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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적 사법의 인지학적 가능성 (2019. 12. 26) 본문

슈타이너사상연구소칼럼

회복적 사법의 인지학적 가능성 (2019. 12. 26)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3. 6. 9. 00:28

회복적 사법의 인지학적 가능성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사회적 유기체의 삼지성이 인간 공동체 생활의 본질적인 것에서 그 설립 근거를 보여 주게 될 결과 중에 하나는 사법 활동이 국가 기관에서 분리된다는 사실이다. 국가 기관은 사람들 사이나 집단 사이에 존재해야 하는 법률을 제정할 책임을 지닌다. 그러나 판결 성립 자체는 정신 조직에서 형성된 기관에 속한다. 판결 성립은 판결하는 사람이 판결받아야 할 사람의 개인적 상황에 대한 감각과 이해를 지닐 것이라는 그 가능성에 고도로 의존한다. 그런 감각과 이해는, 사람들이 정신 조직의 기관에 매료되게끔 만드는 신뢰 조직이 법정을 구성할 권위를 지니는 경우에만 존재할 것이다.
 
정신 조직의 행정 기구가 다양한 정신적 직업 계층에서 선별한 사람들을 재판장으로 임명할 수 있다. 그 사람들은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다시 자신의 직업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오 년이나 십 년 정도의 일정 기간제로 선별된 인물들 중에서, 누구든지 사법상의 혹은 형법상의 문제가 생기면 판결을 내리도록 부탁할 정도로 신뢰하는 사람을 선택할 가능성을 지닌다.
 
각자의 거주 범위 내에 그 선택이 의미가 있을 정도로 충분한 수의 재판장이 항상 존재할 것이다. 그래서 원고는 항상 피고를 위한 담당 판사에게 문의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제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지역에서 어떤 결정적인 의미를 지닐지 숙고해 보라. 여러 언어들이 사용되는 지역에서는 각 소수 민족의 구성원이 그 민족을 위한 판사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런 제도가 각 소수 민족 간의 생활을 조정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민족성 외에도 더 많은 생활 영역이 있고, 그런 것이 건강하게 개진될 수 있도록 그런 제도가 유익한 의미에서 작용할 수 있다.
 
좁은 범위의 법률 지식을 위해서는 공무원들이 이미 설명된 방식으로 구성된 판사와 법정을 보조할 것이다. 그 공무원들 역시, 스스로는 재판에 임하지 않는 정신 조직의 행정 기구가 임명한다. 마찬가지로 항소 법원 역시 그 행정 기구가 형성한다. 그런 전제 조건이 실현됨으로써 발생하는 그 생활 본성 내에, 판사가 판결을 내려야 할 사람의 생활관습과 감각 양식에 밀접한 관계에 있을 수 있고, 일정 기간 동안에만 임하는 판사직 외의 생활을 통해 재판을 받아야 하는 사람의 생활 범주를 잘 알 수 있다는 사실이 담겨 있다. 건강한 사회적 유기체가 그 제도 내 어디에서나 그것의 생활에 관여하는 인물들의 사회적 이해를 양성하게 되듯이, 사법 활동에서도 그렇게 될 것이다. 판결의 집행은 법치국가의 몫이 된다."
 

- 루돌프 슈타이너, <사회 문제의 핵심>, 151-152쪽

(밑줄 및 단락 나눔은 연구자가 행함)

 
 
회복적 경찰활동이 본격화되고 있는 현 시점에 우리는 사법 활동이 과연 사법 기관만의 것인지 물어야 한다.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 사건이나 현 검찰총장의 정치행위 등을 떠나서, 오늘날 사법제도가 과연 대중의 필요를 만족시키고 있는지 의문이다. 갈등이나 분쟁이 벌어졌을 때 법적 해결은 그리 좋은 방식이라고 하기 어렵다.

처벌의 근거가 가해자의 잘못된 행위에 있다기보다 그 행위가 법 조항을 위반했는지 여부에 달려 있는 것도 그렇지만, 재산이나 권력의 유무에 따라 판결이 달라지는 문제와 어떤 변호사를 고용했는지에 따라 재판이 왜곡되는 문제를 우리는 지겹도록 보아왔기 때문이다. 응보주의 또는 예방주의를 지향하는 현재의 사법제도가 당사자들의 필요를 도외시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비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행 사법제도는 당사자들의 본질적인 필요를 충분히 다루지 못하고, 다룰 수도 없는 형편이다. 이것은 형사사법뿐 아니라 민사사법에도 해당되는 한계이다.
 
새로운 사법제도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고 할 때 루돌프 슈타이너의 사회삼원론은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슈타이너는 사회가 정신 영역, 국가 영역, 경제 영역으로 각각 독립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법 활동을 국가 기관에서 떼어내 정신적 기관에 양도해야 한다는 통찰은 회복적 사법과 맥이 닿아 있다.

회복적 사법이 태동한 캐나다에서 중대한 이슈 중 하나는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겪는 사법 문제였다. 캐나다 원주민들은 분쟁이 발생한 경우 원주민 사회 전체의 공동 책임이라는 관념 위에서 대화를 통해 해결을 모색하는 전통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들여온 형사 사법은 수사 기관의 수사와 재판 절차를 통해 징벌적 제재가 가해지는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캐나다 원주민들은 분쟁이 발생했을 때 일반적 사법 제도를 따르기 어려워했고 캐나다 내에서 원주민 사회의 구금률은 다른 집단보다 상당히 높았다. 원주민 사회의 분쟁해결 방식과 기존의 형사사법 모델의 충돌을 조화시키고자 하던 노력이 피해자학의 성과와 접목되면서 새로운 형사사법 모델로 발전한 것이 회복적 사법이다.(박광섭, <북미의 회복적 사법에 대한 고찰> 참고)
 
사법 활동이 필요한 이유는 갈등 당사자뿐 아니라 분쟁사건으로 인해 영향을 받는 모든 구성원이 문제의 원인을 직시하고, 발생한 피해와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는 데에 있다. 처벌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다. 슈타이너가 지적하는 것은 당사자들의 개인적 상황에 대해 깊은 이해와 감각을 지닌 이들이 문제해결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는 점이다. 법전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궁극적인 변화가 생기는 것이 중요하다.

피해자와 가해자 등 당사자와 그 사건으로 영향을 받은 주변인들이 모두 모여 대화를 나누는 회복적 사법의 방식은 피해자의 피해 회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만족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범죄 사건 그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로 인해 발생한 피해와 고통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왜 그런 사건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를 여러 사람에게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좀 더 인간적이고 실질적인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재판은 공동체 안에서 신뢰받는 구성원들에 의해 구성되고 진행되어야 한다.

배심원제에서 나아가 재판관까지 정신-문화적인 공동체 조직 안에서 나와야 한다는 슈타이너의 발상은 현행의 독점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사법부가 낳는 부작용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발도르프 교육기관들은 갈등이나 분쟁 사안에 대해 회복적 사법의 방식을 도입해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교육기관 내에서 벌어진 사안을 가지고 처벌 또는 징벌적 손해배상을 목적으로 사법기관에 도움을 요청하는 행위는 발도르프 교육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발생한 피해에 대해 은폐하려 하거나 방치하는 행위만큼이나 위험하다. 갈등의 예방과 해결이라는 부분에서 우리는 내적 역량을 더욱 더 쌓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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