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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처벌 말고 대화로… 모두가 만족하는 '회복적 대화' 본문
처벌 말고 대화로… 모두가 만족하는 '회복적 대화'
2020-10-14
가정·학교폭력 등의 경우에 더욱 효과적…피해자 92% 만족
김문귀 교수 "제도가 안정적으로 정착되기 위해서 법제화 필요"
지난 7월 19일 경북의 한 아파트에 거주하는 A(38)씨와 그녀의 딸은 위층에 사는 B(43)씨로부터 층간소음 문제로 심한 욕설과 살해 협박을 당했다. 사건 당일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A씨 모녀를 마주한 B씨는 “내가 언제까지 참아야 하느냐. 왜 살인이 벌어지는지 알겠나”라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들은 5년 전부터 층간소음 문제로 갈등을 겪은 사이였다.
신고를 접수한 경찰은 이들이 계속 이웃으로 지내야 한다는 점 등을 고려해 ‘회복적 경찰활동’이 필요하다고 보고, 전문가가 주재하는 회복적 대화로 해당 사건을 연계했다. B씨는 대화 과정에서 A씨가 평소 소음을 줄이고자 거실에 15㎝의 매트리스를 깔았으며, 초등학생 딸이 뒤꿈치를 들고 다니다 골반이 틀어지는 등 힘겨운 상황이라는 점을 깨닫게 됐다. A씨도 대화를 통해 B씨와 그의 동생이 새벽에 출근해야 하는 버스 기사라는 것을 알게 됐다.
회복적 대화를 마치고 B씨는 A씨에게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약속이행문을 작성했고, A씨는 B씨에 대한 처벌불원서를 작성해 경찰에 제출했다. A씨는 “회복적 대화를 제안받았을 때 무슨 효과가 있을까 망설였는데, 막상 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하고 좋았다”고 전했다.
검거와 처벌 위주인 현행 가해자 사법처리 시스템을 넘어서 피해자의 실질적 회복 및 가해자와의 갈등 해소 등을 목적으로 하는 회복적 경찰활동이 도입 6개월을 맞은 가운데, 사건 당사자들과 학계를 중심으로 긍정적 평가가 나온다.
14일 경찰청에 따르면 올해 4월부터 지난달까지 회복적 경찰활동 대상 사건 406건을 접수한 경찰은 이 중 349건에 대해 회복적 대화를 진행했다. 대다수의 회복적 경찰활동은 가해자와 피해자 및 이해관계자 등이 참여하는 대화모임의 형태로 시행된다.
회복적 대화 후 사건 당사자들 간 조정이 성립된 사건은 총 272건(78%)이었다. 경찰 단계(내사 종결 등)에서 119건이 종결됐고, 검찰과 법원에 ‘소년·가정보호 사건(36건)’, ‘공소권 없음(29건)’ 등으로 123건이 송치됐다. 30건은 수사 중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조정이 이뤄진 사건들을 대상으로 4개월씩 모니터링을 한 결과, 재범 사례는 없었다”고 말했다.
회복적 경찰활동은 재발방지 등을 위해 가·피해자의 대화가 필요한 사건을 경찰이 발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경찰은 해당 사건 관련자들을 대상으로 제도를 설명하고, 동의를 표한 경우에 한해 회복적 경찰활동 전담부서에 사건을 연계한다. 사건 관련자들은 절차 진행 전후 언제든지 참여 의사를 철회할 수 있다.
회복적 대화에는 경찰로부터 대화 모임을 의뢰받은 상담 전문가가 참여하며, 전문가는 가·피해자와 각각 사전모임을 가진 이후 본 모임을 진행한다. 본 모임에선 양측 모두에 충분한 발언 시간이 주어진다. 대화를 마치고 상호 간 약속사항 있을 경우 약속이행문을 작성하며, 경찰은 회복적 대화 과정을 참고해 사건을 종결하거나 대화결과보고서를 수사서류에 첨부해 송치한다.
회복적 경찰활동은 사건 관련자들이 꾸준히 관계를 맺고 지내야 하는 가정·학교폭력 등의 경우에 더욱 효과적이다. 지난 6월 말 서울의 한 주택에서 벌어진 20대 남매간의 살해 협박 사건의 경우, 회복적 대화를 통해 어린 시절 부모의 차별적 양육 태도가 갈등의 원인이라는 점이 드러났고, 온 가족이 함께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결과를 도출해냈다.
경찰이 회복적 대화 참가자(피해자 148명, 가해자 197명)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피해자의 92%가 대화 과정에 만족했고, 86%는 결과에도 만족했다고 응답했다. 가해자의 경우 89%가 과정에, 94%가 결과에 만족했다고 응답했다. 임형진 백석대 교수(경찰학) 연구팀도 회복적 경찰활동 시범운영 기간(지난해 4월∼10월) 대화에 참여했던 68명(가해자 42명, 피해자 26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회복 여부와 관련한 질문들에 대한 응답이 피해자 4.45(5점 척도 기준), 가해자 4.25로 나타났다는 연구결과를 지난달 말 발표했다.
다만 이 제도가 현장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선 경찰의 ‘민사관계불간섭 원칙’ 위반 논란 등을 막기 위한 법제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김문귀 호서대 교수(법경찰행정학)는 “회복적 경찰활동을 둘러싼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안은 바로 현행 형사조정제도 등과 같이 법제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강진 기자 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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