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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도르프 교육의 원칙과 실천에 대하여 본문

슈타이너사상연구소칼럼

발도르프 교육의 원칙과 실천에 대하여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3. 1. 10. 22:12

발도르프 교육의 원칙과 실천에 대하여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우연히 발도르프학교에서 일을 하게 된 계기로 발도르프 교육학과 인지학 공부를 시작한지 15년이 넘어간다. 공교육에 있던 나로서는 처음 수업참관을 했을 때 노래로 시작하는 아침열기가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노래로 시작해 다양한 리듬활동과 리코더 연주가 이어지는 것을 감탄하며 보았다. 교실에는 TV와 컴퓨터가 없고 교과서도 없었다. 교장 같은 관리자도 없고 공화정의 형태로 학교가 운영된다는 게 놀라웠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발도르프 교육 자체가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점이었다. 라주어페인팅으로 꾸며진 예쁜 색감의 교실 벽, 아기자기한 계절탁자, 아이들이 그린 습식수채화가 벽에 걸려 있었고, 선생님이 그린 칠판그림은 정감 있었다. 선생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몸으로 수업내용을 표현하는 아이들을 보며 교육의 희망이 여기에 있다고 느꼈다. 문제는 내가 이 철학을 체화해 아이들을 직접 가르쳐야 한다는 데 있었다.

굳은 몸이 풀리고 창조적 힘이 내 안에서 흘러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방학마다 교사코스를 다녔지만 2년 정도는 루돌프 슈타이너의 인간학이 절망스러울 정도로 들어오지 않았다. 통역을 통해 듣는 독일 교수님의 강의는 늘 낯설었다. 교실을 꾸미거나 방법론을 배우는 것보다 힘들었던 건 슈타이너의 사상을 온전히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많은 철학책을 읽고 영성 사상가들의 저서를 탐독했다고 자부했지만 인지학은 전혀 다른 종류의 사상 체계였다. 돌아보면 가장 큰 어려움은 인지학의 내용보다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틀을 버리는 일이었다. 수업도 그러했다. 이미 공교육의 수업방법론과 철학에 틀이 잡혀 있던 나에게 기존의 틀을 허물고 발도르프 교육의 방법과 철학을 구현하는 일은 재활치료만큼이나 어려웠다. 한동안은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형태로 아이들을 만났다. 다시 자신감을 얻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고, 다행히 아이들은 기다려주었다.

익숙해진 뒤로는 예술적인 수업방법보다 과학적인 인지학 사상에 매력을 느꼈다. 슈타이너가 여러 차례 밝힌 것처럼 그는 과학자였고, 정신세계를 자연과학처럼 탐구해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그를 신비주의 사상가로 보는 것은 모욕적인 일이다. 그가 자연과학의 성취를 온전히 수용하고 거기에 더해 영혼과 정신의 세계를 탐구하여 과학을 확장해야 한다고 말한것처럼, 우리도 과학적인 태도를 갖추고 훈련해야 한다. 그렇다고 과학이 만능이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과학주의로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 한쪽의 극단에 신비주의가 있다면 다른 한쪽에는 과학주의라는 극단이 있다. 정신과 물질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 예술이다. 슈타이너에게 교육은 과학이나 종교보다 예술이었다. 예술을 통한 과학, 예술을 통한 종교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성에만 머물 수 없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는 머리와 함께 가슴과 손발을 잘 써야 했다.

인지학에 대해 잘 몰랐을 때 내가 처음 시도했던 것이 음양오행 체계와 비교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교사를 위한 인간학>에도 내용이 담겨 있다. 비교적 나에게 익숙한 관념 체계와 비교하면서 인지학을 동양의 관점에서 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서양에도 음양오행 체계를 소개해야 한다고 믿었다. 근래에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그러한 비교 작업은 인지학에 대해 충분히 이해한 뒤, 다시 말해 인지학을 인지학의 관점에서 충분히 소화한 뒤에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인지학에 대해 내재적 접근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비교 연구를 한다는 게 인지학을 곡해할 우려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지학을 현지화해야 한다거나 주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을 만나면 걱정스럽다. 그리스도교나 불교 등의 사상을 현지화하고 자의적으로 수용한 많은 단체가 사이비종교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그동안에는 많은 사람이 발도르프 교육을 좀 더 쉽게 이해하고 공부했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그래서 발달론이나 기질론 등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요즘에는 '과연 발도르프 교육이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많이 든다. 요근래 발도르프 교육이 상당히 대중화되면서 근본 원칙이 흔들리는 건 아닌지 걱정될 때가 많다. 아이들의 발달에 맞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게 발도르프 교육의 가장 핵심적인 원칙임에도, 발달과 상관 없이 문자교육이 이루어지는 현실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왜들 그렇게 어린아이에게 한글을 떼주지 못해 안달인 것인지, 그림과 노래, 몸놀이를 활용하면 '발도르프식' 수업이 되는 것인지... 우리의 상식과 욕망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데에 발도르프 교육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나의 욕망'을 합리화하는 데에 발도르프 교육이라는 이름을 쓸 것이 아니라...

슈타이너가 꿈꿨던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에게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삶이란, 통속적인 사고에 빠진 우리의 관념과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에게 인간이란 우주, 즉 정신세계와 밀접하게 연결된 존재이다. 지상세계에서 이름이 알려지고 부유해지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우리 아이를 다른 아이들 못지 않게 잘나고 뛰어나게 키우는 것도 발도르프 교육의 목표는 아닐 것이다. 아이 내면에 숨어 있는 소질과 소명, 고유한 과제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아이가 스스로 자기 삶을 살아갈 힘을 키워주는 것이 진정한 목표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부모와 교사는 아이들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인 까닭이다. 코로나 이후의 세상에서 우리는 더 큰 시련에 시달릴 것으로 보인다.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연 어떤 힘이 필요한 것일까? 최소한 발도르프 교육을 좋아하고 슈타이너의 가르침을 좇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원칙이란 무엇일까?

목조로 지어졌던 첫 번째 괴테아눔이 반대세력에 의해 불탄 이후, 보험금을 가지고 다시 원래의 괴테아눔을 짓자는 인지학협회 회원들에게 슈타이너는 이렇게 말한다. “인지학 운동 같은 정신적 운동을 하면서 올바른 길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성공이나 실패는 근본적으로 보아 사실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 주제 자체의 내적인 힘과 내적인 자극에서 생성되는 것만 유일하게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정말로 진지하고 신중한 자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적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내면으로부터 진실하게 원해지는 것을 따르는 것, 이것이 바로 발도르프 교육의 원칙이고 우리가 실천해야 할 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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