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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본문

슈타이너사상연구소칼럼

붕괴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3. 7. 29. 11:23

붕괴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우리가 동물과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동물도 인간처럼 의식이 있고, 감정과 욕구, 어느 정도의 인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동물은 이 모든 것을 통합할 수 있는 자아의식이 부재하다. 동물과 다른 인간의 특징을 꼽으라면 자아 또는 자아의식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자아는 반성적 사고를 통해 출현했다.
 
인간과 자아
 
우주의 역사 속에서 생명이 없는 광물의 세계에서 생명이 있는 생물/식물이 출현했고, 의식이 없는 식물의 세계에서 의식이 있는 동물이 출현했다. 자아의식이 없는 동물 세계에서 자아의식이 있는 인간이 출현했지만 인간의 자아의식은 아직 미숙하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렇기에 동료 인간을 착취하며 지구 환경을 파괴해 왔다. 교육은 자아를 가진 인간에게만 가능한 것으로 오로지 인간 자아의 성숙을 위해 기능한다.
 
인간에게 자아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자 저주이다. 어떤 동물도 인간처럼 괴롭게 살지 않는다. 숲속의 다람쥐와 토끼, 참새는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동물은 환경에 자기를 맞추고 남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으며 본능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이에 비해 인간은 환경을 자기 뜻대로 바꾸려 하고 끊임없이 남과 자신을 비교하며 지혜로운 본능을 잃어버린 채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본능을 잃고 인간이 얻은 것은 지성이다. 지성의 힘으로 엄청난 문명을 건설했지만 여기에는 대가가 따른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면 그 부족한 본능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만다. 수많은 사람이 식욕, 수면욕, 성욕 등의 본능적 욕구를 올바르게 충족하지 못해 고통받고 있다. 그리고 미숙한 자아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 크고 작은 갈등을 일으키며 자기 자신과도 불화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과 달리 정신적 존재이다. 진리를 탐구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선한 삶을 살고자 노력한다. 세상에서 유일하고 고유한 나, 즉 정신적 자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 존재는 존재 의미를 찾고 존재 가치에 대해 고민한다. 인간, 특히 어린아이일수록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자기 인생을 허투루 살고 싶어 하는 아이를 만나본 적이 없다. 정신적인 추구는 인간의 고유한 행동 양식이다.
 
정신적 존재인 만큼 인간은 존재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 이 존재감은 자존감이나 자신감, 자아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별하고 훌륭한 존재로서 성장하고 싶다는 충동, 최소한 자기 자신답게 살고 싶다는 충동이 적절한 교육을 만날 때 인간은 빛을 발한다. 문제는 가정이나 학교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할 때 발생한다. 학대와 방치, 그 정도는 아니어도 존중 없는 양육 환경에서 아이는 존재감 상실을 경험한다. 존재감이 약화된 아이는 문제 행동을 통해서라도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어진다.
 
존재감은 자기통제력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자기 몸을 자유롭게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만큼이나 자기 삶을 스스로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가 인간에게 있다. 그것이 좌절되었을 때 파괴적인 충동이 생긴다. 어린 시절 아이를 충분히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는 촉각 경험, 소근육과 대근육을 활용한 놀이(운동감각, 균형감각)가 풍부하게 주어져야 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생활리듬이 안정되게 잡혀 있어야 하는 것(생명감각)도 자기통제력의 발달에 큰 영향을 준다.

정신적 자아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똑같이 존엄하다. 그래서 나이가 어리거나 많거나, 장애가 있거나 없거나 간에 누구든 그 사람의 특성에 맞게 존중받아야 한다. 개인의 고유성이 존중받지 못할 때 관계는 깨지고 사회는 폭력적인 양상을 띈다. 오늘날 가정과 학교, 사회가 전반적으로 붕괴 양상을 띠는 것은 인간 이해의 부재와 그로 인한 잘못된 교육, 즉 존중 없는 교육의 영향이 크다.
 
근대사회의 참상
 
인간은 물리적인 눈뿐 아니라 영혼적인 눈도 갖고 있다. 눈을 감아도 우리는 무언가를 볼 수 있다. 눈을 떴을 때 우리가 주로 외부에 시선을 준다면, 눈을 감을 때 우리는 우리의 내부를 바라본다. (물론 눈을 뜬 상태에서도 내면 세계를 볼 수 있다.) 물리적인 눈에만 의존할 때 우리는 계속해서 외부에 집착하며 낮은 차원의 의식 속에 살아간다. 이것을 감각혼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 외부에 있다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거기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영혼적인 눈을 뜨고 내면을 볼 수 있다면 우리의 의식은 성숙해진다. 의식혼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근대사회는 물질주의 혁명을 불러왔다. 감각적인 세계만을 유일한 세계로 인정하고, 감각적인 욕구 충족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해왔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가치를 부여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그 의미를 축소하거나 굳이 돈으로 환산해 판단했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되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정신적 가치들 역시 상품이 되어 거래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적 삶은 감각적 탐욕과 함께 정신-문화적인 삶의 영역을 소멸시켰다.
 
감각혼의 차원에서 우리는 갈등이 벌어졌을 때 그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다. 즉물적으로 응보 감정이 올라오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워 미워하려 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반감이 올라와 그것이 혐오감, 증오감으로 고조되면 우리의 사고방식은 일차원적으로 단순해진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으며 그러니 너는 응징되어야 하는 것이다. 합리적인 것처럼 위장했지만 근대사법의 에토스는 사실 응보 감정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근대사법은 감각혼에 봉사하는 지성혼의 형상으로 축조되었다. 경험과학을 흉내낸 법실증주의는 본질적으로 부르주아 자본가의 재산권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형식 논리이다. 가진 자들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국가주권이 요구되었고, 형사사법은 법을 어긴 자를 가혹하게 처벌하도록 작동한다. 진정한 피해자는 범죄 피해자가 아닌 국가가 되고(국가의 피해자화), 국가는 범죄자, 물론 지배계급의 일원이 아닌 범죄자를 응징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가 소외되는 것은 필연적 현상이다. 실제로 사법은 철저히 계급적이다.
 
사법의 영역은 경제 영역이 그렇듯 사회적 삶의 한 부분일 뿐이다. 사회를 질서 있게 지탱하는 뼈대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모든 영역이 사법화되고 있다. 온정과 도덕이라는 피와 살이 발라내지고 뼈다귀만 남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인간적인 공동체가 해체되고 어디에서도 온기를 찾을 수 없다. 공동체와 그에 따른 도덕이 통용되지 않으니 누구든 두려움을 갖게 되고 인간적으로 해결 가능한 일도 법적으로 다투려 하는 것이다.

특히 교육 영역에서 이러한 현상은 참상이 되고 있다. 교사의 통제를 벗어난 일부 아이들은 교실에서 폭력을 휘두르고 학교를 뛰쳐나간다. 이제 학교폭력은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다. 위기학생이 늘어났고 그런 학생을 제대로 이해하고 치료적 도움을 주기도 전에 사법 영역이 개입한다. 학폭으로 신고하는 것에서 나아가 교사를 아동학대로 신고해버리고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민원을 넣는데, 교육당국은 속수무책인 상황이다. 이런 현실에서 누가 교사를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근대 이후의 새로운 공동체를 상상해야 한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 코로나 팬데믹과 기후위기는 우리에게 강력한 메세지를 주고 있다. 근대적 삶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자아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하며 인류는 반사회적 힘이 강해져왔다. 전근대적 집단주의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제는 새로운 개인주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성숙한 개인주의가 필요해졌다. 구체적으로 극단적인 반사회적 힘에 대해 공동으로 제어할 수 있는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 개인의 자유는 타인에게 고통을 주어 그의 자기통제력을 훼손하려 할 때 제재가 필요하다. 위기학생(또는 소위 '진상 부모')은 그 수가 아무리 늘어났다 해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들은 적절한 외부 통제와 치유가 필수적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밖의 대다수 구성원들이 올바른 교육을 통해 성숙해지는 것이다.

영성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차원이 아니다. 외부를 향한 시선을 내부로 돌려 고요히 생각해 보면 누구든 알 수 있다. 자신과 타인의 존엄성을 깨닫고 존중하는 것, 자기중심성을 극복하고 합리성을 키워가는 것이 영성의 길이다. 이것을 위해 꼭 종교에 의존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종교의 직관 역시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대에 이르렀으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진정한 과학 정신일 것이다. 과학을 통해 영성에 이르를 때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예술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는 다름아닌 나, 즉 인간의 자아이다.

오늘날 우리의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은 무엇인가? 개인으로서는 마음을 다스리고 강건해지는 것, 역량을 키우고 의지를 다지는 것, 자신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직시하는 것, 그리고 스스로를 치유하는 것. 사회적으로는 법적 영역과 경제 영역, 문화(교육) 영역이 서로의 영역을 침해하지 않고 각자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것, 공동체 전체의 필요를 바라보는 것, 응징보다 회복에 구성원 모두 마음을 모으는 것. 지금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이 붕괴 현상이 인류가 거대한 도약으로 나아가기 한 걸음 직전이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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