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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신뢰서클에 대하여 - 파커 J. 파머 본문

회복적 정의+비폭력 대화

신뢰서클에 대하여 - 파커 J. 파머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0. 11. 3. 05:35

신뢰서클에 대하여

 

파커 J. 파머

 

 

 

 

 

 

우리 시대에 가장 만연된 폭력의 형태 중 하나는 평화를 위해 싸우는 이상주의자들이 비폭력적 방식으로 폭력에 굴복하는 것, 즉 행동지상주의와 과로이다. 몰아닥치고 내리누르는 삶의 방식이 우리 시대의 가장 본질적인, 그리고 가장 흔한 형태의 삶의 방식일 것이다. 수많은 갈등과 문젯거리에 정신을 잃도록 자신을 내버려두는 것, 너무 많은 주변의 요구를 그대로 따르는 것,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프로젝트에 자신을 던져 넣는 것, 모든 사람의 모든 일을 도우려고 하는 것, 이런 것이 바로 폭력에 굴복하는 것이다. 행동지상주의자의 이러한 광기는 평화를 위한다는 그의 일을 중화시키며 그의 일이 열매 맺지 못하게 한다. 그 광기가, 일을 열매 맺게 하는 내면의 지혜를 그 뿌리부터 죽이기 때문에.

 

- 토마스 머튼

 

 

고독에서 신뢰의 서클로

 

머튼의 이야기에는 한 가지 교훈이 있다. 우리에게는 안전한 공간, 조용하고 고독한 공간이 필요하다. 그곳에서 안으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작동하게 하는 마음의 습관을 형성하 차원으로 가면 고독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에게는 낯선 사람들과 함께하는 작은 모임의 안전한 공간도 필요하다. 이곳에 와서 시민들은 지역과 일터 그리고 더 넓은 세계에서 마음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것의 도전을 탐구할 수 있다.

 

다행히 그런 공간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타인과 함께 자신의 마음을 회복하고, 연습하고, 개방할 수 있는 공간들이 있다. 우리는 그 자리에 모여서 서로에게 더 잘 연결되고, 민주주의의 긴장을 창조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이렇게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는 까닭은, 지난 20년 동안 '용기와 회복을 위한 센터(Center for Courage & Renewal)'라는 비영리 조직을 통해 미국 전역에서 점점 더 많은 동료와 그런 공간을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이 센터의 임무는 “개인적이고 직업적인 성실성에 따라서 행동할 용기를 키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단은 '신뢰의 서클'이라고 불리는 접근이다. 이 모임의 전형적인 모습은 특별히 조성된 프로그램과 피정에서 내면의 여행을 함께하는 20~25으로 구성되고, 일 년 또는 그 이상의 기간 동안 정기적으로 만난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까지 우리가 직접 모임에서 만난 사람은 4만 명 가까이 된다. 그들의 배경은 실로 다양하다. 공교육 교사와 지도자, 대학교수와 행정가, 의사와 다른 보건 전문가, 기업과 비영리 조직의 지도자, 성직자와 평신도 지도자, 성직자와 평신도 지도자, 변호사, 자선사업가 등이다. 센터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그들은 모두 직장에서 “영혼과 역할의 재결합을 추구한다. 직장은 마음의 습관이 형성되는 핵심 장소 가운데 하나로, 프로그램 참가자들은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나는 신뢰의 서클에 대해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에서 상세하게 설명했고, 센터의 프로그램―민주주의와 마음의 습관에 관련된 프로그램을 포함해서―에 관한 정보는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모임이 작동하는 이론과 실제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다루지 않겠다. 그 대신, 이런 모임 그리고 이와 비슷한 절차들이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자신의 가장 깊은 가치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상황에 우리가 어떻게 직면할 수 있는지, 그 긴장의 에너지를 활용하여 세계의 일부를 어떻게 변형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의사들의 모임을 진행하고 있었을 때, 어떤 사람이 유난히 괴로워하는 듯했다. 3일 동안 진행된 피정의 첫 4개 세션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는 귀를 쫑긋 세우면서도 정작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오간 이야기는 직장에서 부딪치는 가치의 갈등에 관한 것이 주를 이루었다. 나는 5번째 세션의 어느 지점에서 그룹 전체를 향해 말했다. “침묵의 시간으로 들어갑시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을 모임의 중심을 향해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말한 것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우리 사이에 있는 공간을 향해 말씀해주세요."

 

잠시 뒤 침묵을 지키던 그 의사가 입을 열었다. 천천히 그리고 간단하게 말했다. 꺼내기 어려운 진실을 말하려 할 때 흔히 그렇듯이 말이다. “내가 일하는 보건 시스템의 규정은 내가 일주일에 두세 번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위반하도록 몰아갑니다.” 이 말은 잠시 허공에 떠 있었다. 신뢰의 서클 참가자들은 침묵을 신뢰하고, 응원이나 비판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그는 다시 말했다. “나는 이것을 직장 동료에게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어요.” 침묵이 더 길게 이어졌다. 그는 다시 말했다. “사실 지금 이 내용은 방금 내 자신에게도 처음 말한 것입니다.”

 

그 순간의 의미를 누구도 놓치지 않았다. 우리는 방금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의 깊은 진실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봤다. 또 그 밑에서 발견한 것을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신과 나누기 위해 다시 수면으로 올라온 모습을 목격했다. 우리는 자신의 가장 깊은 사명감과 직장의 요구 사이의 모순영적으로 자신을 위협하고 육체적으로 환자를 위협하는을 끌어안는 사람을 봤다. 그는 자신의 주의를 요구하고 어쩌면 삶을 바꾸어 줄지도 모르는 그 긴장을 말로 표현했다. 그러나 에두르지 않고, 그 한가운데로 곧장 걸어 들어갔다.

 

이 작은 이야기는 민주적인 마음의 습관창조적으로 긴장을 끌어안는 습관으로서, 우리의 일터 그리고 공적이고 정치적인 삶을 변형시킬 수 있다을 키우는 데 필요한 안전한 공간에 관련해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신뢰의 서클에 형성된 어떤 조건이 진실을 말하는 결정적 순간을 가능하게 했는가?

 

우리가 모임에서 행하는 모든 것은 각 사람 안에는 자신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어하는 내면의 교가 있다는 가정에서 이뤄진다. 우리 대부분이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유는 적어도 두 가지가 있다. 주변의 소음과 내면의 소음이 그것이다. 피정에서는 소음을 내는 모든 것을 끄고, 정직한 발언만큼이나 침묵도 환영하는 공간에 모여 앉는다.

 

이 침묵으로부터 떠오르는 말은 의미와 목적을 가진 질문을 통해 유발된다. 내면의 삶과 외면의 삶 사이의 관련성을 탐구하도록 이끄는 질문으로서, 내면의 교사의 관심을 끄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 질문은 시, 이야기, 음악, 예술 작품 등이 제공하는 맥락 속에서 나오는데, 그런 재료를 통해 도전적인 주제에 간접적이고 은유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삶의 가장 커다란 쟁점을 다짜고짜 직설적으로 제기하면 내면의 목소리는 침묵해버린다. 우리는 “진실을 말하라. 하지만 빗대어 말하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조언을 따른다.

 

어려운 질문을 참가자들이 탐구할 수 있도록 초대함으로써, 우리는 진실을 말하는 내면의 목소리, 그 의사가 들었던 그 목소리가 허용되는 조건들을 창조한다. 이러한 조건들은 영혼의 공간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간단한 규칙 몇 가지로 보장된다.

 

 

피정에서 제공되는 모든 것은 초대이지 요구가 아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만큼만 반응한다.

 

다른 사람을 교정하거나, 조언하거나, 구제하거나 바로잡으려는 모든 시도를 금지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열린 마음으로 자유롭게 말하고 경청할 수 있다.

 

서로에게 조언을 하는 대신, 우리는 상대방을 경청함으로써 그가 더욱 깊은 대화 속으로 들어가고 자기 나름의 내적인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정직하고 열린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침묵을 신뢰한다. 그것이 우리의 대화 아래 깔리고 대화 안으로 스며들도록 허락한다.

 

피정 기간에 이야기된 모든 것에 관해서 절대 비밀을 지킨다.

 

 

이런 규칙들로 창조된 공간에서 갈등에 빠져 있던 그 의사는 본질적인 진실이 완전한 의식으로 떠오르도록 할 수 있었다. 그 공간이 지니고 있는 초대의 원리 덕분에, 그는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오랫동안 침묵 속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비슷한 딜레마로 씨름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말이다. 조언을 금지한 덕분에, 그는 자신의 말이 몇 가지 간편한 언급으로 교정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경청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진실을 말할 수 있었다. 모임이 침묵을 신뢰한 덕분에, 그는 망설임으로 한 발자국씩 내딛었고 결국 가장 중요한 청중에게 말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이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내면의 교사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내면의 교사의 말이라고 믿는 것을 시험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안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전부 진리의 소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시험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우리가 맞는지 틀리는지를 말해준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분별보다는 부질없는 논쟁이나 줏대 없는 순응으로 이어지기 쉽다. 신뢰의 서클 같은 형태의 시험은 판단하지 않은 채 말하고 들으면서 천천히 인내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확신을 주는 것, 자신에게 도전하는 모두를 받아들이면서 “진실의 태피스트리"를 함께 짜는 것이다. 그 속에서 각자는 자기 나름의 깊이와 속도로 개인적인 진실을 헤아릴 수 있게 된다.

 

바로 그것이 고민에 빠진 의사가 했던 일이다. 동료들이 자신의 윤리적 딜레마를 탐구하는 것을 들으면서, 자기 내면의 교사를 위해 안전하게 열린 공간에서 자신의 딜레마를 조용히 성찰한 것이다.

 

 

서클의 힘

 

그 의사는 이 모임이 없었다면 자신의 진실을 결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자신에게도 숨겼을지도 모른다. 그가 스스로 위기를 느꼈던 윤리적 절벽에 대해 안으로부터 들려오는 속삭임을 들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괴로워하는 모습으로 피정에 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운 진실을 자기 머릿속에서만 계속 회전시킨다면 끝없고 둥그런 폐쇄회로에 갇 혀버리기 쉽다. 자신에게 조용하게 말해진 진실은 우리를 어느 곳으로도 데려갈 것 같지 않다. 그 진실을 무시하거나 물리쳐버리거나, 또는 그 진실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기는 너무나 쉽다.

 

그러나 안전한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딜레마를 탐구하고, 그들의 딜레마를 탐구하는 것을 들을 때, 우리의 내적인 대화는 신선해지고 예리해진다. 그리고 점점 진실에 가까워지며 더욱 알찬 결실을 맺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진실을 말할 때, 그렇게 말한 것을 잊거나 부정하기는 어려워진다. 그리고 그 함축된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 것이 어려워진다.

 

계속 진행되는 신뢰의 서클에서 우리는 자신의 진실에 대해 책임감이 더 강해질 뿐 아니라, 직장에서 자신의 성실성을 어떻게 증언할지를 상하고 실행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자신을 지지하는 커뮤니티에 참여하는 동안에 직장에서 작은 실험을 수행할 수 있다. 그리고 모임으로 돌아와 자신의 성공과 실패를 내어놓고,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 경험으로부터 뭔가를 배울 수 있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가 도달하는 내적인 책무가 바깥 세계에서 표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자신의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위태로워졌다는 것을 인정한 그 의사는 일터로 돌아가 한두 명의 신뢰하는 동료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만이 그런 염려를 하는 것이 아님을 발견했다. 마치 모임에서 처음 진실을 말했을 때 혼자가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자신이 비슷한 영혼에 둘러싸여 있음을 알게 될 때, 제도 변화에 필요한 상상력, 용기 그리고 집단의 힘을 모으기 시작한다.

 

이 모든 것은 “민주주의의 마음을 치유하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관련이 매우 많다. 우리가 하루 중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터는 마음의 습관이 형성되거나 망가지는 전 정치적인 공간 가운데 하나다. 그 인간적 규모의 장소에서 상호 존중과 신뢰, 열린 경청과 용기 있는 발언, 공동선을 위한 개인적·집단적인 노력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터에서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방식은 좋든 나쁘든 더 큰 사회로 종종 흘러넘친다.

 

금융 산업에서의 히포크라테스 선서, 즉 투자를 하고 금융 상품을 구매한 사람들에 대한 신용적 책임감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좀 더 많은 종사자가 직시했다고 가정해보자. 직장에서 그런 종류의 시민적 결단이 이루어졌다면, 많은 금융인이 다른 사람의 이익보다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는 바람에 직업과 집을 잃어버린 미국인은 줄어들었을 것이다. 공교육에서의 히포크라테스 선서, 즉 자신에게 맡겨진 아이들에게 가져야 할 윤리적 책임감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좀 더 많은 교사가 직시했다고 가정해보자. 직장에서 그런 종류의 시민적 결단이 이루어졌다면, 아이들의 실질적 필요를 고려하면서 고부담 시험의 왜곡에 더욱 효과적으로 도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훌륭한 시민이 된다는 것은 제도 정치의 세계에 어떻게 참여하느냐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삶의 모든 수준에서 시민적 역할을 수행한다.

 

사람들이 동료 집단 안에서 “개인적이고 직업적인 성실성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키우도록" 북돋는 것은 민주주의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내딛는 중요한 한 걸음이다. 그러나 신뢰의 서클은 행동이 일어나는 곳으로 향해 가는 길의 일부분일 뿐이다. 이 모임들의 위상은 무엇인가. 한쪽에는 조용하게 집중하면서 안으로부터 들려오는 뉴스를 접할 수 있는 “수도원의 독실(獨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민주주의의 무거운 향상이 이뤄지는 공적이고 정치적인 세계의 시끄럽고 번잡하며 우악스러운 공간들이 있다. 신뢰의 서클은 그 사이에 있는 중간 기착지다.

 

자신의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관한 진실을 결국 스스로에게 말했던 의사는 정치적인 행동의 일보 직전까지 이르렀지만, 직접 행할 순 없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이 세상에는 신뢰의 서클과 정신적으로 비슷한 근원적 민주주의의 공간들이 존재하는데, 그곳에서 활짝 열리는 정치적인 문으로 사람들은 지나갈 수 있다. 역사는 그런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실제 세계에서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빚어내는지를 보여준다.

 

 

 

 

[출처 : 파커 J. 파머, 김찬호 옮김,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 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가>, 글항아리, 2012, 251-2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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