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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인지학에 따른 발도르프 한글교육을 위하여 (8) 본문

발도르프교육학/발도르프 국어교육

인지학에 따른 발도르프 한글교육을 위하여 (8)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4. 7. 14. 23:29

인지학에 따른 발도르프 한글교육을 위하여 (8)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우리가 정확하게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이갈이가 마무리되는 연령대에서 아이가 판타지 생명으로, 지적 생명이 아닌 판타지 생명으로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때 여러분은 교사로서, 교육자로서 아이가 그런 변화를 이루어갈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판타지 생명을 실현시킬 수 있으려면 자기 영혼의 내면에서 진정으로 사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발도르프 교육예술>, 37.

 
"이갈이가 끝나갈 때 아이가 어떻게 상상의 삶으로 넘어가는지, 그 과정을 정확하게 알아보는 것이 관건입니다. 아이는 이성의 삶이 아니라 상상의 삶으로 건너갑니다. 거기에서 교사로서 여러분 역시 상상의 삶을 발달시켜야 합니다. 영혼 내면에 진정한 인간 인식을 지니는 사람은 상상의 삶을 발달시킬 수 있습니다."
 

<7~14세를 위한 교육 예술>, 50.

 
슈타이너는 1924년 영국 토키에서 행한 강연에서, 우리가 인간을 올바로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의 내면은 다시 살아나고 얼굴에 미소가 지어진다고 말합니다. 아이에게 화를 내고 인상을 쓰는 등 불만으로 가득 찬 삶은 인간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로 가득한 영혼의 가장 깊은 내면이 겉으로 드러나는 얼굴이야말로 교사로 하여금 진정한 교육자가 되도록 합니다." 이 말이 꼭 교사에게만 해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위 글에서 이갈이가 마무리 또는 끝나간다는 것은 유치가 빠지고 영구치가 나오는 만 7세 즈음을 의미합니다. 보통 서구에서는 6세 가을, 동양에서는 7세 봄에 입학식을 합니다. 1학년 교육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 중 하나가 글자를 배우는 것이므로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또는 가정에서 미리 글자를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글자에 대한 아이의 흥미를 저해하여 막상 학교에 가서는 수업에 잘 참여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 완전히 낯선 것이라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알파벳(손으로 쓴 것이나 인쇄된 것 어느 쪽이라도)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아이는 A라는 철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아이가 A라는 철자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 심지어 가정에서는 이갈이가 시작되기도 전에 아이에게 그런 것을 가르치려고 갖가지 형태의 알파벳을 하나씩 떼어 아이의 머리에 집어넣으려 합니다. 아이에게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고 아무 관계도 없는 것들을 들이대며 가르치겠다는 것입니다."
 

<발도르프 교육예술>, 38

 
"아이한테 완전히 낯선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 필기체든 인쇄된 활자든 오늘날의 문자에 내재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ㄱ' 같은 것과 어떤 관계도 형성하지 않습니다. 무슨 이유로 'ㄱ' 같은 것과 관계를 쌓아야 합니까? ...... 게다가 이갈이를 하기 전에 아이에게 이런 것을 가지고 달려들면, 종이에 문자 모양을 오려 낸 다음에 같은 모양의 문자를 찾아서 집어넣도록 시키면, 완전히 낯설고 전혀 관계없는 것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7~14세를 위한 교육 예술>, 51-52

 
이 시기 아이들이 (지적 삶이 아닌) 상상의 삶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논리적 사고가 아닌 형상적 사고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상 또는 그림으로 사고를 하기 때문에 교사는 그림으로 수업을 해야 합니다. 발도르프학교에서 문자교육을 그림으로 접근하는 이유가 바로 그렇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본래 예술적 감각, 의미를 그려내는 상상력이 있습니다. 1학년의 모든 수업은 바로 이 능력을 자극하고 활용하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독일어의 '입'(Mund 문트), 영어로 'mouth'라는 낱말을 예로 들어 봅시다. 교사가 아이에게 입을 그림으로 표현하도록 하면서 빨강물감도 사용하게 하고, 아이에게 그 낱말을 소리내어 보도록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 Mund라는 낱말을 다 말하지 말고, 우선 M으로 시작합니다. 윗입술을 천천히 M자 모양으로 만들면(그림 참조), 우리가 그린 그림처럼 입에서 M이라는 발음이 나옵니다.'"
 

<발도르프 교육예술>, 39

 
"'입mund'이라는 단어를 봅시다. 영어에서는 'mouth'입니다. 아이에게 입이라는 단어를 쓰도록 합니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듯이 쓰게 합니다. 공책에 빨간색을 약간 칠해서 입을 그리게 한 다음에 단어를 말하게 합니다. 단어 전체가 아니라 단어의 시작 부분을 음(M)만 발음하게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림의 윗입술(그림 참조)이 차츰차츰 M 모양을 띠도록 합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입을 그렸는데 그것에서 M이 나옵니다."
 

<7~14세를 위한 교육 예술>, 53
 

 
"'물고기'(Fisch 피시, 영어의 fish)라는 낱말을 예로 들어 봅시다. 아이에게 물고기 한 종류를 그리고 색칠해서 표현해 보도록 합니다. 그리고 낱말의 첫 부분인 'F'를 발음해 보게 합니다. 그러면 그 그림에서 점점 'F'가 나타납니다."
 

<발도르프 교육예술>, 40

 
"'물고기Fisch', 영어의 'fish'를 예로 들어 봅시다. 아이한테 소묘하듯이 물고기를 그리게 합니다.(그림 참조) 그 다음에 단어의 첫 부분인 F를 말하게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물고기 그림에서 차츰차츰 F가 나오게 합니다.
 

<7~14세를 위한 교육 예술>, 54
 

 
중국의 한자뿐 아니라 서양의 알파벳 또한 상형문자에서 출발했습니다. 대상물을 생각나게 하는 그림을 문자로 그렸던 것입니다. 이렇듯 그림으로 접근하면 아이들은 아주 편안하게 문자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교사의 상상력이 풍부하다면 이렇게 자음마다 해당하는 그림을 상상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굳이 문자의 문화사를 공부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슈타이너의 조언입니다. 주변의 사물에서 그림을 가져오면 되는 것이고, 거기에는 문자에 대한 이론적 지식이 아닌 교사의 자유롭고 살아 있는 상상력이 필요할 뿐입니다. 
 
한글은 한자나 알파벳과는 문자로서의 성격이 상당히 다릅니다. 한글의 자음도 조음 기관을 본뜬 그림이긴 하지만 상형문자로서의 성격보다는 음운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글의 자음은 기본 글자 다섯(ㄱ ㄴ ㅁ ㅅ ㅇ)에 한 획씩 더하는 방식으로 글자를 생성하여 그 글자들이 계열화를 이루게 하였습니다. 예컨대 연구개음(여린입천장소리)인 ‘ㄱ’에 획을 더해 같은 연구개음이되 거센소리 글자인 ‘ㅋ’을 만들고, 입술소리인 ‘ㅁ’에 획을 차례로 더해 같은 입술소리이되 새로운 자질(資質)이 더해진 ‘ㅂ’과 ‘ㅍ’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 점은 로마 문자와 비교해 보면 한글에 함축된 음운학 지식이 얼마나 깊고 정교한지 금세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이나 잇몸에 혀를 댔다 떼면서 내는 소리들을 로마 문자로는 ‘N, D, T’로 표시하지만, 이 글자들 사이에는 형태적 유사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한글은 이와 비슷한 소리를 내는 글자를 ‘ㄴ, ㄷ, ㅌ’처럼 형태적으로 비슷하게 계열화함으로써, 이 소리들이 비록 자질은 다르지만 소리나는 곳은 같다는 것을 한눈에 보여 줍니다. 이 말은 이미 한글 창제자들이 음소(音素) 단위의 분석에서 더 나아가, 현대 언어학자들과 같이 음소를 다시 자질로 나눌 줄 알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 한글을 배우는 아이들에게 이러한 음운학적 특성을 바탕으로 수업을 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발달특성상 1학년 아이들은 상상력이 풍부한 그림으로 문자를 배워야 합니다. 1학년 교사는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에 해박해야 할 이유가 없고, 그보다는 자음 하나 하나에 상상력을 부여해 생동감 있는 그림으로 제시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요근래 '발도르프 훈민정음'이라는 괴이한 조어가 한글교육 운동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온 글, 한글>이라는 책과 관련 서적들, 그리고 '정음한글연대'라는 단체의 영향이 커보이는데, 왜 한글을 발도르프 교육의 방식으로 가르치면서 한글의 제자 원리를 알아야 한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연-소리-음운-문자-과학적 인식을 연결하는 최고의 문자를 이미 갖추고 있으나, 그 제자 원리와 의미를 충분히 살려 교육하지 않음으로써 한글이 가진 문자의 효용을 아직 백분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 원래 창제의 의미를 되살려 정음의 제자 원리를 익히면 글자의 형태에서 곧바로 뜻을 도출할 수 있고, 동시에 지시 대상에 대한 음가도 어떤 문자보다 확장성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온 글, 한글>, 43-45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야 개인들의 자유겠지만, 이러한 접근은 최소한 1학년의 발달단계에 맞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 이전(영유아기)에 이런 식으로 한글을 도입하는 것은 발달특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일입니다. 슈타이너가 계속해서 언급하는 것처럼 문자는 아이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문자라는 것은 철저히 인간들의 협약에 의해 만들어진 기호이고, 정신세계에서 내려온 정신존재로서 어린아이에게 문자는 낯선 것입니다. 그러니 지적인 추구를 내려놓고 상상력과 그림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코 문자교육을 이갈이 이전에 서둘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와서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이런식으로 하면 아이들이 읽기와 쓰기를 너무 늦게 배우게 됩니다"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건 아이가 쓰기, 읽기를 일찍 배우는 게 얼마나 해로운지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일찍 쓸 수 있게 되는 것은 아주 나쁜 일입니다. 요즘 우리가 하는 식의 읽기와 쓰기는 좀 더 늦은 나이에, 즉 만 11세나 12세에 배워야 합니다. 그 이전에 읽기와 쓰기를 배우지 않도록 배려를 받을수록 훗날의 아이에게는 더욱 바람직합니다."
 

<발도르프 교육예술>, 43

 
"그러면 사람들이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다 좋은데, 아이들이 읽기와 쓰기를 너무 늦게 배울 것이다.' 아이들이 이른 나이에 읽기와 쓰기를 배우면 얼마나 해가 되는지 요즘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합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벌써 글씨를 쓸 줄 안다는 것은 굉장히 유해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읽기와 쓰기는 좀 나이가 든 아이들, 그러니까 10~12세 아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그 나이가 될 때까지 읽기와 쓰기를 완벽하게 배우지 않아도 되는 복을 받는다면, 나중의 인생을 위해서 훨씬 더 낫습니다."
 

<7~14세를 위한 교육 예술>, 58

 
발도르프 교육을 표방하는 유아교육기관에서도 '발도르프 훈민정음' 또는 '발도르프 한글놀이'라는 이름으로 쓰기와 읽기를 가르치는 한국의 현실에서 뼈 아프게 들어야 할 조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에서 비슷한 취지로 조기교육을 시키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발도르프 교육의 정신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면서 '발도르프'라는 이름을 가져다 붙이는 것은 너무나 기만적인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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