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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롯 극장과 아우슈비츠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3. 8. 10. 11:35

스데롯 극장과 아우슈비츠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이천 년 전 예수가 태어나 가르침을 펼치던 팔레스타인 땅에는 오늘날 ‘스데롯 극장(Sderot cinema)’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공간이 있습니다. 실제 극장은 아니고 가자지구가 한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남부의 스데롯 언덕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공습이 있는 날이면 언덕 꼭대기에 많은 사람이 모입니다. 소파와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서 팝콘과 맥주를 먹고 마시며 가자지구에 펼쳐지는 폭격을 보는 것입니다. 폭음이 울리고 섬광이 터지면 구경꾼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합니다. 이들이 웃고 즐기는 광경은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폭격입니다.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 속에서 폭격의 스펙터클을 즐기는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의 자손들입니다.
 
오늘날의 아우슈비츠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의해 높이 8m의 고압전류 장벽이 세워져 엄격하게 통행이 통제되는 가자지구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2008년 가자전쟁이 벌어진 22일 동안, 팔레스타인 사람은 1380명이 죽었고 이스라엘 사람은 13명이 죽었습니다. 팔레스타인 피해자 대부분은 민간인이었으며, 이스라엘군은 심지어 UN이 운영하는 학교와 트럭까지 공격했습니다. 2014년 전쟁 때는 이스라엘 사람들 69명이 죽는 동안 2140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희생되기도 했습니다. 부상자는 1만 1천여 명, 피난민은 10만 명에 이르며, 어린아이가 400명가량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쟁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래서 이 참사를 ‘제2의 홀로코스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2019년에도 대규모 공습이 있었지만, 전쟁이 없는 일상 중에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가자지구뿐 아니라 서안지구에서 이스라엘 점령군들에게 살해당하곤 합니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어머니를 잃었던 유대계 독일 철학자 한스 요나스(1903-1993)가 이 상황을 본다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요나스는 윤리철학자로서 평생 동안 ‘책임’이라는 개념에 천착했습니다. 그는 오늘날의 새로운 상황에서 전통적 윤리학이 선과 악의 규범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면서 ‘윤리적 진공상태(Das ethische Vakuum)’에 빠져 있다고 진단한 바 있습니다. 전통적 윤리학이 인간중심적이고 주관에 종속되었다면 이제는 주관에 종속되지 않을 ‘참다운 객관의 존재’가 밝혀져야 한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그에 따르면, 자기중심성의 한계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전체를 마주할 때 놀라움, 즉 ‘경외의 감정’이 솟아납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책임의 감정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요나스에게 인간의 본성이란 선에도 악에도 열려 있고, 선 자체도 악 자체도 아닌 단지 선에로의 능력 또는 악에로의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비관적일 필요도, 낙관적일 필요도 없으며, 오로지 실재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인식에 이르기까지 그는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참상이 벌어졌을 때 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 개념(Der Gottesbegriff nach Auschwitz)』이라는 논문을 통해 자신의 고뇌와 그에 따른 결론을 제시합니다. 아우슈비츠에서 600만 명의 유대인이 죽어갈 때 신은 침묵했습니다. “개입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개입하지 않은 것이다.” 요나스는 신이 더 이상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존재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에게 신은 ‘고통 받는 신’이고 ‘되어 가는 신’이며 ‘돌보는 신’이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참상은 신이 전능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진 것입니다. 신이 전능하지 않은 것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자신의 권능을 전적으로 양도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인간은 자유로워졌지만 자유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아니, 자유의 최고봉은 책임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신은 자신의 신성을 벗어버렸지만 인간을 통해 신성을 되찾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신은 인간 행위의 변화를 계속 따라가는 ‘되어 가는 신’입니다. 영원하고 변치 않는 신이 아닌 것입니다. 또한 신은 인간 행위에 슬퍼하고 실망하는 ‘고통 받는 신’입니다. 인간에 의해 경멸당하고 무시당하는, 인간으로 인해 한탄하는, 인간을 창조한 것을 후회하는, 인간으로 인한 환멸에 애통해하는 신입니다. 동시에 신은 인간 행위와 관련하여 바라고 추구하는, ‘돌보는 신’입니다. 인간이 세상을 망쳐 놓을까봐 노심초사 염려하지만 창조 세계에 대해 애정을 느끼고, 인간의 범죄에 대해 가슴 아파하며, 그가 죄로부터 회개하였을 때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끌어안고 기뻐하는 신입니다.
 
정리를 하면 이렇습니다. 신은 더 이상 모든 것을 다 아는 존재도,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지만, 모든 것을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전지전능하지는 않지만 함께 아파하고 함께 눈물 흘리며 진심으로 사랑하는 존재가 곧 신입니다. 신은 인간의 영혼에 대한 호소를 통해, 계시를 통해, 간절한 침묵으로 창조 세계에 개입합니다. 인간은 신의 지혜와 권능에서 벗어나 아우슈비츠와 같은 일을 벌이고 스데롯 극장에서 똑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신이 우리에게 자유를 준 것은 인간을 통해 신성을 되찾기 위함이고,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입니다. 신성을 되찾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안에서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니체 역시 신이 더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님을 알았기에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지만, 요나스는 신이 여전히 살아 있고, 아우슈비츠에도 실재했음을 알았습니다. 아마도 신은 요나스의 어머니를 안고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무신론자라면 이 신의 개념을 세계의 고귀함 또는 인간 내면의 존엄성 그 자체라고 생각해도 좋을 듯합니다.
 
소설가 박민규는 자신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투병(鬪病) 중이며,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누군가를 간호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리고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한 칼럼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인간이 신 없이 종교적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를 생각하는 무신론자인데, 나에게 그 무엇보다 종교적인 사건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곁에 있겠다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손에 쥐고 환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랑의 발명
 
이영광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계간 『시에』, 2012년 여름호)

 
 
 
참고문헌
 
김은철, 송성수.(2012). 과학기술시대의 책임윤리를 찾아서: 한스 요나스의 ‘책임의 원칙’을 중심으로. Journal of Engineering Education Research, 15(1), 72-78.
 
김종국.(2014). 신(神) 의 ‘모험(冒險)’과 인간(人間)의 ‘책임(責任)’-한스 요나스의 ‘아우슈비츠 이후(以後) 의 신(神) 개념(槪念)’. 가톨릭철학, 23, 157-176.
 
전남식.(2021) 한스 요나스의 “아우슈비츠 이후 신 개념”(The Concept of God after Auschwitz) 정리. [네이버 블로그 젊은 목사의 집.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cns21st&logNo=222325102612&proxyReferer=]
 
Jonas, H.(1987). Technik, Medizin und Ethik: Praxis des Prinzips Veramtwortung, Frankfurt am Main: Suhrkamp [국역: 이유택 옮김, 기술 의학 윤리: 책임원칙의 실천, 솔,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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