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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로서 성장하는 회복적 훈육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3. 3. 19. 17:19

부모로서 성장하는 회복적 훈육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1974년 캐나다 엘마이라 사건에서 시작된 회복적 정의 운동은 오늘날 사법 분야를 넘어 학교와 회사, 도시 운영 등에까지 확산되고 있다. 회복적 정의는 단지 갈등이나 폭력에 대한 해결책에 그치지 않고, 인간적인 관계 형성과 창조적 조직 문화를 만드는 데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회복적 정의 운동을 관통하는 철학은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회복적 정의는 전통적인 응보적 형사사법이 갖고 있던 가해자-처벌 중심주의에 대한 초점을 전복시킨다. ‘누가 잘못했고 어떤 잘못을 했으며 어떻게 처벌할지에 대한 질문은 누가 피해를 입었고 어떤 피해를 입었으며 어떻게 회복할지에 대한 질문으로 바뀐다. 처벌 중심에서 회복 중심으로 바뀌는 것이다.

 

회복적 정의의 질문들은 우리를 더욱 깨어 있게 만든다. 아이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는 부모의 모습을 흔히 본다. “아빠/엄마가 그거 만지지 말랬지? 왜 자꾸 만져서 망가뜨리는 거야? 정말 말 안 들을래? 아빠/엄마 열 받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야, ? 혼 좀 나야 정신 차리겠어?” 이런 표현들은 부모의 응보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소리를 지르는 것에서 멈추지 않으면 아이의 신체를 아프게 하는 체벌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것을 응보적 훈육이라고 할 수 있다. 응보적 훈육은 아이를 비난하는 행위뿐 아니라 부모가 스스로를 비난하는 행위도 포함된다. 아이를 벌주려고 하는 것이든, 부모 자신을 벌주려고 하는 것이든, 본질은 같다. 잘못을 했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는 왜 아이 때문에 화가 날까? 어떤 물건을 망가뜨려서일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건 부모 자신의 말을 아이가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아이는 부모가 하라는 대로 순종하는 로봇도 아니고 부모의 소유물도 아니다. 만약 아이가 부모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르기만 하고 말썽을 부리지 않는다면 그건 건강한 아이가 아닐 것이다. 아이답지 않게 자신을 억누르고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내적 억압은 임계점을 넘기게 되면 무기력이나 분노로 표출되기 쉽다. 아이는 어른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 여러 부분에서 미숙하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자기중심적이고 무례한 모습을 보여줄 때, 또는 실수를 저지를 때 소리를 지르거나 체벌을 한다고 해서 아이의 행동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때 아이는 혼나기보다 바르게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잘못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가 있다면 그것의 회복에 집중해야 한다. 응보적 훈육은 부모와 아이의 관계를 더욱 나쁘게 하고, 아이를 점점 반항하는 10대로 만들 뿐이다.

 

그렇다고 아이에게 무조건 허용적으로 대하는 것도 능사가 아니다. 아이는 어느 경우에도 존중받아야 하지만 경계를 지어줄 필요가 있다. 회복적 훈육이란 아이와 부모 자신을 이해하는 일에서 시작한다. 아이는 어떤 존재인가? 한 해 한 해 달라지는 아이를 간단히 규정할 수 없지만 아이의 욕구는 대체로 보편적이다. 지금 키우고 있는 아이의 나이였을 때 우리가 바라던 건 무엇이었을까? 어린 시절의 욕구는 대부분 소박하다. 특히 부모에게 바라는 것은 대부분 단순하면서도 소중하다. 아이는 부모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길 원한다. ‘잘한다, 못한다평가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그 자체로 수용하고 사랑해주길 바란다. 아이가 아주 어릴 때 많이 하는 말은 안아줘놀아줘이다. 아이가 필요로 하는 건 부모가 함께 있어 주는 것, 즉 따뜻한 관심과 놀이이다. 이때 부모는 아이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아이가 천사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천사처럼 부모의 마음을 환하게 만들 때도 있지만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부모를 화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기도 하는 게 아이들이다. 그런데 화가 나고 괴로워질 때 그 원인을 아이의 행동에서 찾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우리가 분노와 고통에 시달리는 원인은 아이에 대한 기대, ‘내가 옳다는 믿음, 도덕적 기준 같은 것들 때문이다. 따라서 부모로서 필요한 일은 부정적인 감정을 알아차리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작업이다. 화가 나더라도 그 순간에 화를 표출하기보다 잠시 그 시간을 견디고 화내지 않은 채 마음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의 기질적 성향을 잘 파악하여 거기에 잘 맞추어 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밝고 사교적이지만 집중을 오래 못하고 하던 일을 잘 끝맺지 못한다면 윽박지른다고 해서 아이의 행동이 개선되지 않는다. 잘 타이른다고 해서 해결되지도 않는다. 이런 경우 부모는 아이에게 목표를 분명히 해주되 스스로 알아서 하기를 기대하기보다 끝까지 해낼 수 있도록 곁에서 격려하고 챙겨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대신 해주어서는 안 된다. 성격이 급하고 화를 잘 내는 아이의 경우, 아이가 감정적으로 고조되었을 때는 훈계하거나 혼내서는 안 된다. 그냥 감정이 식을 때까지 기다려주고 차분해졌을 때 대화를 하는 게 좋다. 아이의 잘못을 지적하기보다 아이가 스스로 문제를 인식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

 

만약 아이가 아이답지 않게 생각이 많고 걱정과 근심에 시달리는 편이라면 감정 표현을 편안하게 할 수 있도록 자주 말을 걸고 공감해주는 게 좋다. 사려 깊은 아이일수록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다. 생각의 기본 속성이 반감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무 자기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무슨 일로 고민하는지 물어보고, 감정과 욕구에 집중해서 대화를 이끌어 가야 한다. 그리고 무덤덤하고 별생각 없이 지내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의 경우, 말썽을 부리는 일은 거의 없지만 갈등을 회피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참고 참다가 폭발적으로 감정을 쏟아낼 수 있다. 이런 아이 역시 자주 말을 걸어주어야 한다.

 

사실 아이와의 관계가 안 좋아지는 이유는 아이에게 어떤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 부모의 미숙함 때문인 경우가 많다. 자존감이 낮거나 통제 욕구가 지나치게 강한 부모, 일관되지 못한 모습을 자주 보이고 불안도가 높은 부모,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부모 등 안타까운 사례가 많다. 특히 메시지와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부모의 모습은 아이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심하면 아이의 내면을 분열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훈육을 할 때 아빠/엄마 얼굴 똑바로 쳐다봐.” “뭘 잘했다고 고개를 쳐들어!” 또는 왜 대답이 없어?” “지금 어디서 말대꾸야!” 이렇게 이중구속을 하는 식이다. 이런 태도는 애착을 형성하는 데에 악영향을 준다. 이런 모습이 나오게 되는 원인은 부모 자신이 미숙한 탓에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몰라서이다.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누구나 좋은 부모가 되고 싶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아이에게 정말로 바라는 게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부모가 그러한 자신을 이해하고 부족함을 인정하며 더 나아지려고 노력할 때 아이의 태도도 함께 좋아지는 경우를 많이 본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부모를 성장시키기 위해 온 선물 같은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회복적 훈육은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갖게 하는 걸까? 그것은 다음과 같다:

 

▶ 부모로서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 나는 아이가 정말로 필요로 하고 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원하고 내가 옳다고 믿는 것에 아이를 맞추려고 하는가?

▶ 나는 아이에게 건강한 권위로서 원칙을 지키도록 노력하면서도 예외를 인정하고 있는가?

▶ 부모로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이야말로 부모로서 우리가 미숙함에서 벗어나 성숙해지고, 아이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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