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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깜깜이 ‘학폭위’… 무능한 ‘재심위’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3. 19. 00:16

깜깜이 ‘학폭위’… 무능한 ‘재심위’


깜깜이 ‘학폭위’… 무능한 ‘재심위’

교장 성향 따라 처분 다르고 재심기관 별도 운영으로 같은 사안 다른 결론


#사례1. A는 교내에서 집단따돌림을 당했다. 아이들은 A가 떨어진 물건을 주워주면 “더럽다”며 쓰레기통에 버렸다. 일부러 부딪힌 뒤 “더러워”, “오염된다”고 했다. A의 개인적 문제가 교내에 퍼지면서 아이들의 표적이 된 것이었다. 아이들은 익명 질문사이트에 A를 특정한 각종 험담과 욕설을 기재하거나 조별과제 모임시간도 제때 전달하지 않았다. 수개월간 학교폭력 피해를 입은 A는 부모에게 피해사실을 알렸고, 9명의 학생이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에 가해자로 회부됐다. 그러나 학폭위는 “학교폭력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전원 ‘조치없음’ 결정을 했다. A의 부모는 학교의 결정에 불복, 지역위원회에 재심을 신청했다. 결과는 기각이었다. 학폭위의 결정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중앙행정심판위원회의 판단은 달랐다. 중앙행심위는 지역위원회의 재심 기각 결정을 취소하고 다시 판단하라고 재결했다. ‘더럽다’ 등의 발언을 친구들로부터 빈번하게 듣는 것은 여중생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을 넘는 심리적 피해를 가져올 학교폭력이라고 판단했다. 특히 가해학생들이 A를 상대로 남겨놓은 각종 욕설과 글 등을 확보하고도 학교가 학교폭력 해당 여부를 판단하는 근거로 사용하지 않은 점 즉,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가해학생들에게 ‘조치없음’ 처분을 내린 것은 잘못된 판단이라고 지적했다. 피해학생이 학폭위를 거쳐 지역위원회, 중앙행심위까지 거쳐 학폭위의 판단이 잘못됐다는 결론을 얻어내기까지 걸린 기간은 10개월이었다.


#사례2. 올해 한 초등학교에서 성폭력사건이 발생했다. 다수의 남학생이 여학생 한 명을 상대로 저지른 ‘범죄’였다. 남학생들은 사건 발생 이후에도 여학생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협박을 가했다. 여학생의 부모는 학교에 피해사실을 신고했다. 학폭위가 열렸다. 일부 ‘조치없음’, 일부 ‘서면사과(학교폭력예방법 제17조 1항 제1호 처분)’가 전부였다. 여학생의 피해사실 주장과 다수의 가해자인 남학생들 간의 주장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여학생이 피해를 입은 날 일기장에 구체적으로 작성해 놓은 피해사실조차 가해 인정 증거로 활용되지 못했다. 여학생 측은 회의록 공개를 요청했지만 빈 칸만 남은 종이 몇 장이 전부였다. 위원들의 민감한 발언 등이 공개되면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 현재 이 사건은 피해학생 부모의 재심 청구에 따라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누구도 만족 못하는 괴물로 변한 학폭위


학교폭력 피해자를 구제하고, 가해학생에 대한 적절한 교육적 처벌을 목표로 만들어진 학폭위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거세다. 학폭 책임교사를 비롯한 일선교사들은 각종 대안 마련을 촉구하고 있지만 교육부는 “법개정 사안”이라는 핑계로 이미 괴물처럼 변해버린 학폭위를 제대로 손도 대지 못하고 있다. 학폭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소위 ‘양형기준’과 ‘판례’가 없다는 데 있다. 또 모든 회의가 사실상 ‘깜깜이 회의’다. 어떤 논의가 이뤄졌고, 어떤 사유로 처분이 내려졌는지를 공개하지 않는다. 때문에 사실상 학폭위를 주도하는 학교장의 의지나 재량에 따라 유사한 사안이라도 ‘조치없음’·‘서면사과’에서부터 ‘강제전학’·‘퇴학’까지 자의적인 판단이 가능한 상황이다. 교육부 차원에서 ‘양형기준표’처럼 항목별로 점수를 부여해 최종 처분을 내리는 점수제도를 마련했지만 이 역시 자의적으로 운영되고 있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가해자도, 피해자도 학폭위의 처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재심을 청구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문제는 재심절차가 지나치게 복잡하고, 재심에서 학폭위의 잘못된 판단을 제대로 걸러내지 못해 지속적인 ‘소송비용’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현재 가해학생이 학폭위 처분에 불복할 경우 학교폭력예방법 제17조 제1항 제8호 처분(강제전학) 및 제9호 처분(퇴학)은 시·도교육청 학생징계조정위원회에 재심을 청구해야 한다. 1호(서면사과)~7호(학급교체) 처분을 받은 경우에는 시·도교육청 행정심판위원회에 재심 신청을 하도록 하고 있다. 처벌수위에 따라 재심기관이 나뉘는 것이다. 반면 피해학생이 학폭위의 처분결과에 불복할 경우 시·도 지역위원회에 재심을 청구해야 한다. 같은 학폭위 사안을 놓고 처벌수위 및 가해·피해 여부, 국·공립이냐, 사립이냐 등에 따라 재심 결정을 내리는 기관이 지나치게 분리 운영되고 있는 셈이다.



지역위원회 한 건 처리 시간 15분 불과


기관이 나뉘어서 운영되다 보니 각 재심기관 간의 ‘충돌’ 문제도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가해재심 기관과 피해재심 기관 사이의 통합운영이 되지 않다보니 같은 사안을 놓고 다른 결론이 내려지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실제 올해 지방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교폭력 문제로 가해학생 4명이 8호 처분(강제전학)을 받고 교육청에 재심을 신청했다. 같은 날 피해학생 역시 “처분이 너무 가볍다”면서 9호 처분(퇴학)을 내려달라며 지역위원회에 재심을 신청했다. 그런데 교육청 징계위가 “가해학생들에 대한 전학처분이 과도하다”며 처분을 취소한 다음 날 지역위원회는 피해학생의 재심청구를 일부 인용, 강제전학에 특별교육 30시간이라는 가중처벌을 내렸다. 한 사안을 놓고 각 재심기관에 따라 서로 다른 처분이 내려진 셈이다.


이 경우 중앙행심위 판단을 다시 받거나 최악의 경우 행정소송까지 가야 한다. 이정엽 행정사는 “그나마도 피해학생은 가해학생의 처분이 지나치게 가볍다는 이유로 행정소송을 제기하면 ‘소의 직접 당사자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각하처분을 받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교육부는 가해·피해 여부를 구분하지 않고 재심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통합기구를 만들 계획을 밝혔지만 지지부진한 상태다. 한 일선 학폭 전담교사는 “결국 예산과 인력문제 때문”이라며 “재심기관이 중구난방으로 운영되고 있는 이유는 시·도교육청과 시·도청이 서로 ‘일이 많다’며 학폭사건을 떠밀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거기다 소위 ‘피해재심기구’라고 하는 시·도 학교폭력대책 지역위원회 역시 몰려드는 사건 처리에만 급급한 나머지 신중한 검토가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이나 경기도 지역 지역위원회는 통상 한 달에 두 번 회의를 열어 접수된 피해 재심사건을 처리하는데 이때 처리되는 사건 수만 30~40건(월 기준)에 달한다. 지역위 관계자는 “한 건당 처리하는 데 길어야 15분 정도 소요되는데 페이퍼작업(학교에서 제출된 서류 및 피해학생 측이 제출한 의견서) 검토만 하고 거의 넘어가는 식”이라며 “위원들 간의 심도있는 토론이나 학생을 불러 의견 진술을 하게 할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재심 결과에 대한 불신 또는 불복은 행정심판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 2011년에 단 1건에 불과하던 행정심판 청구는 2012년 21건, 2013년 89건으로 크게 증가했다.


8일 중앙행심위에 따르면 2017년 처리된 행정심판청구는 126건(재결기준)에 달한다. 이정엽 행정사는 “처음 학폭위부터 객관적 기준에 따라 전문적이고 신뢰할 만한 위원들에 의한 판단이 내려지지 않는 이상 학폭 당사자들은 끝없는 불복절차를 거칠 수밖에 없다”며 “지금이라도 교육부가 나서서 학폭위 전반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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