, 사회적 유산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나의 생각, 나의 존재, 나의 의미는 침전된 과거로부터 생겨나며, 이 모든 것은 ‘내’가 사라진 후의 해석에 의존한다. 이러한 역사적 시간에 대한 이해 결핍은 인간 삶을 규제하는 비동시대적인 것들의 동시대적인 겹쳐짐을 이해할 수 없게 함으로써 결코 화폐량으로 표시되는 비용과 편익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한 가치들을 무시하게 한다. 합리성은 곧 인간사회의 실재를 얼마나 잘 설명하는가에 달려 있지 않고 근대적 과학이 설정해 놓은 기준에 부합하는 정도에 따라 판단될 뿐이다. 그 기준에 맞는 것만을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곧 독단과 맹목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경제학은 관념적으로 정의된 인간에게 역시 관념적으로 정의된 시간을 덧씌움으로써 ‘삶의 방식’이어야 하는 경제학을 삶으로부터 유리시켜 이론의 격자 속에 가둔다. 기계식 시계에 의해 측정되는 ‘근대적 시간’이 사람들의 삶을 삼켜 버린 것이다.48)
3. 공간의 평면화와 분절화
신고전파경제학은 사람들의 공간체험도 왜곡한다. 구체적으로 체험되는 공간은 균질하지 않다. 시간성이 중첩되어 있듯이 공간은 구체적인 인간들의 체험, 즉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생산’된다. ‘나’로부터 뻗어나가는 공간체험은 지구적 수준에서 국가적 수준을 거쳐 구체적인 장소 감각이 중첩되어 가능해진다. 공간은 겹쳐지고, 주름져 있다. 굴곡져 있고 울퉁불퉁하다. 그리고 공간은 부피를 가진다. 이렇게 균질적이지 않은 공간은 ‘나’를 포함한 사람들의 관계들 속에서 변형된다.49)
이렇게 생산된 공간은 모두 독특한 의미의 망 안에 존재한다. 생산된 공간, 끊임없이 변형되는 공간은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의미들이 포개져 만들어진다. 이렇게 보면 서로 다른 시간성의 겹쳐짐은 공간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서로 다른 세대(시간성)의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들이 켜켜이 쌓여 공간 생산(변형)의 원재료가 되는 것이다. 역사적 흔적의 퇴적이라는 것은 곧 공간이 문화적인 층위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의 문화적 실천들의 흔적들이 현재의 삶 속에 투영되어 서로 다른 층위와 시간성의 겹쳐짐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 의미의 층위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는 사람들의 화해할 수 없는 공간적 실천들의 대결을 내포하기도 한다. 공간은 적대들(antagonisms)을 가로지르며 생산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적대들을 담고 있는 공간의 사회적 층위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공간을 둘러싼 대결이 공간의 생산에 깊이 연루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50)
이렇게 과잉 결정되어 생산되는 공간은 세 가지 기본적인 특성을 가진다. 첫째 이미 확인된 바대로, 공간은 장소에 고착되어 고정되어 있지 않다.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어야 한다. 둘째 공간은 분리되어 절단될 수 없다. 공간은 그 자체로 여러 층위들의 겹침 효과에 의해 생산되기 때문에 지도제작자나 도시계획가가 인위적으로 만든 경계로 나누어질 수 없는 연속성을 가진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쉬이 판단하기 어렵다. 그런 판단 자체가 적대를 내포한 정치적 행위일 수밖에 없 다. 셋째 고정되어 있지 않고 분절될 수 없기에 공간은 서로 교환되어 비교될 수 없다. 비교는 끊임없는 생산의 과정 속에 있는 공간을 관념적으로 고정시키고 다층적인 의미망에 의해 만들어진 두께를 부정할 때에나 가능하다. ‘나’와 ‘우리’, 그리고 ‘그들’을 중심으로 생산되는 공간은 모두 독특함, 또는 특수성을 가진다. 이러한 독특함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특수성을 부정하고 하나의 측정기준으로 환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환원은 불가능하다.51)
신고전파경제학은 이렇게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주장을 넘어서 그렇게 해야만 과학이라고 강변한다. 강변은 권력을 동반할 때 유일한 ‘진리’로 둔갑한다. 실재는 지도로 ‘왜곡’되어야만 하고, 그 위에 점으로 표시될 수 있을 때에만 객관성의 기준을 충족한다. 그럴 때에만 과학의 기준에 맞게 공간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52) 가설설정과 반증(falsification)을 과학의 기준으로 제시하지만 반증을 위한 경험적 증거는 실재가 아니라 경제학적 편견에 의해 가공된 사이비-경험으로 얻어진 증거들일 뿐이다.53)
경제학적 논리가 공간의 세 가지 특징을 부정하면서 초래되는 왜곡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공간을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것은 인간과 공간을 서로 구분되는 주체와 객체로 이원화하는 것이다. 공간은 언제나 우리들 실천의 바깥에 독립된 대상으로서만 나타나고, 그럼으로써 공간의 생산과 결부된 인간의 의미, 해석, 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 통로가 차단된다. 공간은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를 가능하게 하고, 우리의 행위를 통해 만들어진다. 우리들의 생각 과 실천 궤적의 복잡한 얼개인 것이다. 그래서 공간은 부피와 두께를 가진다. 그런데 경제학적 논리에 의해 경험의 대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두께를 버려야 한다. 두께가 담고 있는 겹쳐짐과 주름을 그대로 유지하고는 경제학이 세워놓은 과학의 기준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이 다. 경제학의 문턱을 넘어서면 그다음 단계는 평면 공간에 자를 대고 선을 그어 이리저리 잘라내는 것이다. 토지를 구획하고, 소유권을 지정하고, 두꺼운 의미망을 무시한 채 공간을 절단하여 폭력적인 변형을 부과한다. 과거의 흔적을 지우고 미래의 해석 가능성을 닫아버린 채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공간에 생채기를 낸다.54)
모든 것을 교환 가능한 단위들로 쪼개어 상품화하는 것은 인간사회의 존재 조건을 허무는 것이다. 즉 근대의 맹목적이고 협소한 합리성만을 진리로 과장하는 ‘현대의 신화’는 하나의 공간적 실천 양식일 수는 있으나 인간의 생존조건에 부합하는 양식은 아닌 것이다. 억지로 절단되어 상품화된다는 것은 곧 공간이 화폐적 가치로 측정되어 거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으로 표시된 화폐적 가치가 가지는 힘은 막강하다. 사람들은 한편으로 공간의 두께를 체험하고 그것을 지키려 노력하지만 화폐로 표현된(왜곡된) 공간의 가치에 쉽게 현혹된다. 공간이 가지는 ‘터무니’가 지워질 때 존재의 의미가 지워지고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지만 공간을 화폐로 환원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도 상품화됨으로써 경제학적 사고만이 합리적이라고 인정하는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공간뿐만 아니라 우리들 자신도 사물화(reification)하고 그럼으로써 상품 물신성(fetishism)이 완성된다. 의미의 망, 정체성은 공간의 두께와 함께 사라지고 앞선 세대와 미래세대를 연결해 주는 장소적 의미도 붕괴한다. 이것은 곧 인간 실존적 조건이 위협받는 것이며, 그 자체로 인간 존재의 부분인 비-인간 존재, 자연생태계와 맺는 (지속 가능한) 관계의 파열을 초래한다.
4. 실재론으로의 재도약
신고전파경제학은 공리주의적 인간관, 선형적 시간관, 평면적 공간 이해에 기초해 인간 삶을 둘러싼 모든 것을 단위로 쪼개어 화폐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 중심에는 그렇게 할 능력이 있는 계산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신고전파경제학은 스스로의 이론적 출발점인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주체마저도 계산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이론적 토대로서의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은 찬양되지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모래성 안에서 인간 또한 계산의 대상으로 상품화되고 마는 것이다. 좋은 삶의 추구와는 상관없이, 고립된 원자인 개인들이 선택한 선호(preferences)의 산술적 합으로 주어진 국민총생산(GDP)이 삶의 질을 측정하는 도구로 대두된다. 하지만 이러한 수량적 지표는 개개 인간을 도구화한다.55) 빈곤과 불평등, 고용불안은 수량적 지표로 환원된 경제성장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적, 실존적,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오직 노동력이라는 상품으로 일면화 되어 도구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학적 논리 앞에 인권과 지속가능성이라는 규범은 무력화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미 오래전에 이러한 관념론적 태도에 대한 비판을 제기했다.
“이 고찰 방식[유물론적-인용자]은 현실적 전제들에서 출발하여, 그 현실적 전제들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다. 이 고찰 방식의 전제들이란 어떤 환상적 격리와 고정 속에 있는 인간들이 아니라, 특정한 조건들 아래의 현실적인, 경험적으로 일목요연한 발전 과정 속에 있는 인간이다. 이러한 활동적 생활과정이 표현되자마자 역사는, 경험론자들―그들 자신 아직 추상적인―의 경우처럼 죽은 사실들의 집적이기를 멈추고, 혹은 관념론자들의 경우처럼 상상된 주체들의 상상된 행동이기를 멈춘다.”56)
신고전파 경제학은 ‘상상된 주체들의 상상된 행동’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관념론이다. 그리고 ‘죽어 있는 사실들의 집적’에 만족한다는 점에서 경험론적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지식 패러다임은 ‘특정한 조건들 아래의 현실적인, 경험적으로 일목요연한 발전 과정 속에 있는 인간’에 기초해야 한다. 경험주의적으로(empiricist) 재단된 가상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한번 실재(reality)와 대면하는 경험적(empirical) 전환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경험적 전환은 실재론적(realist) 전환이다.
실재론적 전환은 인간 존재의 다차원적 특성을 되돌려 주어야 하며, 서로 다른 시간의 동시적 중첩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공간의 두께를 회복해야 한다. 그래서 실재론적 전환은 대상의 복합성을 회복하는 것이어야 한다. 대상의 복합성의 이면은 인간의 대상에 대한 지식이 언제나 불확실하고 완결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지식은 실재에 근거하지만(근거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한계를 가진다. 과학은 완결적이지 않으며 언제나 오류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것은 객관적 지식 추구 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과학은 과학적 지식의 우월성과 완결성을 주장하는, 이미 결정된 독단적 기준에 의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주장들과 해석들이 실재를 향하여 논의되고, (지속적인 갱신에 열린) 잠정적 합의를 도출하는 지침을 제공하는 것으로 다시 정의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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