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슈타이너의 오이리트미 본문
가미자와 카즈오, <20세기 무용사>, 국수호 옮김, 현대미학사, 2000. (117~119)
슈타이너의 오이리트미
슈타이너의 입장은 인지학에 근거한다. 인지학(人智學)에 기초해서 교육과 테라피(치료), 예술의 3분야를 전개하는데, 이 점이 예술무용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일본에는 고야스 미치코(子安美智子)의 『뮌헨의 초등학생』(中公新書)을 통해 창조성을 높이는 교육의 전형으로서 소개되어 수험평중의 주입식 교육에 대한 비판으로서 받아들여져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다카하시 이와오(高橋嚴)씨의 정력적인 소개에 의해서 철학으로서의 신지학(神智學)이 읽혀졌다. 마침 불교, 특히 밀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한편으로 ‘신체의 복권’이 주장되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와 신체적인 표출행위로서의 오이리트미가 받아들여질 기반은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다.
부토(舞蹈)파의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었던 카사이이(笠井)가 슈투트가르트에서 오이리트미의 제자가 된 것도 일본에서 오이리트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일본어에서는 그다지 볼 수 없지만, 서양에서는 신체와 발성기관을 병렬하는 습관이 있는 것 같은데, 그 한 가지 용례를 루돌프 슈타이너의 오이리트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슈타이너의 오이리트미는 인간이 말한다고 하는 것은 신체의 일부의 움직임이 아니라, 유기체 전체의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즉, 인간이라는 유기체 전체를 통한 운동과정이, 가슴이나 목구멍, 혀 주위에서 통제되어 언어가 된다고 한다. 이러한 전신운동에 기초한다면 신체언어로서 작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말이 신체운동 속에 용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판토마임이나 사물 흉내는 제외된다.
슈타이너는 영적인 존재가 살아 있었던 시대에는, 인식과 종교와 예술을 같은 원천에서 출발하여 고대의 제례나 의식 속에서 파생되어 나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오이리트미에서 현대의 생활에서는 잃어버리고 만 그러한 흐름의 통일을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무용이 모든 가능한 시도를 해보았기 때문에, 슈타이너는 언어가 수반된 것으로서의 움직임을 사용해서 무용예술을 창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로리 마이야 슈미츠는 직립의 움직임 속에서 ‘이(イ)’의 ‘뻗는’ 힘을 느끼고, 직립한 인간의 척추 중심을 뒤로 옮기는 움직임에서 ‘아(ア)’를, 앞으로 옮기는 움직임에서 ‘오(オ)’를 지각했다. 이 세 가지 기본화음이 정신의 생활로 침투한다. ‘아’는 세계에 대한 놀라움의 자기표현, ‘오’는 사랑에 찬 포용이다. 두 가지 방향을 함께 포함하는 ‘이’는 인간의 자기발견이라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방향이라는 것이 아폴론적, 디오니소스적(충동적이고 격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는 한 시대의 취미가 결집되어 생겨난 양식이 아닌, 어디까지나 신(神)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절대적인 무엇으로부터 부여받은 형식을 수용하는 것으로, 영적인 고양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儀式)에 가까운 것이다. 따라서 예를 들면, 카사이이가 무도파의 한 사람이었을 무렵 내부에 있어서 정화될 수 없는 것에 발을 내디딘 것과는 대극(對極)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카사이이에게서는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융합을 기대하지만, 그것은 본래의 오이리트미와는 원리가 다르다. 어쩌면 일본인의 손에 의해 직접 오이리트미의 현대화가 계획될지도 모른다.
카사이이는 일본 고유의 언어에 담긴 힘을 채용하면서, 자세의 형성력으로서의 리듬의 문제를 연구했다. 인류는 유연한 육체를 갖고 있던 인도기(India Peiode: 카사이이가 개념화한 기간) 전까지는 뻣뻣한 몸으로 춤을 추어야 했다. 그러나 중세에는 인간의 몸이 유연하게 되었기 때문에 발레에서는 다시 뻣뻣한 몸 만들기를 했다. 그리고 모던댄스는 또다시 유연한 몸으로 무용을 하고 있다. 그것이 디오니소스적인 표현주의와 결부되었다. 마리 뷔그만이 그러한 생각의 대표자이고, 그 일원이라고 볼 수 있는 라반은 유물론적 공간론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것은 확실히 현재의 무용에 있어 생각하는 계기를 주는 것 같다. 단지 라반의 유물론적 공간 이해는, 예술로서의 무용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망을 열어주고, 반대로 무용에 있어서의 오이리트미의 약점에 대한 방어적 반격이라고도 보여진다.
우선은 오이리트미가 어떻게 되어 가는가에 관심을 두면서, 예술로서 무용을 추구하는 입장과는 구별해 두기로 한다.
(책에서는 오이리트미Eurythmy를 ‘오이류트미’라고 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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