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인지학과 자아의 문제 (2018. 7. 11.) 본문
인지학과 자아의 문제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인지학은 우리의 자아를 찾고, 강하게 하는 작업을 돕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어떤 과제를 갖고 있는가? 무얼 하며 살아야 하는가?’ 이런 물음에 합당한 대답을 찾기 위해 인지학을 연구하고 루돌프 슈타이너가 제시한 수행을 하다 보면 점점 자아가 강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 지점에서 경계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인지학을 지성혼 차원에서만 공부하는 것입니다. 인지학은 정신과학으로서, 정신세계를 과학적인 방식으로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다시 말해, 영성(spirituality)을 추구합니다. 영성은 지성 또는 이성과는 다른 차원의 경험을 요합니다. 지식을 축적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영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존재 자체가 변화하면 새로운 지식은 그 사람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것입니다.
인지학을 지적으로만 탐구하는 사람은 머리가 자주 아프고 상기가 되어서 얼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됩니다. 자칫 ‘영적 유물론’의 함정에 빠집니다. 지식을 소유하는 것으로서 또는 학위나 자격증 따위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기초적인 경력을 쌓는 건 필요한 일이지만 형식적인 권위에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이런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인지학을 앎에서 삶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알음알이로 끝나지 않도록 일단 행하고, 행한 뒤에 느껴봅니다. 욕구 앞에서 자신을 내려놓기, 무엇이든 마음을 모아 하기,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지 않기,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등을 일상에서 실천해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다른 하나는 기질론과 관련이 있는데, 자아가 강해지면서 점점 담즙질, 즉 여름 기질이 두드러지는 것입니다. 본래 다른 기질이었다 해도 자아가 강해지면 여름 기질의 특성이 많이 생깁니다. 자기 주장이 분명해지고, 의지가 확고해지며, 말과 행동에 지나치게 힘이 실리게 됩니다. 빛이 강하면 어둠도 강해지듯,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여름 기질의 단점이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의 비판을 잘 못 받아들인다거나, 의욕이 지나쳐 주변 사람의 삶을 침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처럼 강하지 않은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여름 기질의 특성이 당연한 것이 되고, 다른 기질적 특성은 열등하게 보입니다. 그러다 보면 에고로부터 해방되는 게 아니라 에고가 확장되는(또는 비대해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기 주장만이 옳고, 자기와 뜻을 달리 하는 사람은 틀렸으며, 자기를 최고라고 인정하는 사람만 곁에 두기 쉽습니다. 이런 모습은 자기 성찰이 결여된 리더의 비극적 최후와 같습니다.
인지학이 추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본질을 찾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거듭나기, 즉 죽고 거듭나 정신자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되었든 죽기 싫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제 뜻대로만 하려고 고집부리기 일쑤입니다. 보통 영적인 사람이란 자기 주장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단순하고 진실한 섭리에 따라 살아갑니다. 때론 용기있고 때론 겸손합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해 수많은 고통을 만나게 됩니다. 인격적 성숙은 늘 고통을 딛고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만의 고질적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지난 생을 거쳐 따라온 것일 수도 있고, 잘못된 신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또, 어린 시절 잘못된 양육방식에 의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된 이상 그것은 우리 자신의 책임 아래 있습니다. 이 문제를 회피한 채 살다 보면 여러 가지 고통이 그 본질적 문제를 일깨워 줍니다. 특히 아이를 낳아 기르거나,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되면 고통은 더 자주, 더 크게 다가옵니다.
사실 이 고통은 삶의 선물로서, 감사할 일입니다. 다리에 염증이 났음에도 아프지 않다면 얼마나 큰일일까요? 마음에 병이 있음에도 괴롭지 않다면 그 병은 시나브로 악화되어 우리를 우울의 늪으로 이끌 것입니다. 그러나 인지학은 종교가 아닙니다. 과학적 탐구를 요하는 학문입니다. 과학은 늘 훈련과 실천을 동반합니다. 거기에는 신비주의적 비약도 없고 사이비종교처럼 카리스마적인 교주도 없습니다.
자기 삶을 돌아보며,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 삶의 과제는 무엇이고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는 게 인지학입니다. 이 과정에서 자아가 강건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다만 자아가 정신적인 길에 들어설 수 있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말과 행위, 생각과 감정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생의 문지방에 걸려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2018.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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