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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된 공동체, 뒤르케임에게 물어보다 - 김창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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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된 공동체, 뒤르케임에게 물어보다 - 김창훈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2. 4. 25. 09:18

붕괴된 공동체, 뒤르케임에게 물어보다


[인문견문록] 에밀 뒤르케임의 <사회분업론>

김창훈 민족미래연구소 연구실장
2019-08-04



일본이 한국을 향해 경제 전쟁을 시작한 이후 사람들의 반응들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 사이트를 들어가 봤다. 대부분 일본의 부당함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여성혐오사이트에서는 일본 제품 구매를 독려하는 글이 많았다. 신기했다. 여성혐오사이트를 반대하는 남성혐오사이트에 가보았다. 비슷했다. 지향점이 다른 두 개의 사이트에서 동일하게 한국 사회를 증오하고 있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혐오하는 이들,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일본의 극우는 한국을 혐오하고, 한국의 극우도 한국을 혐오한다. 이웃을 혐오하는 것은 자신의 공동체에 대한 최소한의 귀속의식이 있음을 의미한다. 일부 한국인들이 보여주는 한국혐오는 공동체에 대한 어떠한 정서적 귀속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를 접합시키는 내부적 결속력은 빠른 속도로 약화되고 있다. '우리'라는 자각(we-ness)인 공동체성이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공동체의 위기가 닥쳐왔음에도 사람들은 위기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공동체가 무너질 때 이를 극복할 방안은 있는가? 이 문제를 자신의 필생의 과제로 알았던 학자가 있었다. 에밀 뒤르케임이다. 그의 책 <사회분업론>(민문홍 옮김, 아카넷 펴냄)은 공동체의 분열을 극복하려는 학술적 시도였다.

에밀 뒤르케임(Emil Durkheim, 1858~1917)은 프랑스 사회학의 창시자였다. 그가 주목한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 급속한 산업화가 만들어내는 기묘한 현실이었다. 산업은 성장하지만 사람들은 불안해했다. 경제는 확대되었지만 삶의 안정성은 축소되었다. 사람들의 행복감도 계속 떨어졌다. 자살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산업화로 공동체성은 약화되고 개인들은 고립되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알 수가 없었다. 경제는 좋아졌고 소비생활도 충분했다. 자유민주주의도 점진적으로 나아지고 있었다. 당시 대다수 지식인들이 신봉하던 사회계약론에 기초한 자유주의는 마르크스주의자를 제외한다면 모두의 상식이었다.

사회학자 정원은 논문 '뒤르케임과 미완의 기획: 경제사회학과 연대의 공화국'(2017, 한국사회이론학회)에서 당시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경제발전이 자본주의 유토피아를 현실화하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인 계급적 양극화 속에서 사회불안의 동인으로 전환되는 순간, 근대성의 급진적인 기획은 지배계급을 위한 권력의 동학으로 변형되었다. 경제적인 자유주의의 시장 질서는 민주주의의 실질적인 제도화를 가로막고 정치 갈등을 심화시키는 전제적 통치의 도구가 되었다. 약속했던 경제적 부는 실현되었고 시민들의 기본권은 합법화되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절망과 분노로 확산되는 아노미의 사회적 전염은 자유주의 기획의 성과들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현재 한국의 모습과 유사하다. 선진국이 되면 좋아질 거라던 희망, 민주주의가 성취되면 나아질 거라던 희망은 이미 사라졌다. 경제적 부와 자유민주주의의 제도적 정착이 시민들의 행복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명확해졌을 때 어떤 방식으로 사회를 개혁해야만 하는가?

뒤르케임이 주목한 것은 '분업'이었다. 엉뚱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당시에도 분업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었다. 마르크스는 분업이 인간의 소외를 초래한다며 비판했다. 콩트는 분업이 사회구성원의 결속력을 약화시켜 사회혼란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했다. 분업이 본격화된 것은 18세기 말부터였다. 이 시기를 살았던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분업을 핵심 주제로 다뤘다. 뒤르케임이 살았던 19세기 말 분업은 보편적 사회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토크빌은 "분업의 원리가 더 완벽히 적용될수록 기술은 진보하지만 기술자는 퇴보할 것이다"라고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분업에 대한 비판은 지식인의 일반적 생각이었다.

뒤르케임은 전복적으로 생각했다. 뒤르케임의 말이다. "사회분업이 반드시 사회적 분열과 비일관성을 낳지는 않으며, 사회적 기능들은 그것들이 충분히 작용할 때 그 자체로 균형을 이루고 서로 규제하는 경향을 갖게 된다." 뒤르케임은 분업을 어떻게 생각하기에 여타의 사상가들과 다른 관점을 취하는 것일까? "분업이 가져다줄 수 있는 경제적 효과는 분업이 낳는 도덕적 효과와 비교해보면 보잘것없다. 분업의 진정한 기능은 두 사람 이상의 사이에 연대감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한 결과를 어떠한 방식으로 얻었건 간에, 분업은 친구 집단을 만들게 하고 그들 사이의 유대관계를 유지시켜준다."

뒤르케임은 사회적 연대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설명한다. 먼저 전통 사회의 사회 구성 원리이자 구성원의 동질성에 근거한 ‘기계적 연대’가 있다. 기계적 연대는 혈연, 지역, 종교, 인종, 문화의 동질성에 기초했다. 사회가 개인의 삶을 구속했지만 반면 개인은 그 속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산업화가 시작되고 개인의 삶에서 경제생활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커졌다. 개인의 삶은 직업을 중심으로 재배열된다. 동질적이지 않은 구성원들끼리 분업을 통해 상호의존하게 된다. 뒤르케임은 경제적으로 상호의존하며 정서적으로 결속하는 상태를 '유기적 연대'라 불렀다. 유기적 연대가 뒤르케임이 목표로 한 사회의 모습이었다. 분업은 사회를 분열시키지만 또한 경제적 상호의존성을 강화시켜 유기적 연대를 실현시킨다. 이것이 뒤르케임의 생각이었다.

분업이 사회 결속의 기초가 된다는 뒤르케임의 주장에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분업은 공동체 전체로부터 인간을 더욱 고립시키는 요인인데 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은 <사회분업론>을 차근하게 독해하면 사라진다. 뒤르케임은 분업의 부정적 효과를 무시한 것이 아니다. 애매한 표현 때문에 이런 오해를 자초했다. 책 2권 3장 첫 구절이다. "분업이 발달할수록 집단의식이 점점 더 약해지고 모호해진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집단의식의 점진적 불확실성 때문에 분업이 집단 연대의식의 주요한 원천이 되는 것이다." 산업사회가 진전되고 분업이 심화되면서 사회의 기초인 집단의식은 약화된다. 뒤르케임이 그것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뒤르케임이 주장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차원의 결속력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분업을 상수로, 분업에 기초해서 새로운 공동체가 설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분업에 대해 긍정적인 뒤르케임을 순진하다고 비판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분업이 사회적 연대와 도덕적 질서의 원천이라는 뒤르케임의 주장에 대해 제주대 고봉진 교수는 논문 '분업의 병리학'(2018, 한국법철학회)에서 반대 의견을 개진한다. 뒤르케임은 아노미적 분업, 강요된 분업, 병리적 분업 등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분업이 병리적이라고 보았고 정상적인 상태에서의 분업은 오히려 도덕성의 기초라고 주장했다. 고봉진 교수는 이렇게 비판한다. "에밀 뒤르케임이 주로 연구한 분업의 정상적인 형태보다 분업의 비정상적인 형태들에 대한 분석이 더 중요해 보인다. (뒤르케임의 주장과는 달리) 분업이 비정상적인 모습을 지닌 것이 현실이고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뒤르케임이 설명하는 정상적 분업, 도덕성의 원천으로 작동하는 분업이란 없다는 단호한 비판이다. 고봉진은 차라리 아노미적 분업 같은 분업의 비정상적 형태가 오히려 현실 속 분업의 실제 모습이 아닌지 반문하고 있다.

뒤르케임은 각자가 자기 일에 충실하면 좋은 사회가 된다는 의도로 '분업'을 말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뒤르케임은 분업이 사회의 결속력을 높이는 계기라고 말하지만 분업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선결조건도 역시 제시하고 있다. '온전한 공동체'가 분업이 작동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분업이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환경이 중요하다. 구성원이 공동체성을 느끼지 못하는 분절적, 파편화된 사회에서 분업은 오작동한다. 그런 오작동이 아노미적 분업, 강요된 분업으로 나타난다. 분업은 붕괴된 공동체를 복구하는 한방이 아니다. 분업이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공동체가 선행해야 한다는 것이 뒤르케임의 주장이다. 뒤르케임은 밤나무 한 그루에 200종의 곤충이 붙어살 수 있는 것은 곤충들이 분업관계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뒤르케임이 말하는 것은 200종 곤충의 분업 때문에 곤충들이 잘 지내지만 또한 밤나무(공동체. 필자 주) 자체가 건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국의 여러 연구자들은 밤나무의 건강성은 도외시한 채 책의 제목이 <사회분업론>이기에 곤충들의 분업에만 주목했던 것이다. 그리고선 뒤르케임의 분업론을 백안시했다.

뒤르케임은 '분업은 생존을 위한 투쟁의 결과다'라고 말한다. 분업 덕분에 경쟁자들이 서로 죽이지 않고도 공존할 수가 있다는 의미다. 분업은 사람들을 개별화시키지만 또한 사람 간의 접촉을 더욱 활성화시킨다. 개인들이 사회에 통합되기 위해서는 분업 이전에 사회에 대한 귀속감이 있어야 한다. 엉망인 상태에서 분업을 한다고 유기적 연대의 사회로 곧장 전환되는 것이 아니다. 뒤르케임의 말이다. "분업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특정 사회 내부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이 말은 개인들이 서로 물질적으로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 도덕적 연결 관계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분업이 제대로 전개되기 위해서 먼저 도덕적 사회가 존재해야 한다. 다시 뒤르케임의 말이다. "기본적으로 신념과 감정의 공동체에 입각한 사회가 우선적으로 존재해야, 분업이 그 통일성을 보장하는 결속력이 나온다." 뒤르케임을 읽었던 대부분의 한국 연구자들은 이 구절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래서 분업과 유기적 연대가 충실화되는 사회를 정합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신념과 감정에 입각한 사회의 사전적 존재', 이것이 뒤르케임이 동시대를 압도했던 공리주의에 반기를 들었던 이유다. 공리주의자들은 신념과 감정의 건강한 공동체 대신 당사자 간의 계약을 우선시했다. 계약관계는 느슨하고 간헐적이고 빈약하다. 건강한 분업, 유기적 연대는 탄탄한 근거를 갖지 못한다면 지속되기 어렵다. 뒤르케임은 공리주의자들이 사회의 기원을 잘못 이해한다고 비판한다. "이들은(공리주의자들) 태초에 서로 고립되고 독립된 개인들을 가정했으며, 그 결과 개인들은 협력관계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가정했다. (중략) 이 이론은 널리 확산되어 있기는 하지만 인간들이 무(無)에서 사회라는 진정한 창조를 했다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다." 공리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사회는 고립된 개인들 간의 계약관계로 성립하는가? 그렇다면 최초의 계약에서 상대의 신뢰성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계약행위는 계약상대의 건강성을 인지하고 난 후에야 진행된다. 계약으로 사회를 성립시킨다는 것은 선후관계의 도착이다. 뒤르케임이 생각하는 사회의 진짜 핵심은 결속력에 있다. 수많은 사람들을 사회 안에서 살게 하는 것이 '추상적 계약'의 힘인가? 전혀 아니다. 뒤르케임은 이런 의미에서 공리주의자들의 과도한 단순함을 힐난한다.

'개인에 기초한 사회계약'이라는 생각이 현대인에게 얼마나 압도적인지 알기 쉽게 예를 하나 들겠다. 지난해 정치사상연구자 한 분이 페이스북에 민족주의 대신 '헌법애국주의'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헌법에 동의하는 사람들에 기초해 정치공동체를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를 표시했다. 뒤르케임이 비판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개인적 판단과 계약관계에 사회를 정초시키는 것이 오류라는 것이다. 정치공동체는 운명공동체이고 개인의 판단 이전에 정서적 공감이 먼저 마련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전혀 공감이 없는 상태의 두 사람이 결혼계약에 사인하면 온전한 부부가 탄생하는가? 온전한 부부관계를 위해서는 결혼식 이전에 두 사람 사이에 정서적 일치가 선행되어야 한다. 헌법애국주의처럼 공리주의적 사회계약론은 사회를 떠받치는 실제적 힘인 결속력을 간과한다. 개개인의 이기주의에서 출발하는 공리주의는 사회를 튼튼히 정초시킬 수 없다. 뒤르케임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오늘은 당신과 연합하는 게 내게 이익이 되겠소. 하지만 내일이 되면 같은 이유로 당신을 적으로 삼을거요."

뒤르케임은 "사회는 개인들의 합"이라는 생각에 반대하는 사회실재론자였다. 그는 고립된 개인들이 사회계약을 통해 사회를 성립시킨다는 생각을 배척했다. 그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독자적 개성처럼, 자율성을 가진 개인으로부터는 개인밖에 나올 것이 없다"고 말한다. 뒤르케임의 말이다. "집단생활은 개인생활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개인생활이 집단생활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는 공리주의자나 칸트주의자가 말하는 신성불가침적 개인으로부터 연역되지 않는다. 개인들 간의 계약으로 공동체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사회적 결속, 건강한 집합의식으로부터 공동체가 나온다. 이런 공동체에서만 분업은 튼실하게 작동한다.

분업은 상품을 매개로 하는 교환관계가 전부일까? 아니다. 분업은 개인의식을 넘어서는 의식 즉 집합의식의 기초가 된다. 이황직 숙명여대 교수는 논문 '공동체의 도덕적 기초에 대한 사회이론적 고찰: 헤겔의 '인륜성'과 뒤르케임의 '도덕성' 비교'(2004, 한국사회이론학회)에서 분업 이후의 과정을 설명한다. "뒤르케임의 강조점은 개인주의에 의해 도덕성이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는 데 있다. 분화의 산물인 개인주의의 출현은 산업 사회의 새로운 도덕성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고, 뒤르케임은 이를 '도덕적 개인주의'라고 불렀다. (중략) 분업이 단순히 외형만의 교환관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개인 간의 결속을 이끌어낸다는 것이 뒤르케임 분업론의 핵심이다. 이를 해명하기 위해 뒤르케임이 도입한 개념이 바로 '집합적 가치의식(collective consciousness, '집합의식'이 보다 일반적 번역. 필자 주)'이다. 이 개념은 세대 간에도 연속성을 유지하는 공통된 신념과 감정의 총체로 요약할 수 있다."

집합의식에 기초한 유기적 연대를 추동하는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할까? 뒤르케임은 오해를 살 위험성을 알면서도 직업집단을 상정한다. 과거에는 길드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동업조합이다. 동업조합 길드는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는 구성원의 생계만이 아니라 도덕성까지 책임진 조직이었다. 국가와 사회라는 추상적 공동체와 달리 동업조합 길드는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였다. 뒤르케임은 길드의 현재형인 직업집단이 국가와 개인 사이를 매개할 수 있다고 보았다. 경제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직장이 사회적 친교의 장으로 변하고 도덕성을 고양시킬 수 있는 장소로 변모해야 한다. 이후에야 약화된 사회적 결속은 유기적 연대로 전환될 수 있다. 국가와 사회는 추상적이지만 직업집단은 구체적이다. 무규범, 아노미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동업조합의 현대적 버전인 직업집단이 필요하다고 뒤르케임은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축약하자면 이렇다. 산업사회가 도래하면서 종교적, 전통적 가치관은 흔들리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윤리 가치관은 정립되지 못했다. 산업화는 필연적으로 분업을 촉진하는데 분업은 개개인을 파편화한다. 칸트와 공리주의 모두 개인으로부터 윤리를 연역해낸다. 사회는 개인을 만들어내도 개인이 모인다고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주장은 산업사회를 떠받칠 윤리로서는 한참 부족하다. 분업을 사회적 통합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 국가와 개인 간의 중간 매개체로 직업집단을 생각해볼 수 있다. 직업집단이 구성원의 이기주의를 규제하고 도덕성을 고양시키는 조직으로 바뀔 때 분업은 사회의 구심력으로 작동할 것이다. 뒤르케임의 주장은 얼마나 적실성을 확보하고 있을까?

뒤르케임이 제기한 직업집단 대안론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영남대 사회학과 백승대, 안태준 교수는 공동집필한 논문 '뒤르케임 직업집단론의 현실적합성 연구'(2014, 영남대 인문과학연구소)에서 뒤르케임의 해법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한다. 두 연구자는 길드의 역사적 행태에 대한 뒤르케임의 연구가 불충분했다고 지적한다. 건강했던 길드가 특권계급의 이익단체로 전락한 것은 뒤르케임이 말하는 18세기가 아니라 14세기부터라고 이들은 말한다. 이때부터 장인은 도제, 직인이 장인으로 나서는 것을 제도적으로 봉쇄해버리고 자식에게 장인지위를 세습시켰다. 장인들은 도시국가를 조종해 악착같이 기득권을 지켰다. 중세 길드가 자신의 구성원을 위해 자선사업을 벌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모든 것은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논문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뒤르케임의 주장은 역사적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직업집단의 부활 계획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역사적으로 길드의 주요한 기능은 독점권행사와 구성원의 권리보호였다." 길드를 원용해 직업집단의 나아갈 방향을 정초하려던 뒤르케임의 야심찬 계획은 역사적 사실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

뒤르케임의 직업집단 대안론을 내치기 전에 한국의 직업집단문화가 한국인 전체의 도덕성에 상당한 정도로 부(-)의 효과를 끼치고 있다는 연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회과학자 석승혜, 장안식의 공동논문 '사회집단에의 소속이 도덕성에 미치는 영향: 문화성향의 매개효과를 중심으로'(2016,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직업집단의 도덕성효과에 대한 부분이다. "직업집단은 가족집단과 마찬가지로 수직적 집단주의를 강화하지만 수평적 집단주의는 약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단주의 속에서도 수직적 집단주의가 불평등에 대한 감내나 집단을 위한 희생을 강조하는 반면, 수평적 집단주의는 평등과 협력을 강조하며 배려의 도덕적 요소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직업집단이 수평적 집단주의를 약화시켜 나간다는 것은 결국 사회적 약자나 타인에 대한 배려를 낮추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직업집단은 사회구조적 관점에서 군대의 연장이다. 많은 직장인들이 우울증, 직장 내 괴롭힘, 직장 상사의 갑질을 호소한다. 한국인에게 온전한 의미의 공동체는 없다. 공동체에 대한 귀속감을 의미하는 공동체성은 개인의 도덕성을 고양시키고 이기주의와 일탈을 제어한다. 우리는 공동체를 주조해내는데 실패했다. 게다가 군대 조직문화가 만연한 한국의 직장을 생각하면 '직장 민주주의', '직업집단 공동체' 개념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고려 없이 논리적 추론만으로 직업집단대안론을 비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개인들이 집단 속으로 완전히 용해되어버리는 1차집단과 달리 직업집단 내부에서는 개인주의적 가치를 보존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뒤르케임의 직업집단 대안론은 여전히 유의미하다. 한국외대 김태수 교수의 논문 '뒤르케임과 민주주의: 직업집단론을 중심으로'(2008, 한국사회이론학회)의 한 구절이다. "많은 논평자들은 뒤르케임의 직업집단을 보는 시각이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여기서 뒤르케임의 관심은 미래에 재건될 혹은 재건되어야 할 직업집단의 성격에 대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 그는 철저히 규범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푸틴은 서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유주의는 낡았다(liberalism is obsolete)"고 말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사회 구성 원리로 작동한 자유주의의 수명이 다했다는 주장이다. 경제성장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만 자유주의는 자본주의가 가속화시키는 사회적 엔트로피를 제어할 수 있다. 경제가 주춤하면 자유주의는 이내 한계에 부딪힌다. 자유주의는 개인에 기초한 사상으로 건강한 공동체보다 부유한 개인에 초점을 둔 사회 원리다. 갈등 완화를 위한 방편으로 물질적 부를 확장시키는 것이 자유주의 모델이었다. 부에의 추구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해서 자유주의를 보완한 것이 공리주의였다. 경제성장이 둔화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대안은 있을까?

추상적 개인으로부터 사회 원리를 연역한 공리주의적 자유주의는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것을 학문적 차원에서 극복하려던 사람이 뒤르케임이었다. 21세기에 뒤르케임의 <사회분업론>을 다시 펼쳐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뒤르케임과 함께 질문하자. 자유주의는 지금도 유의미한가?



[출처 : https://m.pressian.com/m/pages/articles/251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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