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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학/옛이야기와 동화

옛이야기와 인지학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6. 5. 3. 11:02

옛이야기와 인지학

 

 


옛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린이는 즐거움을 느낄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닫게 되고 점점 성숙해진다. 옛이야기는 서로 다른 여러 차원의 의미를 지니며 다양한 방법으로 어린이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때문에, 옛이야기만큼 어린이의 삶에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는 책은 없을 것이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옛날 어느 산골에 아주머니 한 분이 살았습니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남의 집에 품을 팔아먹고 살았습니다. 아주머니에게는 젖먹이랑 어린 오누이가 있었는데 품 팔러 갈 적에는 집에 두고 갔습니다.

하루는 고개를 몇 개 넘어 잔칫집에서 방아품을 팔았습니다. 품삯으로 떡을 받아 바구니에 이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고개를 하나 넘어가니 호랑이가 떡하니 길을 막고 서 있었습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옛다, 떡 하나!”

아주머니, 아주머니, 또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옛다, 또 하나!”

그렇게 고개를 넘을 때마다 떡을 한 개 주고 두 개 주고 다 줘 버렸습니다. 고개를 하나 넘어가니 호랑이가 또 길을 막고 서 있습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저고리 벗어 주면 안 잡아먹지!”

옛다, 저고리!”

아주머니, 아주머니, 치마 벗어 주면 안 잡아먹지!”

옛다, 치마!”

그렇게 고개를 넘을 때마다 저고리도 주고 치마도 주고 다 줘 버렸습니다. 고개를 하나 넘어가니 호랑이가 또 길을 막고 서 있습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팔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옛다, 팔 하나!”

아주머니, 아주머니, 또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옛다, 또 하나!”

그렇게 팔을 한 개 주고 두 개 주고 다 줘 버렸습니다. 또 고개를 하나 넘어가니 이번에도 호랑이가 길을 막고 서 있습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다리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옛다, 다리 하나!”

아주머니, 아주머니, 또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옛다, 또 하나!”

그렇게 다리를 한 개 주고 두 개 주고 다 줘 버렸습니다. 그러고는 데굴데굴 굴러가는데 또 호랑이가 나타나서는 아주머니를 한 입에 덥석 잡아먹었습니다.

호랑이는 치마를 두르고 저고리를 입고 수건을 쓰고 함지를 이고 아주머니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집 앞에 이르자 호랑이가 문을 마구 두드렸습니다.

얘들아, 얘들아. 엄마 왔다. 문 좀 열어라!”

오누이가 들어보니 걸걸한 게 엄마 목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아냐, 아냐. 우리 엄마 목소리가 아니야.”

찬바람을 쐬고 와서 목이 쉬어 그렇단다.”

그럼 문구멍으로 손 좀 디밀어 보우.”

호랑이가 문구멍으로 손을 들이밀었습니다. 오누이가 만져보니 꺼끌꺼끌한 게 엄마 손이 아니었습니다.

아냐, 아냐. 우리 엄마 손이 아니야.”

떡방아를 찧느라 떡 반죽이 말라붙어 그렇단다. 엄마 추워 죽겠다. 어서 문 열어라!”

오누이가 그런가 하고 문을 열었습니다. 호랑이가 성큼 들어와 젖먹이를 안고 가서 잡아먹었습니다. 오도독 오도독 소리에 오누이가 물었습니다.

엄마, 엄마, 뭘 그리 먹우?”

잔칫집에서 콩 볶은 걸 얻어와 먹지.”

우리도 주우.”

옛다!”

호랑이가 던져준 것은 아기의 손가락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오누이는 아이쿠! 저게 엄마가 아니라 호랑이구나.’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누이는 달아나려 꾀를 내었습니다.

엄마, 엄마. 똥마려워. 뒷간에 갈래.”

똥마려우면 그냥 방에다 누어라.”

방에 구린내가 나면 어쩌려 그러우?”

그럼 그냥 툇마루에다 누어라.”

엉덩이로 깔고 앉으면 어쩌려 그러우?”

그럼 그냥 마당에다 누어라.”

지나다니다 밟으면 어쩌려 그러우?”

그럼 그냥 뒷간에 가서 누어라.”

그래서 오누이는 뒷간에 가는 척 밖으로 나와 우물가 큰 나무에 올라가 숨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누이가 들어오지 않자 호랑이가 밖으로 쫓아 나갔습니다.

이것들이 똥 누러 간다더니 어디로 사라졌나?’

여기저기 찾아봐도 아무 데도 없습니다. 우물 속에 숨었나 하고 들여다보니 오누이가 그 속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호랑이는 저걸 조리루 건질까, 함박이루 건질까.’ 하다가 말했습니다.

얘들아, 얘들아. 이리 나와라. 어서 나와라.”

우물에 대고 외치는 꼴이 우스워서 오누이가 하하하!” “호호호!” 웃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호랑이가 오누이를 찾았습니다.

얘들아, 얘들아. 어떻게 거길 올라갔니?”

손에 발에 참기름을 바르고 올라왔지.”

호랑이는 부엌에 들어가 손에 발에 참기름을 발랐습니다. 그리고 나무에 올라가니 쭈르르르 미끄러져서 올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꼴을 보고 오누이가 깔깔 웃었습니다.

하하하! 호호호! 아유, 우스워라. 도끼로 콕콕 찍으며 올라오면 될 텐데.”

호랑이가 그 말을 듣고 도끼를 가지고와 나무를 콕콕 찍으며 타고 올라갔습니다. 호랑이가 가까이 쫓아오니까 오누이는 더 높이 올라갔습니다. 그래도 자꾸자꾸 쫓아오니까 자꾸자꾸 올라가다 나무 꼭대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조금 뒤에는 잡힐락말락합니다. 오누이가 하늘에다 빌었습니다.

하늘님, 하늘님. 나를 살리려면 새 동아줄을 내려 주시고 나를 죽이려면 썩은 동아줄을 내려 주세요.”

그랬더니 하늘에서 새 동아줄이 내려와서 오누이는 그걸 잡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호랑이도 하늘에다 빌었습니다.

하늘님, 하늘님. 나를 살리려면 새 동아줄을 내려 주시고 나를 죽이려면 썩은 동아줄을 내려 주시오.”

그러니까 하늘에서 썩은 동아줄이 내려왔습니다. 호랑이는 그걸 잡고 하늘로 올라가다, 올라가다, 동아줄이 뚝 끊어져서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떨어진 곳에 수수밭이 있었는데 으아악! ! 수숫대 그루터기에 쿡쿡 찔려 죽었습니다. 그래서 수숫대가 지금도 빨갛습니다.

하늘로 올라간 오누이는 해와 달이 되었습니다. 밤길이 무서운 누이가 해가 되었고 오빠는 달이 되었습니다.

 

옛이야기를 싫어하는 아이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아이들은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특히 옛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수많은 상징과 비유가 마법처럼 숨어 있는 옛이야기에 어떤 매력이 있길래 한 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저 장난꾸러기들까지 숨죽인 채 귀를 기울이는 것일까요?

발도르프 학교의 저학년 아이들은 날마다 주요수업이 끝날 즈음 옛이야기 선물을 하나씩 받습니다. 어쩌면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 학교에 온 것처럼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기쁜 마음으로 이야기를 즐깁니다. 우리나라의 전래동화일 때도 있고 독일의 그림형제 이야기일 때도 있으며 세계 각국의 민담일 때도 있지만 아이들은 가리지 않습니다.

현대인의 상식으로 봤을 때 옛이야기에는 너무나 잔인하고 끔찍한 이야기, 허황되고 엉뚱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하지만 교훈을 좋아하는 어른이 볼 때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이야기를 아이들은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아이들은 아직 그림으로 사고하고 상상하기 때문에 끔찍해 보이는 내용도 상징처럼 받아들입니다. 파랑, 빨강, 노랑, 검정 등 색깔이나 향긋한 꽃향기, 매운 연기, 고린내 등의 냄새처럼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한바탕 꿈을 꾸는 것과 같습니다. 때로 악몽을 꾸기도 하지만 무서운 악몽 속에도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법이어서 옛이야기를 듣고 난 아이들은 기분 좋게 포만감을 표시합니다. 대체 거기에 어떤 영양분이 있길래 그럴까요?

옛이야기는 단순하고 재미있는 형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의 인물들이 우리의 삶과 영혼의 발전에서 현실이 되고 또 어떤 역할을 합니다. 진실한 이야기는 원형(archetypes)에 의지하는데 원형은 정신세계로부터 영감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초감각적인 세계에 다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옛이야기는 그렇게 아이들을 강하게 만들어 주고, 조화와 생명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아쉽게도 현대에 와서 옛이야기는 그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그림책이 널리 퍼지면서 이야기는 짧게 간추려졌고 삽화가 제시됨으로써 상상력의 범위가 축소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문제는 옛이야기에 담겨 있는 악과 잔혹함의 세밀한 상징과 은유가 대부분 제거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따라서 옛이야기일수록 그 원형을 찾아내는 게 중요합니다. 어른의 입장에서 재단된 이야기가 아니라 옛이야기 고유의 생명력을 잃지 않은 이야기, <해와 달이 된 오누이>도 수많은 판본을 들춰본 뒤에야 그 원형을 되짚을 수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옛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 이야기가 생겨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거미인간 아난시가 하느님에게 이야기를 사고 싶어하는데, 하느님인 니야메는 이야기 값으로 네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아난시는 아내인 아소의 지혜를 빌려 문제를 풀어갑니다. 사람을 한입에 꿀꺽 삼키는 비단뱀 오니니, 무시무시한 이빨이 있는 표범 오세보, 몰려다니며 불처럼 왕침을 쏘는 말벌 믐보로, 사람 눈에 안 보이는 요정 므모아티아를 잡아 하느님 앞에 데려가서 약속을 지킵니다. 드디어 아난시는 이야기가 든 황금상자를 갖고 땅으로 돌아오고, 아난시가 상자를 열자 모든 이야기들이 세상 구석구석까지 흩어졌습니다.


(아난시는 맨 처음 야자나무 가지와 칡넝쿨을 잘라서 강가에 사는 비단뱀 오니니를 잡습니다. 두 번째로 정글에 가서 표범 오세보와 묶기 놀이를 해서 표범을 잡습니다. 세 번째로 바나나 나무 이파리와 물을 채운 호리병을 가지고 말벌 믐보로에게로 가서, 바나나 이파리를 우산처럼 쓰고 호리병의 물을 믐보로 집에 붓고는 비가 오니까 빨리 호리병 안으로 들어오라고 소리칩니다. 믐보로가 호리병 안으로 들어가자 이내 병 뚜껑을 닫아버립니다. 마지막으로 작은 나무 인형을 만들어서 인형에 끈적거리는 고무진을 바르고, 작은 대접에는 맛있는 얌 감자를 두어서 요정이 즐겨 춤을 추는 장소에 둡니다. 춤을 추다 배가 고파진 요정은 얌 감자를 먹고 나서 인형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지만, 인형이 대답을 안 하자 화가 난 요정은 인형을 때려주다가 손과 발이 인형의 고무진에 붙어서 결국 아난시에게 잡힙니다.)


본래 이야기는 하늘, 즉 정신세계에 있던 것입니다. 정신세계의 것을 지상의 존재에게 불어넣고 정신세계와 지상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것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옛이야기를 듣는 시간은 신성하고 경외로운 시간입니다. 거미인간 아난시와 비단뱀 오니니, 표범 오세보, 말벌 믐보로, 요정 므모아티아는 정신과학적으로도 모두 상징하는 바가 큽니다. 비단뱀 오니니는 땅을 기어다니며 길고 커다란 몸으로 살아 있는 것들을 한입에 꿀꺽 삼킬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물질로 돌려보낼 수 있는 뱀은 유혹과 지혜의 상징이자, 죽음과 생명을 동시에 상징하며, 땅에 가장 가까운 존재입니다. 인간 구성체 중에서 물질체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표범 오세보는 범접할 수 없는 권위이자 힘입니다. 동물적 속성을 극복하고 영적인 특성을 가져올 수 있는 힘을 뜻합니다. 또한 날카로운 이빨은 콱 무는 힘을 나타내는데 인간에게는 생명체가 해방되었을 때의 모습입니다. 아이들은 영구치가 나고 콱 무는 힘이 생긴 뒤에야 비로소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말벌 믐보로는 정확하고 날카롭고 번뜩이는 지혜 또는 영감입니다. 비단뱀 오니니나 표범 오세보와 달리 지상에서 좀 더 떨어져 있는 추상적 사고의 힘을 보여줍니다. 벌이라는 특성 자체가 공동체 사회를 형성하고 벌집을 함께 짓는 모습을 지닙니다. 불처럼 쏘는 말벌은 사춘기 시기에 탄생하는 혼체의 비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끝으로 요정 므모아티아는 춤을 추는 존재입니다. 춤이란 자유를 상징합니다. 자연, 사회 등 모든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가진 므모아티아는 지상 세계 이면의 또 다른 존재, 그러니까 자아를 넘어서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미인간 아난시는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요? 아난시는 이 모든 것을 제압할 수 있는 자아를 뜻합니다.

옛이야기는 마법과 같은 상징과 비유가 풍부하기 때문에 고정된 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롭게 이야기를 해석할 수 있는 수많은 시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침 우리는 인지학의 시선으로 옛이야기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질체와 생명체, 혼체와 자아, 그리고 정신이라는 인간의 구성체가 옛이야기 속에 어떻게 담겨 있는지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오누이와 젖먹이를 키우며 가난하게 살아갑니다. 아이들의 아버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다른 판본의 이야기 중에는 간접적으로 아버지가 언급되기도 합니다. 집에 들어온 호랑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똥을 누러 나가고 싶다고 오누이가 말할 때, 가령 이런 식입니다. “방에다 똥을 누었다가 아버지가 아시면 어쩌우.” 여기서 아버지는 세상의 질서와 가치로써 정신적인 존재입니다.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정신적인 힘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음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가정은 찢어지게 가난하고 늘 위태롭기 짝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이런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희생하며 반복적인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곧 오누이를 살아 있게 하는 생명체인 것입니다. 생명체의 헌신에 의해 오누이와 젖먹이는 안전한 집에 머물러 있습니다. 여기서 집은 몸, 즉 물질체를 뜻합니다.

인간의 발달단계에서 생명체는 7세경에 탄생하여 자유로워집니다. 몸 안의 온갖 기관을 발달시키는 임무를 마무리할 때 마지막은 몸에서 가장 단단한 부분인 치아입니다. 유치가 빠지고 영구치가 나오도록 하는 일을 끝내고 나면 생명체는 몸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자기의 힘을 영혼의 활동에 쏟아붓습니다. 이제 혼체가 생명체의 도움을 받아 내적인 성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체는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줍니다. 하지만 생명체의 생명력이 너무나 강력하면 혼체는 그것에 억눌려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 속 어머니의 죽음과 호랑이의 방문을 그러한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호랑이로 상징되는 혼체는 욕구, 감정, 욕정, 충동 등을 가져오는 힘으로 어린 자아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존재입니다.

조금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자기 것을 내어놓아야 할 때 무엇부터 줄 수 있을까요? 아마 가지고 있는 재산부터일 것입니다. 아깝긴 하지만 돈이나 소유물 같이 물질적인 것은 비교적 쉽게 내어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또 무언가를 내어줄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피붙이나 수족일 것입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욥에게도 그러한 순서로 재앙이 닥칩니다. 처음에는 재산을 잃고 다음에는 팔다리와 같은 피붙이를 잃고 끝으로 건강을 잃습니다. 이것은 죽음의 과정과도 같습니다. 마지막이 자기 목숨입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도 어머니는 제일 먼저 떡을 내어주고 다음으로 저고리와 치마를 내어주며, 팔과 다리를 모두 내어준 뒤 목숨을 잃게 됩니다. 희생에도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어머니를 잡아먹은 호랑이는 집에 들어가 젖먹이마저 잡아먹습니다. 젖먹이인 아기는 저 정신세계에서 이 지상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순수한 존재입니다. 그만큼 무력하고 취약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오누이는 호랑이의 걸걸한 목소리와 꺼끌꺼끌한 손을 접하고도 순진하게 믿었다가 젖먹이 동생이 잡아먹힌 뒤에야 정신을 차립니다. 오누이를 자아라 한다면 호랑이는 혼체입니다. (영혼의 핵심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심혼의 두 측면인 오성혼과 감성혼을 오빠와 여동생이 나누어 갖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혼체는 앞서 말한 것처럼 욕구, 욕정, 감정, 충동 등의 운반자입니다. 어떻게 보면 야만적인 짐승과 같은 것입니다. 혼체에 사로잡힌 인간은 동물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동물보다 못한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혼체에 휩쓸릴수록 사람은 충동적이고 감정의 변덕에 춤을 춥니다. 자아는 이러한 혼체를 제압해야 합니다.

자아를 온전히 세움으로써 인간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아는 항상 혼체의 도전을 받거나 유혹에 시달립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죄악이 자아에 의해 제어되지 못한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혜롭게 살피지 못하면 미혹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오누이가 호랑이를 이겨낼 수 있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지혜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섣부르게 꾀를 내었다가는 곤경에 빠질 수 있습니다. 자아는 자기중심을 잘 세워야 하지만, 동시에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무 위로 올라온 호랑이를 피하기 위해 오누이가 한 최후의 일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완전히 내려놓고 절대적인 존재에게 자신을 맡기는 것, 자기중심주의에 빠져 있던 존재가 경외심을 회복하고 마음을 모으는 행위는 자아의 질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오누이는 믿음이라는 힘으로 동아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것입니다.

하늘에 가서 해와 달이 되었다는 것도 생각할 거리를 많이 남깁니다. 왜 하필 해와 달일까요? 그전까지는 해와 달이 없었다는 것일까요? 게다가 통속적인 상식과 달리 오빠가 달이 되고 누이가 해가 되었습니다. 본래는 오빠가 해가 되었지만 누이가 밤이 무섭다고 하도 투정을 부려 오빠가 바꿔주었다는 판본도 있습니다. 그 판본에 따르면, 화가 난 오빠가 누이의 얼굴에 모래를 뿌려서 한낮에 해를 보면 눈에 모래를 뿌린 듯이 따가운 것이라고 합니다.

이야기의 내용을 기질적인 특성과도 연결시켜 볼 수 있습니다. 고개를 건너며 자기 것을 하나씩 호랑이에게 내어주어야 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는 우울질의 특성에 가깝습니다. 반대로 호랑이의 입장에서 본다면 담즙질적입니다. 호랑이는 자기가 원하는 걸 반드시 이뤄내려 하고 남들 위에 군림하려 합니다. 재치 있게 호랑이로부터 벗어나는 오누이의 모습에서는 다혈질을 엿볼 수 있습니다. 꾀를 내어 어리석은 호랑이를 속이고 골탕을 먹이는 모습은 전형적인 다혈질입니다. 동시에 젖먹이가 잡아먹히기 전까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오누이는 점액질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점액질은 의혹이 생겨나도 그대로 믿으려 하고 먹는 것에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이 고유하게 갖게 되는 기질이란 자유로운 성장에 장애가 되는 동시에 발달의 도구가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기질의 포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기질 때문에 오해가 생기고 갈등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그러한 어려움, 힘듦을 겪고 난 뒤에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더욱 뚜렷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 있는 기질을 계발할 수 있게 됩니다. 나아가 옛이야기는 감각 발달에서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의 문제 행동에도 치유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인류의 비학적인 지혜가 듬뿍 담긴 옛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들은 세상이 무엇인지,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그리고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하기 위해 지상에 내려왔는지 깊은 의식 속에서 더듬어 나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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