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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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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슈타이너

1913년의 루돌프 슈타이너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6. 9. 6. 12:29

플로리안 일리스, <1913년 세기의 여름>, 한경희 옮김, 문학동네, 2013

 

 

5월 초에 루돌프 슈타이너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쓴다. 전쟁의 위협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신경쓸 시간이 없다. 마침내 그는 인지학의 중심지, 이른바 요하네스바우를 지으려 한다.

 

뮌헨에 이 건물을 지으려던 계획이 최종적으로 건축위원회의 반대로 무산되자 슈타이너는 518일에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뮌헨은 사멸성을 지니고 있으니 이제 무조건 피해야겠다고 선언한다(뮌헨에 있는 서재에서 서구의 몰락을 집필하고 있는 슈펭글러가 이 말을 들었다면 기쁨에 환호성을 질렀을 것이다).

 

슈타이너는 이렇게 선언한다. 새로운 문화는 이 사멸해가는 곳에 결코 들어갈 수 없었다. 슈타이너는 이미 오래전부터 바젠 근교의 도르나흐가 꽃을 피울 장소라는 것을 예감했으나 아직은 너무 일렀다.

 

이제까지 인지학의 중심지는 베를린 모차르트슈트라세 17번지의 뒤채였다. 그곳에서 루돌프 슈타이너는 아내 아나, 충실한 그의 연인 마리 폰 지버스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가 고집한 일이었다. 그러나 물론 그런 생활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뒤채에는 온통 새 출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가구도 별로 없고, 탁자 두세 개에, 침대 하나와, 책들뿐이었다. 늘 어디선가 여비서가 레밍턴 타자기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늘 시간에 쫓기며 쉼 없이 강연 원고를 썼다. 그는 영혼과 세계의 상태에 관한 주제, 기독교에 관한 주제, 19세기 정신에 관한 주제의 글들을 몇 시간 동안이나 퇴고했다. 그와 나란히 그의 사무실은 온 유럽에 걸친 순회강연 계획을 짜느라 바빴다. 1913년에 슈타이너와 마리 폰 지버스는 한 해의 거의 3분의 2를 집 밖에서 보냈다.

 

슈타이너가 베를린에 있을 때면 이 대가로부터 조언과 깨달음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모차르트슈트라세를 순례했다. 며칠 동안이나 슈타이너는 사람들을 면담했다. 이상하게도 분위기는 별로 엄숙하지 않았다. 방문객들은 방석이 깔린 의자에 앉아 기다리다가 작은 방으로 들어가는데, 그 방에서 슈타이너는 방금 여행에서 돌아와 아직 풀지도 않은 트렁크들 사이에 앉아 있을 때가 많았다.

 

슈타이너는 모든 사람에게 감정이입하고 모든 사람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사람들은 모두 신경쇠약으로 위장한 염세주의에 빠져 있는 자신을 누군가 이해해주길 바란다. 헤르만 헤세도 구원을 얻으려고 슈타이너를 알현한 이들 가운데 하나이며 프란츠 카프카도 그중 하나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 로베르트 게른하르트 덕분에 이 두 사람의 짧은 만남이 어떠했는지도 꽤 정확하게 알려져 있다.

 

카프카가 루돌프 슈타이너에게 말했다. 당신들 가운데 아무도 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에 슈타이너가 말했다. 프란츠, 저는 당신을 전적으로 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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