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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개인과 국가 - 현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 유기체의 삼지성 (7) 본문

인지학/사회삼원론

개인과 국가 - 현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 유기체의 삼지성 (7)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8. 3. 1. 19:10

새로운 국가

 

민주적인 국가사회가 마침내 정신, 문화, 교육 영역과 경제 영역을 독립시키고, 이 영역들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자율성을 인정하면 이에 따라 국가구조도 변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가 현재 주장하고 있는 강대한 감독 권한은 다른 영역의 자율을 위해 아주 작게 줄어들 것이다. 축소된 국가가 새로이 맡게 될 과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1. 기본인권 보장을 위한 법 제정 : 이때는 국가가 일방적으로 부여받았던 의무항목을 없앤다. 예를 들어, 국가가 때에 따라 학교를 세울 수는 있으나 국가의 의무는 아니다. 국가가 한 번 세운 헌법을 당시의 국민이 인정했다고 해서, 시대 상황이 바뀌었는데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려 한다든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바로 헌법 위반자로 몰아붙이는 것은 기본인권 가운데 의사 표현권의 침해가 되므로 허용할 수 없다. 국가가 국민의 기본인권을 지켜 주는 것이 곧 정신, 문화, 교육 영역의 보호가 된다.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신, 문화, 교육 영역의 자유를 촉진 및 장려하는 것이 축소된 국가가 새롭게 맡을 중요한 과제가 된다. 사업가들의 노동권 침해를 막고 자연 환경을 해치는 사업체를 단속하는 법을 제정하는 것 등이 경제 영역에 대한 국가의 태도가 된다.

 

2. 국가는 교통이나 치안 또는 국방 같은 영역의 법과 규칙을 정할 때 실제로 벌어지는 일을 바탕으로 삼는다. 외국과의 교류는 정신, 문화, 교육 영역과 경제 영역이 이루어 나가고, 국가는 자주독립의 의지만 표방하면 된다. 법률 제정은 보편타당성을 가져야 할 것이다. 여러 사항을 살펴볼 때 국가의 중심 영역은 평등원칙으로, 다수결의 민주주의가 적용될 수 있는 영역에만 한정한다.

 

3. 정신, 문화, 교육 영역 그리고 경제 영역 사이의 협약을 법으로 정하는 세부적 역할로서 국가 영역을 법 제정, 정치, 치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정치 영역에는 국민투표나 국민소환 같은 직접민주정치 제도를 도입할 수 있다. 이렇게 사회구조의 삼지성이 이루어지면 국가 소속 기관들도 대폭 개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회 유기체의 삼지성에 대한 반론

 

사회 유기체의 삼지성은 정말 실현할 수 있는 것일까?’ 하고 의문을 던질 수 있다.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의 실천은 기본인권 존중이 인간사회의 밑바탕이라고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라야 가능하다. 자유, 평등, 박애는 인간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가치지만 이 가치들이 각자의 영역에 맞게 적용되지 않으면 오히려 서로를 배척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정신, 문화, 교육 영역에 평등원칙을 고집하면 어떻게 될까? 능력과 적성과 취향은 사람마다 다른데 똑같이 배우고 같은 종교를 갖고 같은 취미를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유를 정치, 법률, 국가 영역에 적용하면 사회는 온통 권력투쟁으로 난장판이 될 것이고, 경제 영역에 적용하면 권력 있고 힘센 자가 모든 걸 차지하는 불공평이 활개를 칠 것이다. 공산주의는 이런 불공평을 없앤다고 개인의 자유를 아예 빼앗아 버렸지만 결과는 혁명이었다(*1989년 혁명 폴란드 인민공화국이 붕괴되면서 공산정권의 연이은 붕괴를 가져온 혁명적 사건들이 발생함).

 

사회 유기체의 삼지성은 너무 복잡하지 않은가?’라는 반론도 들고 나올 수 있다. 현대 생활의 복잡다단함은 접어두고라도 모든 이론이란 게 직접 실천해 보면 의외로 단순하다는 것을 먼저 말하고 싶다. 실생활에서도 겉보기에는 복잡해 보여도 원리를 한 번 이해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흔히 겪는다. 어떤 물건이 싼지 비싼지 따지기 위해 온갖 이론을 다 동원해서 골머리를 앓는 경제 전문가들에 비하면 가정주부들은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얼마나 빨리 결정하는가?

 

직접 당사자들에게 이런 요구는 너무 무리한 것이 아닐까?’ 하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체념 섞인 반문은 오랫동안 몇몇 정치가나 실업가들이 국가의 이름으로 국민들이 스스로 경험하고 삶을 스스로 책임지며 영위해 갈 수 있는 기회를 막고 오로지 소비자로, 피지배자로 전락시킨 결과이다. 개인과 사회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 놓여 있다. 개인 없는 사회, 사회 없는 개인은 생각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런 경제협력 구조는 현 경제 상황을 올바르게 보여줄 뿐 아니라 이웃의 관심과 어려움까지 환기시켜 준다. 그리고 자신의 좁은 이기적 시야를 틔워주는 것이다.

 

이 안을 실천하기 전에 모든 사람이 선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선하고 진실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고 노력하는 사람을 전제로 삼을 뿐이다. 인간의 인격향상 가능성을 처음부터 부인하는 사람은 따뜻하고 진실한 사회건설을 희망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인격향상을 아예 포기한 사람이거나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내려다보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한 국가의 이름 없는 일원에서 인격을 갖춘 자율적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이 꼭 있어야 할 인류 진보라고 믿는 사람도 사회구조의 삼지성 안의 실천으로 현 사회의 모든 상황이 하루아침에 완전히 달라지리라는 환상은 갖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의지가 개인들에게 주어져 있는 한, 공동체사회를 해치는 요소가 싹트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구조가 셋으로 독립된 사회에서는 반사회적 힘이 커져서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기 전에, 앞서 말한 기구나 단체에서 그런 반사회적 힘에 상응할 만한 힘이 일어나 사회를 다시 조화롭게 이끈다.


여기에서 다루는 마지막 반론은 무정부 상태에 대한 두려움이다. ‘만일 국가가 지금까지 맡아왔던 과제 가운데 많은 부분을 국민 스스로 책임지고 해결하게 한다면 무정부주의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지 않겠는가?’ 하고 물을 수도 있다. 이런 반론은 1989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 당시 대다수 러시아 국민들 가슴에는 앞으로 설계할 사회에 대한 확신보다 지난 체제에 대한 거부와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증오는 곧 지배세력의 추방을 낳았는데 추방이 이루어지자 한동안 공백상태가 들어섰고, 이 공백에 꼭 진보적인 사상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 국가 스스로 변화를 허용하는 경우에는 상황이 더욱 쉬워진다. 가령 공립학교를 반드시 폐지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치와 국가 권한으로부터 해방의 차원에서) 학교 단체는 자유롭게 설립될 수 있어야 한다. 학교 단체들이 더 이상 대안학교로 취급되어서는 안 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의 대표자로서 국가는 어쩔 수 없는 의무적 상황에서만 관여할 수 있고, 개별적인 자발성이 생겨나기 힘든 곳에만 관여할 수 있다. 국가가 설립한 학교가 실제로 대안학교가 되는 것이다. 국가의 재정비에 관한 이러한 법적 원칙은 법학에서 ‘Subsi-diaritäts-prinzip(*가능한 가장 작은 수준 또는 행정 단위로 책임을 이동시키는 원칙)’이라고 하며, 일부 지역에서는 상당히 잘 시행되고 있다.

 

예컨대, 개인적으로 일을 할 수 없거나 장애가 있음을 증명하는 경우에만 국가 보조금이 지급될 수 있다고 해보자. 이것이 개인들의 요구를 막는 데에 사용될 뿐만 아니라 모든 방면에서 그렇게 진행된다면, 오히려 삼지적 의미에서 국가가 퇴진해야 하는 곳들에서부터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상당히 많은 변화가 생길 것이다. 새로운 것과 낡은 것 사이에는 공통의 경계선이 있기 때문에 무언가가 유입되기 쉽지 않다. 낡은 것이 퇴진해야 새로운 공간이 생성된다. 그러나 낡은 국가가 스스로를 지나치게 폐쇄해 버리면 스스로 붕괴될 수 있다. 이렇듯 새로운 것은 억압을 통해 내일의 혁명적 잠재력을 창조한다. 내적 책임에 따른 자발성에 의해, 억압의 법칙은 낡은 국가 사상을 개혁해 사회 유기체의 삼지성으로 나아가는 데에 적절한 도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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