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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슈타이너: 그의 생애와 업적 - 존 데이비 본문

루돌프 슈타이너

루돌프 슈타이너: 그의 생애와 업적 - 존 데이비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7. 12. 19. 23:37

루돌프 슈타이너: 그의 생애와 업적

Rudolf Steiner: A Sketch of his Life and Work



존 데이비(John Davy)





 

슈타이너는 1861년 크랄예벡(오스트리아 남부-오늘날은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났으며 1925년 스위스 도르나흐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낡은 시대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가 탄생하는 고통을 함께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삶은 그 변천 과정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19세기 말의 외적인 모습들은 20세기가 가져올 엄청난 사건들에 대해 암시를 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슈타이너의 초반 인생에서의 표면상의 모습들에서는 그 후반 인생의 비범한 활동들을 쉽게 예견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서 그 씨앗들을 찾아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외견상 우리는 남부 오스트리아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자라고 있는 타고난 재능을 지닌 철도 공무원의 아들을 보게 됩니다. 그는 마을의 학교에 다녔으며 나중에는 빈의 노이슈타트에 있는 현대적인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자유사상가였고, 자신의 아들이 당시 시골출신의 똑똑한 아이들의 일반적인 운명이었던 성직자가 되기보다는 철도 기술자가 되길 원했습니다. 슈타이너는 수학, 물리, 화학에서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나중에는 박사학위를 위해 철학 논문도 쓰게 되었습니다.

 

그는 대학을 다니는 내내 스스로 학비를 충당하였고, 나중에는 가정교사 일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문학적이며 학술적인 일에 끌리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괴테 연구자였던 칼 율리우스 슈뢰어 교수는 슈타이너의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슈뢰어 교수는 자연과학에 관한 괴테의 작품들을 새로운 전집으로 만들기 위한 편집 활동에 슈타이너를 추천하였습니다. 그는 빈의 풍성한 문화적인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그 후에 그는 바이마르에 있는 유명한 괴테 문서 보관소의 초빙을 받았고, 그곳에서 7년간 머물면서 쇼펜하우어 전집의 공동작업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에 대한 괴테의 글들에 관해 더 많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유럽 중심 문화의 지도적인 인물들이 많이 방문하는 유명한 중심지였으며 그래서 슈타이너는 그 시대의 예술 문화 분야의 주요한 인물들과 많이 교류하게 되었습니다.

 

1894년 그는 <자유의 철학>을 출판했지만 이 책에 대한 평판에 실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작품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그 후 19세기 말이 가까워졌을 때 바이마르의 안정된 세계를 떠나 한 전위적 문학잡지를 편집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가게 됩니다. 여기서 그는 기존의 틀을 깨는 다양한 방식들을 추구하는 (때때로 필사적으로) 극작가와 시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도시는 수많은 급진적인 집단과 운동의 진원지였습니다.

 

슈타이너는 베를린에 있는 노동조합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후원하는 노동자 교육학교에서 강좌를 맡아 달라고 요청을 받게 됩니다. 대다수의 교수들은 마르크스주의자였지만 슈타이너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가르치길 고집하였습니다. 그는 역사와 자연과학, 그리고 구술의 실용적 훈련에 대해 강의합니다. 구텐베르크 축제 때는 베를린 서커스 스타디움에서 7000명의 인쇄공들에게 축제 기념 연설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의 마음을 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당의 노선도 따르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정치적 활동가들에게는 호감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이 활동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1899년이 시작되면서 슈타이너의 인생은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내면적 투쟁에 대한 좀 더 개인적인 인식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1890년대가 지나는 동안 원대한 결정으로 성숙되었습니다.

 

그의 내면적인 투쟁에 관해 좀더 개인적으로 엿본다면 1890년대를 지나면서 아주 높은 결단에 도달할 만큼 성숙해가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899828일 그는 <초록뱀과 아름다운 백합>이라는 괴테의 신비스러운 동화에 대한 놀라운 글을 그의 잡지에 기고하였습니다. 그 에세이의 제목은 <괴테의 신비스러운 발현>이었으며 여기서 그는 신중하기는 했지만 명확하게 이 이야기의 초자연적 신비 의미에 대해서 지적합니다.

 

이 글은 브록도르프 백작과 백작부인의 주목을 끌어서 슈타이너에게 그들의 주간 모임에 강연을 부탁하게 됩니다. 브록도르프 부부는 신지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슈타이너가 19세기 말의 몇 년간을 통해 내린 결정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즉 그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으며 그 후로 계속 조용히 길러지고 발전되어 왔으며 훈련되어온 정신적인 지각의 내적 능력에서 나온 것들을 숨김없이 터놓고 직접적으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입니다.


곧바로 슈타이너는 신지학자 그룹에서 정기적으로 강연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전에 사귀어 왔던 많은 친구들을 당황하게 하고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슈타이너가 조르다노 부루노 연맹에서 말한 중세의 스콜라 철학에 대한 강연회에서는 소란이 있었습니다. 때론 급진적이기도 했지만 존경할 만한 학자, 역사가, 과학자, 작가, 철학자가 신비주의자(occultist)”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것은 슈타이너의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슈타이너는 고립의 위험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직 비주류적 문화 안에서만, 우선은 신지학자들이 그가 이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위의 문화가 쇠락해 가고 깊은 위기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휠씬 후에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정신세계에서 인류 진화 위에 비추어지고 있는 새로운 빛은 지난 19세기의 마지막 삼분의 일 동안 얻어진 지식 속으로 스며들기를 몹시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에서의 이러한 성취를 유물론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정신은 잠들어버렸고, 잠든 정신이 이 모든 암시를 방해했으며 작게는 그것에 대한 어떠한 인식도 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자신의 본성에 따라서 정신적인 방향으로 발전되어야만 하는 바로 그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가 자신의 본성을 져버렸습니다. 그 시대는 실제로 생명의 불가능을 초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슈타이너 자신의 정신 연구에 대해 직접적으로 얘기하기로 한 결심은 정신적 지도자로서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욕망 때문에 진행된 것이 아닙니다. 또한 호기심을 만족시키거나 몇몇 고대의 지혜들을 다시 부활시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대의 요구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탄생한 것입니다. 이 세기의 막바지에 도달한 지금(20세기 ), “생명의 불가능을 초래하기 시작한시대에 대해 의미한 바를 올바르게 인식하기가 더욱 쉬워졌을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세계로부터 온 충동(impulse)들을 알리려는 진심에서 우러난 본인의 바람이었나 이것에 대해서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슈타이너가 묘사했던 것 뒤에 있었던 바탕입니다.

 

슈타이너가 입문을 추구했던 일상생활 속에서 그 충동들을 부활시키기 위한 기초들을 창조해 내는 데 거의 20년이 걸렸습니다. 우선 그는 주로 신지학자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강연하는 것을 통해 활동을 하였으며 짧은 글과 책들을 썼습니다. 이 활동들은 영어권 나라에서는 여전히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엄청나게 풍부한 자료로 남아 있습니다.

 

수 년이라는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자연계와 우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신적인 (실재) 존재들, 인간의 영혼과 정신의 내적인 본성, 그리고 앞으로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그들의 잠재성, 명상의 본질과 그 실행, 탄생이전과 죽음 이후에 겪는 영혼의 체험들, 인류와 지구의 진화와 그 정신적인 역사, 윤회와 카르마의 작용에 대한 상세한 연구들을 명확하고 깊이 있게 조사 연구하였습니다.

 

방식은 시종일관 진지하고 직접적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전달 내용들의 비범한 본질을 깨닫기 위해서는 많은 경우 노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옛날의 어떤 근원을 출처로 한 것도 아니며 슈타이너가 정신적인 지도자들의 대변인인양 행동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정신적으로 주의 깊게 관찰하고 지각한 것들의 열매입니다. 슈타이너는 정신적 탐구라고 부르는 걸 더 좋아했는데 그것은 자연과학 안에서 추구되어온 이해력과 사고의 완전성에 대해 철저히 정통했으며 그것을 아주 진지하게 대했던 한 개인이 자유 속에서 착수한 일이었습니다.

 

7,8년 후 슈타이너는 정신과학에서의 그의 활동에 예술 분야에서 자라고 있는 활동들을 덧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정신과학이 사회적이며 문화적인 혁신으로 변형되기 위해서는 예술이 결정적인 가교 역할을 한다고 보았던 것은 의미 깊고 특징적인 점입니다. (우리들은 이제 자연과학이 인간의 가슴, 마음을 무시하고 감사함, 아름다움, 연민 없이 테크놀로지로 전환될 때 일어나는 일들을 생생히 인식할 수 있습니다.) 1910년과 1913년 사이에 그는 네 개의 신비극을 썼는데 그것은 연속하는 육화를 통해 한 집단의 사람들의 삶을 추적하는 내용으로 지상에서뿐만 아니라 정신 영혼계에서의 장면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배우인 그의 두 번째 부인 마리 폰 지버스와 함께 말하기(speech)와 드라마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시도되었습니다. 동작예술인 오이리트미가 역시 이 기간 동안에 시작되었습니다. 오이리트미란 언어와 음악의 내적인 형태를 몸짓으로 보일 수 있도록 만드는 예술입니다.

 

스위스 도르나흐(Dornach)에 첫 번째 괴테아눔(Goetheanum)의 주춧돌이 1913년 놓여졌습니다. 슈타이너가 설계한 독특하게 조각된 모양과 구조들을 만들기 위해 모여든 국제적 자원봉사자들이 국내 건축가들 및 공예가들과 협력하면서 거대하게 연결된 둥근 지붕이 있는 나무로 된 이 놀라운 건물은 1차 세계대전 중에 천천히 제 모습을 갖춰 나갔습니다. 이 건물은 20세기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슈타이너는 멋있는 유적을 짓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건축을 인간 삶에 봉사하는 도구로 간주했고 괴테아눔을 인지학 연구, 특히 희곡과 오이리트미 작업의 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설계했습니다.

 

19221231일 밤 방화범이 이 건물을 몽땅 태워버렸습니다. 슈타이너가 인근 작업실에서 영국의 여성 조각가 에디스 마리온(Edith Maryon)과 함께 작업 중이었던 인류의 대표자(The Representative of Humanity)"라는 위대한 조각만이 남았습니다. 슈타이너는 바로 다른 건물을 설계했습니다. 이 건물은 슈타이너가 죽은 후에 완공되었으며 지금은 세계 인지학 협회(Anthroposophical Society)와 이에 속한 정신 과학 학교(School of Spiritual Science)의 중심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웅장한 무대와 강당이 있어서 신비극뿐만 아니라 괴테의 파우스트 전체(1부와 2), 다른 연극과 연주회(음악회), 그리고 오이리트미 공연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면서 슈타이너는 넓은 범위에서 삶과 문화의 재활을 더 넓고 깊게 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유럽은 폐허였고, 새로운 추진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시도한 정치적 사회적 대안으로서의 “유기체적 사회 삼지성"을 실현하고자 한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슈타이너가 발전시킨 개념의 기초는 오늘날에 더욱 적절한 씨앗으로 남아 있습니다.

 

슈타이너의 사회 사상은 마르크스(Marx)와 직접 대비되는 그의 역사관의 맥락 속에서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역사는 고차원의 정신실재가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일어나는 인간 의식의 내적 변화에 의해 근본적으로 만들어진다고 슈타이너는 보았습니다. 이 시기에만 해도, 상당히 새로운 경험들이 인간 영혼 속에서 자각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질뿐만 아니라 영혼과 정신의 본질 그리고 오늘날의 인류의 요구에 대해 참되고 심원한 통찰력을 토대로 하지 않고는 건강한 사회질서를 설립하리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 요구들은 공동체를 추구하는 것과 개인성을 경험(the experience of individuality)하는 것 사이의 강한 긴장들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물질적 상호의존의 시각으로 바라볼 때, 공동체라는 것은 이미 경제 생활과, 오늘날 그것이 속해 있는 세계경제의 기본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고의 독립과 언론의 자유의 시각으로 바라볼 때 개인성이라는 것은 모든 창조적 노력, 모든 혁신 그리고 예술과 과학의 인간정신 실현에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정신의 자유 없이는 우리의 문화는 시들어 죽게 됩니다.

 

개인성과 공동체는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본질에 근거한 창조적 양극으로 인식되어야만 대립에서 헤어날 수 있다고 슈타이너는 설득했습니다. 양극은 오직 적절한 사회 형태를 갖춰야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정신적 삶의 모든 표현에 대한 자유가 보장되는 형태, 그리고 경제적 삶 속의 형제애를 촉진시키는 형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양극의 건강은 제3의 인간의 요구와 기능,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인간권리에 대한 우리의 느낌에 관계가 있는)를 전적으로 인정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우리가 이 분야(사회적 관계)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평등에 대한 관심으로 고취된, 사회조직에서 하나의 분명한 영역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여기서 다시 강조했습니다. 여기서 평등은 정신적 능력이나 물질적 환경의 평등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필수적 정신본질을 인식하는 것을 통해 깨어나는 평등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안에 모든 사람의 정신의 자유와 물질적 양식에 대한 권리의 의미와 근원이 있습니다.

 

이러한 통찰력에 기반하여 슈타이너는 새로운 작업의 시작들에 대한 요청과 여러 분야에서의 실용적 도움에 대한 다양한 요청에 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의사, 임상의, 사업가, 학자와 과학자, 신학자와 목사, 그리고 교사들이 슈타이너에게 접근했습니다. 이 시작들로부터 이 세기의 모든 긴장감과 격변들을 견디어낸 많은 활동들이 자라났고 계속해서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당연히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발도르프 교육과 치유 교육의 활동입니다. 전자는 발로르프-아스토리아 담배공장의 사장인 에밀 몰트(Emil Molt)가 직원의 자녀들을 보낼 수 있는 학교를 요청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장애인(아동들과 어른들)들을 위한 집, 학교 그리고 마을 공동체들도 번창하고 있습니다.

 

생명역동 농법(Biodynamic agriculture)1924년 코베르비츠(Korberwitz)에서 파괴적인 경향의 과학적농업에 대해 걱정하는 농민들의 요구로 열린 강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유럽 나라들에만 중요한 영향을 주었지만 이제는 세계의 다른 많은 나라들의 관심이 아주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슈타이너가 의사들과 같이 한 작업들로부터는 진료소와 병원 그리고 다양한 치료학을 포함한 의학운동이 발전했습니다. 독일 목사들의 요청으로 종교 부흥 운동인 그리스도교 공동체(Christian Community)가 일어났습니다. 교육과 치료학에도 기여하는 오이리트미 예술은 튼튼하게 발전했으며 이제는 전체 4년 교육과정을 가진 다수의 오이리트미 학교들이 있습니다. 교사 교육, 농업, 예술, 사회 복지 그리고 인지학 일반을 소개하는 여러 교육 센터들이 최근에 늘어났습니다.

 

루돌프 슈타이너1925325일 새로운 시도들이 시작되는 가운데 눈을 감았습니다. 슈타이너가 인생의 후반부에 드러낸 다재다능과 창조성은 비할 수 없이 놀랄만한 일입니다. 그는 어떻게 이 많은 일들을 달성했을까요?

 

20세기 후반은 정신적 세계라 불릴 수 있는 더 깊은 현실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인식을 불러일으킨 시기입니다. 이 정신적 세계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깨어난 의식을 통해서만 직접 접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이 현실들이 다른 상(image)과 언어들로 설명되어 과거에도 알려져 있었고 모든 훌륭한 종교와 정신적 가르침의 근원이었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이 현실들은 감각에 의해 드러난 물질세계에 우리의 과학문화가 전념하는 동안에 잠시 가려지고 잊혀져 있었습니다.

 

많은 개인들이 정신적 현실들의 삶을 사는 동안의 아주 짧고 강렬한 기억(glimpse)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특정한 어린 시절의 경험을 일관되게 기억합니다. 몇몇 사람들은 그 기억이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되는 통찰력의 형태로 됩니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자신의 정신적 삶에 대해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많은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일상생활 안에서 보이지 않는 현실의 세계를 완전히 의식하고 있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슈타이너의 첫 40년 삶의 내적 노력은 정신적 경험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정신적 경험을 우리 시대의 지식과 통찰력의 형태들, 그리고 특히 언어와 자연과학 학문과 결합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는 슈타이너의 인생과 과업에 대한 특별한 도전과 기여로 볼수 있습니다. 슈타이너 자신은 과학시대를, 가장 유물론적인 측면에서, 인류의 정신교육에 필수적인 단계로 보았습니다. 잠시 정신세계를 잊고 물질세계로 들어감으로써 새롭고 필수적인 능력들을, 특히 참된 개인의 내적 자유의 경험을 밝힐 수 있다고 슈타이너는 얘기했습니다.

 

슈타이너는 그 많은 인생의 기로에서 제기되는 사람들의 삶에 관한 질문들과 실질적인 요구에 가장 실천적인 방식으로 응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은 어린 시절의 많은 노력들에 근원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어릴 때 그는 그의 내면적인 경험들에 대해 거의 완벽한 침묵을 지켰으며 차츰 내적 경험과 과학이 탄생하게 되는 의식 양태(mode of consciousness)에 관한 관계를 터득하고 명료하게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자유의 철학이라는 그의 책이 이러한 노력들의 첫 번째 성과로 나타납니다. 슈타이너 자신은 이 책을 "어떻게 한 인간의 영혼이 힘들게 자유를 얻었는지에 관한 일대기적 기술(biographical account)" 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책은 영혼이 정신적 경험과 현실을 발견할 수 있게 보통의 생각과 경험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지식의 경로의 근원을 담고 있습니다. 이 경로를 따라서 슈타이너는 자연 과학의 참된 정신이 더욱 더 발달되어 나타나는 새로운 단계인 정신과학의 발전을 모색했습니다.

 

이 경로를 따라서 30대의 슈타이너는 예수라는 존재의 육화(incarnation)가 가져온 것은 인간 정신의 역사에서 "시대의 전환기"라고 하는 내적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사건의 의미가 모든 종교적 구분, 인종과 나라를 초월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아직 그 시작만을 인식한 모든 인류의 성과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또한 이 세기에 이제 막 시작된, 육체세계가 아닌 지구와 인간의 보이지 않는 힘의 영역 안에서의, 예수의 새로운 발현과 과업 또한 깨닫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슈타이너는 낡은 가르침을 새로운 형태로 제시하거나 어떤 학설을 선포하려는 것에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깊고 절박한 요구에 대처할 수 있는, 자유로운 지식의 진로와 실천하는 사랑의 진로를 양성하는 데 관심을 가졌습니다비록 완전하게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인지학에서 그들의 삶과 일에 대한 끊임없는 영감을 찾는 사람들에 의해 추구되는 이상들입니다.

 


[출처 : http://www.rsarchive.org/RelAuthors/Davy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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