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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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참사와 국가 폭력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여론은 참사 희생자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사건이 술에 취한 몇몇 사람들에 의해 벌어진 것이고, 경찰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언론이 보도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수많은 죽음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은 없었다. 1989년 4월 15일, 영국 셰필드의 힐즈버러 축구장에서 벌어진 참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타블로이드 신문 ‘더 선’은 ‘진실(Truth)’이란 제목 아래 이 사건이 술에 취한 리버풀 팬들 때문에 벌어졌고, 리버풀 팬들이 희생자들의 주머니를 털었으며, 구조 활동을 하는 경찰을 방해했다는 거짓 기사를 실었다.
힐즈버러 참사와 10.29 이태원 참사
리버풀 FC와 노팅엄 포레스트 간의 축구시합이 벌어지던 사건 당일 경찰은 몰려드는 인파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2만5000명에 달하는 리버풀 팬들이 입장할 수 있는 입구는 한 곳뿐이었다. 검표소에서 극심한 병목현상이 벌어졌지만 경기는 제시간에 시작되었다. 경기 시작 시간을 늦춰야 한다는 현장 경찰의 제안은 무시되었다. 경찰의 현장 책임자는 출구를 열기로 결정했고, 열린 출구로 수천 명의 팬들이 중앙관람석으로 몰려들면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의 몸에 짓눌리게 되었다.
그날 94명이 사망하고 766명이 부상을 입었다. 경찰은 술에 취한 훌리건들이 표도 없이 경기장에 난입해 벌어진 단순사고라고 발표했다. 유족들은 경찰로부터 사망자가 술꾼 아니었느냐는 추궁까지 당했다. 최종적으로 97명이 사망한 이 참사는 2012년에 와서야 올바른 진상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단은 이 참사에 대하여 팬들의 책임은 없으며 사건의 주된 원인이 경찰의 통제 실패임을 분명히 했다. 증인진술서 중 상당수가 경찰에 대한 부정적 언급을 없애기 위해 수정되었고, 경찰 및 해당 지역의 보수당 의원이 사실이 아닌 정보를 ‘더 선’을 포함한 언론에 흘렸다고 밝혔다.
2022년 10월 29일, 서울 이태원의 세계음식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가 폭 5m 골목으로 쏟아지고 있다는 신고가 저녁 6시 34분부터 경찰에 빗발쳤다. 그러나 20명의 교통기동대가 현장에 도착한 것은 밤 9시 33분이 되어서였다. 이 좁고 경사진 골목에서 158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벌어지지 않은 참사였다. 미리 정복을 입은 경찰이 교통통제만 했어도 막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사전에 경비 인력을 단 한 명도 배치하지 않았다.
매년 핼러윈 주말이면 수만 명의 젊은이가 술집과 클럽이 즐비한 이태원으로 향한다. 세계음식거리와 이태원 중심가를 잇는 골목에는 시끌벅적한 축제 분위기가 형성된다. 한 라운지 바는 “코로나 이후 첫 핼러윈인 만큼 역대급 핼러윈 파티가 될 예정”이라며 “해 뜰 때까지 함께 놀아봐요”라는 광고를 내걸기도 했다. 이날은 예년과 달리 기동대의 투입도 없이 마약 단속에 초점을 맞춘 경찰 137명이 투입되었다. 그마저도 사복 경찰이 절반이었다. 이로 인해 인파가 몰리는 시기에 맞춰 기획성 단속을 하다가 현장 질서 통제에 실패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사회적 참사는 국가 폭력이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고 많은 사람이 아이들에게 이러한 나라를 물려주어서 미안하다며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 당시에 회자되던 말이 “이게 나라냐?”였다. 사고가 벌어진 이유는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초기에 제대로 구조했다면 전원이 생존할 수 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사고가 참사가 되었고, 304명의 안타까운 희생자가 발생했다. 책임 규명은 여전히 미완이다. 피해 회복과 책임자 처벌은커녕 진상 조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8년의 세월이 흘렀다. 벌써 잊혀진 것일까? 서울 한복판에서 다시 어처구니없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매년 경찰 기동대가 출동하여 질서유지를 하던 골목에서 올해에만 관행과 달리 어떤 조치도 없었다. 마침 올해 들어 정부는 ‘마약과의 전쟁’을 부르짖었고, 검찰과 경찰에서 대대적인 마약 단속을 공언했다. 당일 사복경찰들은 취재기자를 대동했다고 전해진다. 초저녁부터 압사 사고에 대한 우려가 있었고, 경찰에 수십 건의 신고가 접수됐다. 그런데도 묵살이 되었다. 이게 자연스러운 일일까?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국가는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세월호 참사와 똑같이 국가에 의해 죽은 것이다.
앞서 언급한 영국 힐즈버러 참사의 경우 2014년에 애초의 사고사라는 결론을 뒤집고 희생자들이 ‘불법적으로 살해되었다(unlawfully killed)’는 새로운 평결이 내려졌다. ‘불법적 살해’ 평결은 법을 어긴 결과로 사망이 발생했는데 이를 정당화할 사유가 없는 경우 내려진다. 다시 말해, 이 참사는 단순 사고가 아니라 관할 경찰이 법을 어겼기 때문에 벌어졌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참사에 직접 관여되었거나 잘못된 소문을 퍼뜨린 경찰과 정치인, 언론인 등 관련자 중 개인적으로 처벌받은 사람은 없었다. 정의는 세워지지 못한 것이다. 책임자 처벌이 이뤄졌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정의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회적 참사와 같은 국가 폭력에서 책임자가 정당한 책임을 지는 것은 정의 회복의 지렛대가 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태원 참사 이후 한국 정부는 사법적 처벌만이 문제해결의 전부인양 수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구조에 전력을 다하던 소방관과 의료진까지 강도 높은 수사를 받고 있다. 그 과정에서 서울시의 안전지원과장과 용산경찰서의 정보계장은 숨진 채 발견되기도 했다. 정말로 책임이 있는 윗선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변죽만 울리는 수사를 하고 있다.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인사들은 요지부동이다. 도의적 책임과 정치적 책임은 외면하고 맹목적으로 사법적 책임만을 따지는 이들에게서 우리는 절망감을 느낀다. 그들은 응보적 정의를 무기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정의는 형사사법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정의의 문제를 사법의 틀 안에 가둬버리고 처벌 중심의 형식적 절차로 사건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정의롭지 못한 일이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는 참사를 낳는다
회복적 정의는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물러날 사람은 물러나고, 처벌받아야 할 사람은 처벌받아야 한다. 누구에게 어떤 잘못이 있었는지, 더 큰 책임이 누구에게 있었는지를 명확히 밝혀야 이토록 끔찍한 참사가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아직까지 그것을 하지 못했다. 여기에 더해 회복적 정의는 좀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왜 이런 참사가 벌어져야 했는가? 희생자와 유가족은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가? 국가 폭력이 벌어지는 것은 그 사회가 민주적이지 않고 불의하다는 걸 보여준다. 권력이 기득권화되어 불평등이 만연할 때 권력자들은 무능하고 무책임해지기 쉽다. 현상 유지를 위해 무리수를 던질 때 그들은 잔인한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국가적으로는 끔찍한 참사가 연달아 발생한다. 피해자는 힘없는 국민 대중일 수밖에 없다. 희생자와 유가족의 피해 회복을 위해 시급한 건 보상금 지급이 아니라 진상조사와 책임자들의 진정한 사과이고, 궁극적으로 사회 정의가 바로 서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정의롭지 않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회복적 정의는 사회 변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참고자료
김세정, <시사인>, “리버풀 팬들은 지금도 ‘더 선’을 보지 않는다”. (2022.11.11.)
최민영, <경향신문>, “힐즈버러 참사”. (2022.10.31.)
Michelle Ye Hee Lee, Meg Kelly, Atthar Mirza, Grace Moon, Min Joo Kim and Stefanie Le, <워싱턴 포스트>, “이태원 참사: 반복된 실수와 지연된 구조”. (2022.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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