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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백년을 앞서간 웰빙 선구자, 팔방미인 루돌프 슈타이너 본문

루돌프 슈타이너

백년을 앞서간 웰빙 선구자, 팔방미인 루돌프 슈타이너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6. 9. 14. 08:11

노시내, <스위스 방명록>, 마티, 2015 (78~85)

 

백년을 앞서간 웰빙 선구자, 팔방미인 루돌프 슈타이너

 

괴테아눔은 과학철학수학문학농법건축회화교육 분야에 두루 팔방미인이었던 사상가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 1861~1925)가 직접 설계했다고 알려진 건축물이다. 팔방미인이었던 만큼 루돌프 슈타이너가 우리 생활에 미친 영향도 다방면에 걸쳐 있다. 괴테 연구자. 영적 체험을 중시하는 인지학 창시자. 대안의학 지지자. 바이오다이내믹 유기농법과 발도르프 대안교육의 창시자. 아방가르드 건축가.

 

사물을 유기적이고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그의 관점은 숨 가쁜 산업화와 근대화 속에서 혼란스러워하던 이들에게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주었고 한 세기 넘도록 사회 각 분야에 두루 영향을 끼쳤다. “사람은 용어와 관념으로 생각하듯 색깔과 형태로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와 같은 말을 남기기도 한 슈타이너는 동시대인 바실리 칸딘스키, 알렉세이 야블렌스키, 피트 몬드리안, 에드바르 뭉크, 그리고 20세기 중반 요제프 보이스를 거쳐 현재 활약 중인 얀 알버스, 아니시 카푸어, 올라프르 엘리아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미술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1861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였던 현 크로아티아 크랄예베치(Kraljevec)에서 철도 전신기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8세가 되던 해 가족이 오스트리아 빈 근교로 집을 옮겼고, 빈 공과대학에 입학해 수학과 자연과학을 전공하면서 빈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 강의를 들었다. 그러나 재정 문제로 학업을 마치지 못한 채 독일국민문학을 출간하는 잡지사에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자연과학 논문 담당 편집자로 취직한다. 이때 맺어진 괴테와의 인연으로 독일 바이마르에 설립된 괴테-실러 기록보관소에서 일할 기회를 얻게 되고, 괴테의 세계관에 내재된 인식론(1886) 괴테의 세계관(1887) 같은 논문도 발표한다. 그는 1891년 독일 로스토크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주요 저서 자유의 철학Die Philosophie der Freiheit을 출간한다. 1896년에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트 푀르스터-니체의 초대로 나움부르크를 방문해 니체 기록보관소 일을 돕는다. 이때 발작으로 거동할 수 없게 된 니체를 만난다. 이를 계기로 슈타이너는 니체, 시대에 맞선 투사라는 글을 발표하고, 자기 자서전의 일부를 니체에 관한 이야기에 할애하기도 했다.

 

니체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둠에 휘감긴 방안에 그가 누워 있었다. 그의 이마, 예술가이자 사상가의 이마가 아름다웠다. 이른 오후였다. 그의 눈은 멀어있는 듯해도 영혼을 드러냈다.” 이렇게 니체와의 만남을 묘사한 슈타이너는 그의 사상을 접한 감상을 이렇게 말한다. “나를 특히 매혹한 것은 니체의 독자가 니체에 의존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독자는 자신의 영적 깨달음을 주저함 없이 기쁜 마음으로 경험할 수 있으며, 그 경험 속에서 온전한 자유를 느낀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니체의 영원회귀와 초인 사상은 오랫동안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세기말을 특징짓는 자연에 대한 경직되고 제한적인 사고가 인간을 영적인 세계로부터 떼어낼 때 사람들이 느낄 수밖에 없는 인성과 진화의 핵심을 그 두 사상이 드러내기 때문이다.” 슈타이너를 사로잡았던 두 가지 화두, 자유와 영적 깨달음이 바로 니체의 사상 속에 담겨 있었다.

 

 

1897년 그는 괴테-실러 기록보관소를 떠나 베를린으로 옮긴다. 잡지사 편집자로 일하는 한편 노동자 교양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며 사회주의에도 잠시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뜨내기 삶과 가난에 지친 그가 위로를 구한 곳은 한때 멀리했던 기독교 신앙과 당시 독일 중상류 계급 사이에 크게 유행하던 신지학이었다. 신지학협회에서 니체에 관한 강연을 했던 인연으로 그는 보헤미안의 삶과 결별하고 심리적재정적 안정을 약속하는 신세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theos)의 지혜(sophia)에 관한 연구라는 의미의 명칭을 지닌 신지학(theosophy, 神智學)은 심오한 영적 실재가 존재하며 명상직관계시 등을 통해 이 영적 실재와 직접 접촉할 수 있다고 믿는 신비주의 뉴에이지 운동이다. 슈타이너는 세계신지학협회 독일지부 사무국장으로 활약했고, 그의 카리스마와 능변에 추종자가 급증했다. 1912년 신지학협회를 떠나 따로 인지학협회를 창립하고 스위스 도르나흐로 옮길 때도 독일지부 소속 회원 다수가 그를 따라나설 정도였다.

 

슈타이너가 아직 신지학협회에 있을 때 그의 강연을 들었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렇게 말했다. “테오도어 헤르츨을 만났던 이후로 실로 오랜만에 수백만을 인도할 운명을 타고난 또 한 명의 인간을 만났다. [] 그의 어두운 눈빛은 최면을 거는 힘을 지니고 있어 나로서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아야 비판적인 경청이 가능했다. 엄격하고 마른, 영적인 열정으로 가득한 그 얼굴에 설득되는 것은 여성들만이 아니었다. [] 문학밖에 모르는 우리와는 달리 엄청나게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고 있었다.

 

인지학(anthroposophy, 人智學)은 슈타이너가 신지학을 자기 관점에서 독자적으로 풀어낸 것으로, 모든 인간은 내면에 잠재된 정신적 지각능력을 계발함으로써 영적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 골자다. 정신과 영혼의 탐구를 통해 자연과학적 탐구를 보충발전시키고 문명의 3대 주요 영역인 과학예술종교의 간극을 이어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슈타이너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게 머리뿐 아니라 심장이 있어야 한다는 건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머릿속에 심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심장은 정신영감직관 예술적 감성에 대한 비유다. 그는 인지학을 정신과학 혹은 영적과학(Geisteswissenschaft)이라 부르며 영적인 요소의 도입을 통해 기존 자연과학의 패러다임을 바꾸고자 했다.

 

그가 인지학협회를 창설해 새 출발하는 중요한 시점에서 스위스를 그 본부로 택한 것은 우연과 편의에 따른 결정이었다. 먼저 점찍었던 곳은 뮌헨이었지만 건설법규가 워낙 까다로워 계획한 건물을 지을 수 없자 추종자였던 한 부부가 스위스는 법규가 느슨하다며 도르나흐에 소유하던 자기 땅을 기증했다. 슈타이너는 그 일대 토지를 추가로 매입해 괴테아눔 건설에 착수했다. 1913년에 착공된 이 원조 괴테아눔은 반구형 지분이 덮이 높이 26미터의 이색적인 목조건물이었으나 1923년에 누군가의 방화로 전소됐고 지금 남아있는 것은 콘크리트로 지은 2차 버전이다. 이것 역시 슈타이너의 작품이다.

 

부드러운 곡선형의 1차 괴테아눔과는 달리 밀가루 반죽을 엄지로 꾹꾹 누른 듯 불규칙한 오목면이 리듬 있게 이어지는 2차 괴테아눔은 슈타이너가 고향 빈과 베를린, 뮌헨 등지에서 표현주의 화가들과 널리 관계 맺었던 일을 근거로 표현주의 건출물로 분류되기도 한다. 또 다른 잠재적 방화범에게 마치 꿈도 꾸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는 거대한 투구 같기도 하고, 일본 판타지 만화영화에 등장하는 마법의 성 같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그는 자기 창작물의 완공을 보지 못한 채 1925년 숨을 거둔다. 현재 2차 괴테아눔은 역사적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도르나흐로 옮겨온 말년의 루돌프 슈타이너는 인지학을 여러모로 융성시켰다. 그는 사상가나 종교지도자일 뿐 아니라 사상과 신앙을 적용한 새로운 사업 개발과 이를 뒷받침하는 마케팅과 펀드레이징까지 능한, 거기다 미학적 센스까지 갖춘 만능 비즈니스맨이었다. 발도르프 학교의 탄생은 인지학을 교육 분야에 적용한 결과였다. 슈투트가르트의 어느 담배공장장으로부터 공장 노동자 자녀를 위한, 인지학적 관점으로 교육하는 학교 설립을 부탁받은 것이 계기였다. 그리하여 1919년 발도르프 학교가 처음 발족했다. 예술교육을 통한 감성 계발과 자유로움을 강조하는 발도르프 교육은 널리 공감을 얻었고 현재 전 세계에 수천 개의 발도르프 학교가 퍼져 있다.

 

대안의학과 유기농법도 슈타이너가 손을 댄 분야다. 자신의 추종자이자 연인인 네덜란드계 의사 이타 베크만(Ita Wegman)과 함께 괴테아눔 부근에 의료센터와 영적치유 학교를 설치하는 한편, 요즘 국내에서도 유아용 화장품으로 인기를 누리는 유기농 업체 벨레다(Weleda)를 공동 설립했다. 벨레다 제품에는 바이오다이내믹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작물에서 추출한 성분들이 원료로 들어가는데, 이 농법 역시 슈타이너가 창안한 것이다. 주기적으로 휴경기를 두어 땅을 혹사하지 않고 농약과 화학비료를 일정 사용하지 않는 것은 일반 유기농법과 같지만, 석영을 분쇄해 암소 뿔에 채운 특이한 조제물을 땅에 묻어두거나 달의 위상주기 변화, 달이 지나가는 별자리에 따라 심고 거둘 작물을 정해 우주의 신비한 힘을 토양에 전달한다는 특징이 있다. 슈타이너 본인이 직접 열거한 이 초자연적인 믿음이 담긴 상세한 지침에 관한 오늘날 과학자들 사이에 신빙성 논란이 있지만 효능면에서 다른 유기농법에 뒤떨어지지 않는 제품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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