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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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저귀 떼기와 한글 떼기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아이가 태어난 가정에 방문했을 때 흔히 볼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한글 벽보입니다. 한글 자음과 모음뿐 아니라 알파벳과 숫자가 큰 글씨로 쓰여진 포스터가 아이방에 있는 풍경은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 것처럼 흔합니다. 그런데 이런 풍습(?)은 어린아이에게 스마트폰을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비실제적(unpractical)입니다. 그렇게 포스터를 붙여놓는다고 해서 아이가 글자에 흥미를 가질리도 만무하지만, 문자를 일찍 가르쳐주는 것이 아이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쟁사회에서 글자를 빨리 가르쳐줄수록 아이에게 좋을 것이라는 생각은 아이의 발달에 조기 문자교육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몰라서 벌어지는 착각입니다. 그것은 스마트폰의 해악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 신생아 부모의 경우 소아과에 정기검진을 받으러 가면 "만 2세가 될 때까지 절대 스마트폰이나 전자기기를 보여주지 말라"는 의사의 당부를 들을 것입니다. 사실 만 2세 이후에도 전자기기에 노출되지 않는 것이 아이의 정서발달이나 인지발달에 도움이 됩니다.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주지 않고는 육아를 하기가 어렵다고 호소하는 부모도 있지만 엄밀히 말해 그런 표현은 아이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부모의 입장에서 하는 말입니다.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남들도 하니까, 잠시라도 쉴 수 있으니까, 조용해지니까'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주고 있다면, 그것이 아이에게 정말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알고 나면 다른 방법을 찾으시게 될 겁니다.
스마트폰과 같은 전자기기에 일찍부터 노출된 아이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은 산만함입니다. 이것은 집중력의 약화와 관련되는데, 무언가를 능동적으로 관찰하고 자기 힘으로 경험을 하는 게 아니라 수동적으로 수많은 정보와 자극을 수용하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즉각적인 현상에만 반응할 뿐 현실에서는 무감각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언어를 배우고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에 중요한 것은 아이가 스스로 자기통제력을 키우는 일입니다. 어떤 아이든 아주 어릴 적부터 자기 스스로 뭔가를 해내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대상물을 만지고, 일어나서 걷고, 자기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모든 활동에서 아이는 자기 힘으로 해내는 기쁨을 느낍니다. 자기를 "나"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내가 할 거야"라는 말을 자주 하죠. 그런데 육아에서 우리는 핵심적인 그 사실을 놓치곤 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아이를 사랑하고 잘 키우고자 한다면 아이의 의지와 욕구에 초점을 맞추어 관찰해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스마트폰의 동영상을 보는 게 즐거울까요, 몸으로 노는 게 즐거울까요? 아이의 발달에 스마트폰이나 TV 시청이 도움될까요, 소근육과 대근육을 써가며 판타지를 가지고 노는 게 도움될까요? 아이가 부모와 함께 있기를 원할까요, 늦은 밤까지 보육시설에 있기를 원할까요? 사회적으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육아란 본질적으로 부모가 그전처럼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도 없고, 개인 시간을 갖기도 어려워졌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아쉬운 일이지만 부모로서의 삶은 어쩔 수 없이 우선순위가 바뀌게 됩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가 우선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고는 아이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아이는 어떤 발달단계에 있고,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답을 내지 않는 이상, 부모로서 우리는 흔들리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전체적으로 왜곡되어 있고 상당히 폭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5년간 사립유치원 및 어린이집은 감소 추세지만 영어유치원(실제로는 유아 영어학원)은 70% 가량 성장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에도 안 들어간 아이에게 영어를 학습시키는 게 과연 필요한 일일까요?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만나는 교과서도 아이 입장에서 제작된 게 아니라 어른들의 비실제적인 관념을 중심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아이의 발달을 이해하고, 그 시기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주는 방식이 아닌 것이죠. 아이들은 자기 발달에 맞지도 않고 흥미롭지도 않은 교과서 내용을 억지로 배워야 합니다. 결국 아이들은 공부란 재미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졌을까, 돌아보면 우리는 배움의 주체에 대한 관심보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들, 즉 기성 문화를 너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지 않았나 하는 반성이 듭니다. 정말로 그렇게 하는 게 맞나, 잘못된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건 아닌가, 아이를 위한다면서 우리는 아이를 괴롭히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질문에 이어져야 할 것은 과학적인 검증입니다.
철저하게 아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이에게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울 수 있습니다. 주위에 사랑의 온기가 가득할 때 비로소 아이는 해맑게 웃고 탐색하고 세상을 향해 자신을 내어줄 것입니다. 만약 따뜻한 관심과 돌봄이 없다면 아이는 두려워 울고 위축되겠지요. 여기에 아이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함께해야 합니다. 아이는 아직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합니다. 주위에서 제공되는 것들을 무방비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죠. 따라서 양육자는 아이가 진정으로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들을, 아이를 중심으로 아이의 발달에 맞게 제공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수수께끼처럼 느껴진다 해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에게는 커가면서 경험하는 일 하나 하나가 모두 새롭고 의미 있기 때문입니다. 발도르프 교육이 빛을 발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교육예술, 이것이 발도르프 교육의 모토지만 사실 모든 교육이 추구해야 하는 가치일 것입니다.
기저귀 문제와 한글(문자교육) 문제는 어린아이의 삶에서 부모가 의식적으로 도와줘야 할 중요한 두 사항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저귀를 뗀다, 한글을 뗀다, 라고 표현하는데 "떼다"라는 말에는 '걸음을 떼다'나 '입을 떼다'처럼 의지적 행위의 의미도 있지만 대체로 끝내거나 거부하고 거절하는 등의 부정적 뉘앙스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빨리 기저귀를 떼고 한글을 떼버리면 좋겠다는 마음이 그 표현 속에 담겨 있지요. 하지만 기저귀를 졸업하는 과정은 어린아이에게 중대한 삶의 변화입니다. 그전까지 아무 의식 없이 쉬를 하고 응가를 하던 아이가 자신의 그 행위를 인식하는 일부터 제법 큰일입니다. 그리고 방광과 괄약근을 조절하여 참았다가 누는 일은 만 3세가 가까워야 가능한 신체 능력입니다. 아이마다 발달에 속도 차이가 있으므로 일괄적으로 강요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때이른 나이에 훈련으로 그 능력을 키운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너무나 가혹한 과제가 됩니다. 요근래 배변에 어려움이 생겨 변비로 고생하는 아이가 늘었다는 사실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른이나 손위 누군가를 모방하면서 변기에 일을 보기 시작했다고 해도, 기저귀를 벗는 것은 아이에게 아기로서의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부모의 따뜻한 기다림과 지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했다는 자기 의지 또는 자기통제력의 확인입니다. 때가 되면 아이는 자기 힘으로 배변을 조절하고, 밤에 잠을 잘 때도 기저귀를 차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이의 삶은 아이 자신의 것이지, 부모의 것이 아닌 까닭에 조급하게 기저귀 떼기를 강요하거나 다른 아이와 비교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조금 늦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부모의 성급한 마음이 혹여나 아이의 자기주도성을 훼손할 수 있습니다. 한글 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비문자 시기의 풍부한 상상력과 자유로움을 포기하고 문자 시기로 진입하는 일에 대해 우리는 더욱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교육과정에서 왜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한글을 배우게 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이가 겪을 수 있는(겪어야 하는) 축복과 같은 시간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이갈이가 시작되면 아이에게는 배움을 향한 열망이 자라납니다. 아이에게 신체적으로나 영혼적으로 질적 변화가 찾아오기 때문인데, 신체적으로는 부모에게 받은 몸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7년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더욱 튼튼하고 자기다워집니다. 점점 아이의 개별성이 두드러지기 시작하지요. 몸을 만드는 데 거의 100%가 쓰였던 생명력은 이제 절반 정도를 내적 사고력으로 변형시킵니다. 이갈이 후에 학교에 온 아이들은 기억력이 강하고 상을 떠올리는 힘 역시 강합니다. 이 아이들을 위해 교사는 이야기와 그림, 그리고 움직임을 활용하여 문자를 지도해야 합니다. 발도르프 학교에서는 자음마다 각각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연극적인 활동을 하며 교사가 그린 칠판 그림에서 문자를 발견합니다. 문자라고 하는 것은 결코 자연에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사람들 간의 약속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낯선 기호에 불과합니다. 한글 역시 음양오행 및 천지인의 원리로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지성의 결과로 만들어진 사회적 협약이므로 아이들에게 제시할 때는 철저히 그림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굽이치는 강줄기에서 "ㄱ"을 발견하고, 나폴나폴 날아가는 나비에서 "ㄴ"을 발견하는 식의 예술적 접근일 때 아이들은 기쁘고 자연스럽게 문자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읽기를 먼저 배우지 않고 쓰기를 먼저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방식입니다. 아이들은 온몸으로 쓰기를 연습하고 배운 뒤에 눈으로만 하는 읽기를 배웁니다. 이갈이 후 학교에 와서 친구들과 함께 이런 방식의 수업을 하도록 돕기 위해서는 딱지 떼듯이 한글을 떼어주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소위 '발도르프식 한글놀이'로 한글을 떼주는 것도 올바른 접근이 아닙니다. 이가 나왔다고, 아이가 원한다고 한글을 가르쳐주기보다, 밥을 지어도 뜸을 들인 다음 밥을 푸는 것처럼 적절한 때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아이가 한글을 모르고 학교에 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다른 아이들이 전부 한글을 떼서 왔다고 해도 부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안타까운 일이지요. 루돌프 슈타이너는 가급적 문자를 늦게 가르칠수록 아이의 지적 발달에 좋다고 조언합니다. 10세에서 12세 정도에 문자를 배운 아이들이 학문적으로나 지적으로 훨씬 더 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비문자 시기의 생명력이 축적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 시대에 그렇게까지 하기는 어려움이 큽니다.
아이가 무언가를 배우고 변화의 시기를 맞이할 때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아이의 주도성을 존중하는 일의 중요성은 기저귀와 한글 문제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 교육활동의 많은 영역에서는, 아이들을 살리는 게 아니라 비싼 돈을 들여 아이들을 괴롭히고 상처 주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특히 우리 사회는 여전히 입시교육이 사라지지 않고 아이들을 지옥 같은 경쟁의 삶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렇게 입시지옥을 통과한다 해도 취업경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어서 숱한 경쟁과 자기계발의 늪에 빠져 진정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건강한 사회에 대해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우리 아이를 우위에 세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많았던 건 아닌지 돌아봅니다.
우리 사회가 더 이상 불행한 삶의 방식을 아이들에게 물려주지 않았으면 합니다. 영어유치원에 아이를 보내기보다 발도르프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는 부모님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마찬가지로 발도르프 학교에도 더 큰 관심이 생겨났으면 합니다. '우리 아이만 늦어지는 게 아닐까? 뭘 더 해주지 않으면 나중에 아이에게 미안해지는 게 아닐까?' 이런 불안감을 이용하는 학습시장의 조언자들에게 마이크를 주기보다 '우리 아이는 지금 어떤 발달단계에 와 있고 무엇을 필요로 하는 걸까?'라는 질문을 꾸준히 던지고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셨으면 합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고유한 자아가 있고 좋은 어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있으니 그것을 믿어주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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