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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서와 불교의 가르침 - 루돌프 슈타이너 본문

명상수련

누가복음서와 불교의 가르침 - 루돌프 슈타이너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7. 1. 02:10

누가복음서와 불교의 가르침

 

루돌프 슈타이너

 

 

* 이 글은 1909년 9월 15일에서 26일까지 바젤에서 열린 강좌 <Das Lukas-Evangelium>의 제3강 서두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출처는 니시카와 류우항의 일역본을 유창완 선생님이 비공식적으로 번역한 <누가복음서 강의 - 부처와 그리스도교>(26-29쪽)입니다. (굵은 글씨는 연구자가 임의로 표현한 것입니다.)

 

 

누가복음서를 자신의 내부에 작용시키면 이 복음서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을 거대하고 압도적인 영적 세계로서 자신을 향해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불교적 세계관의 모든 것이 이 복음서에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전이 탐구에 의해서 밝혀져 있습니다. '누가복음서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은 불교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불교는 완전히 독특한 형태로 누가복음서에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소박하고 수수한 감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누가복서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부처의 가르침을 통해 드러난 세계관은 어느 단계의 높은 이념, 영적으로 순수한 높은 에테르체까지 상승한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격적인 준비, 수행이 필요했습니다. 누가복음서는 특정한 방법으로 감정에 작용할 수 있는 영적 실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정이 표상과 개념을 마음속으로 흘려 넣습니다. 그 이유는 누가복음서를 해명했을 때 밝혀질 것입니다. 불교의 정신적 결정(結晶)이 단지 누가복음서에서 흘러나오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의 정신적 결정은 기원전 5,6세기 인도에서 인류에게 주어졌을 때보다 고양된 형태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예전의 불교가 보다 높이 발전되었는지를 봅시다.

 

불교는 가장 순수한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입니다. 부처가 행한 행위로부터 사랑과 자비의 복음이 지상의 모든 존재에게 쏟아져 내렸습니다. 세상에 있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의 슬픔을 따뜻한 마음으로 함께 느끼는 진정한 불교도 안에는 사랑의 복음, 자비의 복음이 살아 있습니다. 생명 있는 것들의 슬픔을 함께 느끼는 행위 안에 우리는 우선 바른 의미로 불교적 사랑, 불교적 자비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서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포괄적인 사랑 이상의 어떤 것입니다. 이 어떤 것을 자비와 사랑의 행위로 변화함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불교도는 가장 높은 의미의 자비를 의지화하려고 합니다. 누가복음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실행 가능한 사랑을 발전시키려고 합니다. 불교도는 병자의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서에 있는 것은 병자에게 손을 내밀어 치유하길 바라는 요청입니다. 인간의 혼에 생명을 주는 모든 것을 불교로부터 이해할 수 있습니다. 틀린 것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행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행하라는 것이 누가복음서에서 주목해야할 요구입니다. 받은 것보다 많은 것을 주는 것, 누가복음서에는 가장 순수하고 참된 불교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고양된 형태로서 행위로 옮겨진 사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 의해 고양된 불교를 서술하기 위해서는 누가복음서 필자의 마음이 필요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몸과 마음의 의사로서 파악하는 데 가장 적합한 사람이 누가복음서의 필자였습니다. 그는 마음 깊은 곳에 말을 거는 어조를 찾아냈습니다. 그 자신이 의사로 몸과 마음의 의사라는 관점에서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 쓴 것입니다. 누가복음서의 심연으로 들어가면 그것이 명확해집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서가 어린아이 같은 심정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눈을 돌리면 또 다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성숙한 지성, 성숙한 인간의 혼적 능력만이 파악할 수 있는 불교의 가르침이 누가복음서 안에서 젊음을 되찾아 새롭게 태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는 인류라고 하는 나무에 열린 과실처럼 보입니다. 누가복음서에서 다시 발견되는 불교는 어린 꽃처럼 보입니다. 예전의 것이 젊음을 되찾은 것입니다. '불교는 어떻게 해서 다시 젊어졌는가?'라고 물어봅시다. 위대한 부처에게 올바른 시선을 향하고 부처의 혼 안에서 일어난 작용을 인지학적으로 단련된 영안(靈眼) 앞에 이끌어낼 때 그것을 통찰할 수 있습니다.

 

존재의 비밀을 통찰할 수 있는 보살이라고 하는 고차존재가 부처가 되었습니다. 부처는 보살이었기 때문에 고대 인류 진화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들에 관여했습니다. 인류가 아틀란티스 이후 시대에 등장하여 아틀란티스 후 제1문화기를 쌓아올렸을 때, 부처는 이미 보살로서 존재하며 영적인 세계에서 어제 말한 것을 중개했습니다. 부처는 이미 아틀란티스 시대에도 있었고 레무리아 시대에도 존재했습니다. 그처럼 높은 진화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29세에 부처가 되기 전에 인도에 태어나기 전까지 통과했던 모든 것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부처는 인류를 위해 활동하고 신적 영적 세계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가져다준 일을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어제 단기간이기는 하나 고차존재도 이미 배운 것을 다시 한번 배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부처도 보살이었을 시기에 영적인 관조, 영적인 깨달음을 향해서 서서히 완성시켜 나갔습니다.

 

부처가 그것을 어떻게 신봉자에게 말했는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부처는 자신의 혼이 통과해온 길, 전생에서 체험한 것을 떠올리고 신봉자들에게 말합니다. "승(僧)들이여, 어느 때 영적인 세계로부터 모든 것을 포괄하는 듯한 광휘가 나에게 나타났다. 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어떠한 형태도, 어떠한 형상도 구별할 수 없었다. 나의 깨달음은 아직 충분히 순수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빛을 볼 뿐만 아니라, 빛 안의 갖가지 형상과 형태를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 형태와 형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구별할 수 없었다. 나의 깨달음은 아직 충분히 순수하지 않았다. 이어서 그 형상과 형태가 영적인 존재들을 표현하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존재들이 영적 세계의 어느 영역에 속해 있는지 아직 구별할 수 없었다. 나의 깨달음은 아직 충분히 순수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나는 이들 영적 존재가 영적 세계의 어느 영역에 속해 있는지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존재들이 어떠한 행위에 의해 영적인 영역에서 위치를 획득했는지, 그 존재들은 어떠한 마음 상태에 있는지 아직 구별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나의 깨달음은 아직 충분히 순수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러한 영적 존재들이 어떠한 행위에 의해서 그 영역에 이르렀는지, 그 존재들의 마음 상태는 어떠한지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과거에 어떤 존재들과 함께 살았고, 나는 이들 존재와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지 구별할 수 없었다. 나의 깨달음이 아직 충분히 순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언제 어떤 존재와 함께 있었는지, 어떤 존재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나는 나의 전생을 알았다. 지금 나의 깨달음은 순수하게 되었다."

 

부처는 신봉자들에게 이와 같이 말하며, 이미 소유하고 있었지만 육화할 때마다 시대 상황에 맞춰 새롭게 획득해야 했던 인식에 어떻게 해서 도달했는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체 안으로 완전히 내려와 체에 알맞도록 다시 그 인식을 획득해야만 합니다. 이것을 따라가면 석가족의 왕자로 태어난 존재가 어떻게 위대한 의미를 가진 인물이었는지를 예감할 수 있습니다. 이같은 방법으로 부처가 다시 인식한 것, 부처가 볼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부처는 '이것은 보통 인간의 눈으로는 가까운 장래에 사라질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단지 부처를 포함한 비의 입문자들만이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통 인간에게는 그 가능성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태고의 영시력에 대한 흔적은 점점 더 적어져 갔습니다. 부처는 비의 입문자가 말해야 할 것을 말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 자신의 혼으로부터 흘러나와야 할 힘에 대해서 인간에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는 자신의 깨달음의 성과를 나타내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내적인 본성을 발전시킴으로써, 이 시대에 어떤 것을 발전시킴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말해야 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점차 사람들은 지구진화과정 속에서 자신의 혼으로부터,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내용을 자기 자신의 오성, 심정이 말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하지만 부처가 순수하게 인간적인 인식으로서 말한 것을 자기의 혼 안에서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나중에 어떤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과 그 능력을 인간의 심정 깊은 곳에서 끄집어내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예를 들어봅시다. 오늘날 청년은 논리적인 사고의 규칙을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오늘날 인간이 자신의 내부에서 발전시키는 일반적인 인간적 능력에 속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능력을 인간이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리스의 위대한 사상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존재가 필요했습니다. 무엇인가를 인간의 심정 깊숙한 곳에서 끄집어내는 것과 그것이 인류에게서 발전한 후에 자신의 마음속에서 끄집어내는 것은 다릅니다.

 

부처가 사람들에게 말한 것은 가장 위대한 가르침 중 하나였습니다. 오로지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만이 이윽고 인류의 공동재산이 되어야 할 것, 즉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자신의 혼 안에서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부처는 자신이 말해야 할 것을 당시 퍼져 있던 언어로 표현해야 했습니다. 부처 시대에 인도에서는 샹키아철학과 요가철학이 가르침을 펼치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말했습니다. 샹키아철학과 요가철학은 널리 퍼져 있었고 그 표현과 개념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것을 가져와야 하는 사람은 그와 같이 널리 져 있는 표현을 이용해야 했습니다. 부처는 그러한 일반적으로 널리 진 표현을 자신의 혼 안에 살아 있는 것에 쳐야 했습니다. 물론 그 표상과 개념은 부처에 의해 완전히 새로운 형태를 얻었지만, 그러한 표상과 개념을 이용해야만 했습니다. 미래는 과거 위에 세워집니다. 진화는 그렇게 진행되는 것입니다. 부처는 숭고한 지혜에 당시 인도에서 널리 퍼져 있던 가르침의 표현을 걸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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