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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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공화국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국가 폭력으로서 참사는 학살과 다르면서도 같다. 학살이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죽이는 행위라면, 참사는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을 국가가 죽음에 이르도록 내버려둔 행위이다. 뒤집어 보면 참사는 수동적인 학살이다. 국가를 이루어 살아가는 국민에게 학살이나 참사는 상상할 수 없는 재앙이다.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국가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안전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헌법을 위시한 법체계를 만들었고, 군과 경찰 등을 두어 안전을 도모한다.
그러나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근현대사는 학살과 참사로 점철되어 있다. 4.3과 5.18이 국가가 벌인 학살이라면 4.16(세월호)과 10.29(이태원)는 국가에 의한 참사이다. 이밖에도 노근리나 형제복지원, 씨랜드 같은 수많은 학살과 참사가 있었다. 삼풍백화점 참사(1995년), 대구지하철 참사(2003년), 가습기살균제 참사(2011년) 등은 여전히 기억에 생생한 대형 참사이다. 우리가 기념일을 제정해 그 끔찍한 사건들을 기억하는 것은 추모의 의미도 있지만 재발 방지의 의미가 크다.
그런데 왜 민주화 이후에도 이런 참사가 반복되는 것일까? 국가는 왜 어떤 국민을 죽이거나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일까?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우리는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국가가 불의하게 작동하는 것을 목격한 바 있다. 촛불혁명과 탄핵으로 정권교체를 했지만 피해 회복과 책임자 처벌은커녕 언론과 검찰, 보수정당의 방해로 인해 진상조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자고 목소리를 높였던 우리는 또 다시 이태원 참사를 겪게 되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경찰력이 미비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매년 이태원에서는 할로윈 축제가 벌어졌고 단 한 번도 이러한 압사 사고가 발생한 적이 없다. 예전처럼 교통기동대가 사전에 인파를 통제만 했어도 막을 수 있는 일이었다. 더 이상한 것은 당일 저녁부터 수많은 신고가 있었음에도 기동대가 끝내 출동하지 않았던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나오고 있지만 국정조사를 통해 진상파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사실상 우리 사회는 참사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다. 대규모 참사는 아니어도 날마다 노동자가 몇 명씩이나 죽고 있다는 현실에 언론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일을 하기 위해 출근한 우리의 가족이 하루에도 몇 명씩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다. 올해 1월부터 9월까지 산업재해 사망사고가 483건이나 일어나 510명이 숨졌다. 고용노동부가 집계한 ‘2022년 3분기 누적 재해조사 대상 사망사고 발생현황’에 따르면 산재 사망자 절반가량은 건설업에서 발생했다. 업종별로 보면 건설업은 243건의 산재로 253명이 숨져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제조업에서는 136건의 사고로 143명이 목숨을 잃었다. 기타업종에서는 104건의 사고가 일어나 114명이 숨졌다.
2018년 12월 10일, 당시 24세였던 김용균 씨가 화력발전소의 컨베이어벨트에서 사망한 이후 사업주와 경영책임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되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심지어 김용균 씨가 일했던 회사의 원청업체 대표는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낮은 운임으로 인해 과적, 과속, 과로에 내몰린 화물노동자들이 안전운임제를 확대해 달라며 파업을 벌였다. 화물차 사고로 연간 7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의 지배질서는 재벌 기업이 ‘그림자 정부’로서 막강한 힘을 휘두르는 상황으로 진입했다. 정치적 민주화가 어느 정도 성취되면서 지배 계급은 공안기관이나 경찰력보다 언론과 사법을 통한 질서 유지에 더 무게를 실었다. 가장 급격한 변화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찾아왔다. IMF 이후 우리 사회는 세계화, 시장개방,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노동시장 유연화 등으로 인해 경제적 불평등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심화되었다. 이제는 뚜렷한 계급 분화가 이루어졌다. 국민통합은 요원해졌고, ‘각자도생’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보수 세력이 집권했을 때 두드러지게 발생하는 사회적 참사는 계급적 차별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분단과 개발독재, 친일의 후예인 지배 계급에게 대다수 국민은 자기들과 똑같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대다수의 노동인구는 생활고와 인간 이하의 취급으로 살기 힘든 나라가 되어 가는 중이다. 공정하지 않게 취득한 부가 대물림되고, 학벌이 신분처럼 기능하며, 약자에 대한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경제 민주화와 사회 정의일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계급 차별이 지속되는 한 사회적 참사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필요한 정의는 어떤 모습일까? 변혁적 정의 또는 전환적 정의로도 불리는 회복적 정의 역시 이러한 과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회복적 정의는 단지 불의를 드러내고, 그 치유책을 발견하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새로운 불의가 어디에서 발생하는지, 정의로운 사회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성찰해야 한다.
참고자료
김동춘, <대한민국은 왜?>, 사계절, 2015
앤드류 울포드, 아만다 네룬드, <회복적 정의의 정치학>, 김복기, 고학준 옮김, 대장간, 2022
고용노동부, ‘2022년 3분기 누적 재해조사 대상 사망사고 발생현황’,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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