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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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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칼럼

대화의 예술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2. 10. 3. 11:40

대화의 예술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우리는 '대화'라는 것을 대체로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곁에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좋은 대화를 나누고 나면 정신적으로 고양되는 느낌을 받는다. 진실한 대화 속에서 우리는 고단한 삶을 위로받기도 한다. 그러나 대화를 해도 진심이 안 통하는 상대를 만나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말할 수 없이 답답해진다. 참을성이 다하면 의도치 않게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를 수도 있다. 좋게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가 상황이 더 나빠진 경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대화란 그리 간단치 않다.

 

대화는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는 행위이다. 화자 혼자서는 대화가 가능하지 않다. 반드시 청자가 있어야 하며, 청자는 화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흘려듣거나 자기 생각에 빠져서 제대로 듣지 못하면 대화는 지속될 수 없다. 따라서 듣기란 수동적 행위가 아니다. 이야기의 내용을 귀에 담으며 상대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적극적 행위이다. 이럴 때 비로소 공감이 가능해진다. 공감은 상대의 이야기를 내 마음의 체에 걸러, 그것을 돌려주는 일이다. 너무 거칠거나 불분명한 내용이라 해도 체에 거르고 나면 그 본심이 좀 더 분명해질 수 있다. 화자는 청자의 공감을 통해 자기 마음을 더욱 정확히 이해할 수 있으니 힘을 얻게 된다. 공감은 우리를 조금 더 깨어나게 하는 힘이 있다.

 

한 사람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자신이 경험한 일이나 마음속에 느낀 바를 털어놓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돈되지 않은 자기 마음을 말의 형식을 빌려 들려주는 것이다. 그렇게 털어놓아야 마음이 가벼워지고 정리가 된다. 그런 다음에야 다시 산뜻한 마음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어른이 되었음에도 내적으로는 아직 부족함이 많은 우리는 대화를 통해 상대가 내 마음을 알아주길 원한다. 이것은 존재의 존엄성을 확인받고자 하는 행위이다. 부족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미성숙한 사회에서 우리는 상처받기 일쑤이고, 상처받아 약해진 마음을 회복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을 추상적으로 말한다면, '사랑받고 싶다'일 것이다.

 

다 컸음에도 어린아이처럼 '조건 없이 사랑받고 싶은 마음',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기 존재의 존엄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고유한 자아를 지닌 정신적 존재로서 존엄하다. 지상에서 우리의 삶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이 아니다. 미성숙한 사회에서 미숙한 어른들에게 양육된 우리는 누구나 상처가 있고 부족함이 많다. 그러니 누군가 자기중심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다 해도 함부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 우리 자신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족하고 상처 많은 존재로서 우리는 또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간다. 자기도 모르게 상처 주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로 좌충우돌하며 어찌어찌 살아간다. 이따금 정신이 들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데 좀 더 나은 삶을 원하게 된다. 대화는 이러한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중요한 도구이다.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고 잘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어린아이들도 뭐든 잘 해내고 싶고 인정받길 원한다. 무시하고 조롱하면 아이들은 금세 울음을 터뜨린다. 하지만 존중하는 태도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칭찬할 부분은 칭찬해주면, 아이들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활짝 웃는다. 어른이라고 다를까? 좋은 대화는 이러한 인간 이해 위에서 가능하다. 인간은 누구나 똑같이 존엄하며 있는 그대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진실을 찾아가고자 한다. 부족함으로 인해 실수하고 잘못을 저지를 수 있지만 합리적으로 문제의 원인을 따져가며 공감받는다면, 어느 순간 성숙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사람이다. 우리는 모두 그런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다만 변화의 결과는 그 사람 자신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

 

삶의 주인은 그 사람 자신이다. 타인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줄 수도 없고 해결해주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그 사람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일이다. 심지어 사랑하는 자녀에게도 그러한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 사랑을 핑계로 대지만 결국 아이의 주체성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자신의 문제는, 힘들더라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타자는 문제 해결을 도와줄 뿐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수히 많은 문제를 겪게 된다. 작은 일부터 아주 큰 일까지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면서 살아간다. 따라서 대화를 한다는 것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또 듣는 일이다. 그런데 삶의 문제들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식하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어쩌면 지구는 우리 모두의 학교이고, 우리는 죽는 날까지 학생으로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호감과 반감을 오간다. 좋아하고 허용하는 마음에서 우리는 듣는다. 거부하고 닫힌 마음에서 말한다. 말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상대를 밀어낸다.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우리는 상대를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듣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듣기와 말하기 사이에서, 다시 말해 호감과 반감 사이에서 우리는 유연해야 하며 균형을 찾아가야 한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호감에서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의지가 나오고, 반감에서 자기만의 생각이 나오는 법이다. 그러니 자기 생각과 욕구, 그리고 그 사이의 감정을 잘 파악하여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뒤집어서 이해하면, 상대의 마음을 잘 알아듣기 위해서는 상대의 생각과 감정, 욕구를 구분하여 물어보고 공감하며 듣는 것이 중요하다.

 

감정은 생각과 욕구 사이를 오간다. 충족되지 못한 욕구가 부정적인 감정이 되기도 하지만, 왜곡된 사고방식은 더 많은 부정적 감정을 양산한다. 합리적이고 성숙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자기 감정을 부드럽게 가꿀 수 있다. 자기 욕구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차리는 사람은 요동치는 감정을 편안하게 다스릴 수 있다. 따라서 대화는 감정에 대한 공감으로 시작하되, 감정을 일으키는 생각과 욕구를 파악하는 것이 핵심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로 인해 어떤 감정이 드는지, 그렇다면 원하는 게 정말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고 듣는 것이 대화의 본질이며, 이것은 사실상 자아를 찾아가는 일이다.

 

아름다운 악기를 연주하고 그 연주를 감상하는 일처럼 대화도 예술이 될 수 있다. 이야기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마음이 사랑으로 연결되고, 두 사람의 자아가 환하게 깨어날 수 있다면 그것은 예술을 넘어 신성함의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다. 대화의 상대가 다른 어른이든, 어린아이이든, 아니면 자기 자신이든 우리는 진솔하게 마음을 표현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다. 대화의 주체가 존엄한 존재임을 잊지 않고, 대화 행위가 곧 사랑임을 깨닫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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