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마르크스주의와 삼원론적 사회 질서 - 루돌프 슈타이너 본문

인지학/사회삼원론

마르크스주의와 삼원론적 사회 질서 - 루돌프 슈타이너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3. 8. 21. 00:34

마르크스주의와 삼원론적 사회 질서

 

루돌프 슈타이너

김훈태 옮김

 

 

 

특정한 사회적 요구가 현재처럼 왜곡된 채로 계속 옹호된다면 유럽이 처한 사회적 혼란의 올가미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그의 저서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의 진화>에서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이러한 요구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상품의 관리와 생산수단의 통제가 인간에 대한 통치(지배)를 대신한다.” 이 문장의 기원이 된 견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많은 지도자들과 노동계급 대중의 신조를 형성한다. 어떤 관점에서는 이것이 맞다. 근대 국민국가를 탄생시킨 인간관계는 상품과 생산양식뿐만 아니라 거기에 종사하는 인간까지 규제하는 행정기관을 형성했다. 상품과 생산양식의 관리는 경제학을 구성한다. 현대에 들어 경제 생활은 그 행정이 더 이상 사람을 통치하지 않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것을 인식했다. 그들은 경제 사이클 내에서 자본과 노동력이 작동하는 방식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은 현대 인류가 이러한 작업, 즉 자본이 인간의 노동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는 현재의 형태를 넘어서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본이 인간 노동에 대한 권력을 행사하는 수단이 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상품을 관리하고 생산을 통제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인간을 통치하기 위한 지침을 제시한다. 따라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인간에 대한 이러한 통치가 경제 과정의 순환에서 제거되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현대 생활은 인간을 단순히 상품과 생산 과정의 부속물로 간주하거나 관리의 일부로 관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경제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지배를 제거하고 국가로부터 분리된 새롭고 순수한 경제 관리를 허용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낡은 통치에는 인간 관계를 규제하는 무언가, 즉 규제되지 않은 상태로 있을 수 없고 더 이상 낡은 경제 생활의 요구에 의해 규제되지 않을 때 스스로를 규제하지 않는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했다. 또한 그들은 상품을 관리하고 생산 부문을 통제하는 힘의 원천이 자본 내부에 있다는 사실도 보지 못했다. 인간의 정신이 경제생활을 이끄는 것은 바로 자본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상품을 관리하고 생산 부문을 통제하는 데 있어서 그것은 항상 새롭게 창조되는 인간 정신을 육성하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경제 생활이 메말라 완전히 타락하지 않으려면 경제에 새로운 충동을 지속적으로 가져와야 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생각은 옳았다. 경제의 통제에는 인간 자체에 대한 통치를 의미하는 어떤 것도 포함되어서는 안 되며, 경제에 봉사하는 자본이 그 과정을 지시하는 인간 정신을 결코 통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치명적인 결점은 이전에 통치하던 인간 관계와 인간 정신에 의한 경제의 방향이 더 이상 경제의 통제를 받지 않아도 저절로 지속될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경제 생활의 정화, 즉 상품의 관리와 생산 과정의 통제에 대한 제한은 이러한 경제 생활 외에 이전의 행정 형태를 대체하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인간 정신을 경제의 실제 통제자로 만드는 다른 무언가가 다시 존재할 때만 가능하다. 이러한 요구는 삼원론적 사회 질서라는 관념에 의해 충족된다. 이 행정이 자신의 영역 안에 머물면서 상품 생산 과정만을 통제하는 한, 그 자체의 토대 위에 놓인 정신적, 문화적 생활의 행정은 경제 생활에 계속해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인간의 정신적 충동을 공급할 것이다. 사회 유기체의 문화 및 경제 체제와 분리된 권리 영역은 민주주의가 한 성숙한 인간이 다른 인간들을 통치하도록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인간 관계를 통치할 것이며, 한 인간이 더 큰 개인적 능력의 힘이나 경제적 수단을 통해 다른 인간들을 통치하는 힘은 이러한 통치에서 아무런 발언권도 갖지 못할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새로운 경제 질서를 요구한 것은 옳았다. 옳았지만 일방적이었다. 그들은 자유로운 권리의 영역과 자유로운 정신의 육성이 동반되어야만 경제 생활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미래의 경제 생활이 취해야 할 형태는 자본주의-경제적 지향이 뚜렷하게 정신적인 지향에 자리를 내어주고, 경제력을 통한 인간 관계의 통치가 분명히 인간적 통치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상품과 생산만을 통제하는 경제 생활에 대한 요구는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충족될 수 없다. 그러한 주장을 고집하는 사람은 누구나 지금까지 존재의 필요성을 벗어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존재해야 하는 경제 생활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괴테는 상당히 다른 환경에서 살았지만 인생의 심오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대의 많은 사회적 요구에도 충분히 적용 가능한 두 가지 생각을 썼다. 첫 번째는 “부적절한 진리는 한동안 통한다. 그런 다음 완전한 깨달음 대신 갑자기 눈부신 거짓이 들어온다. 세상은 만족하고 수세기는 속아 넘어간다.” 두 번째는 "일반화와 엄청난 오만함은 언제나 끔찍한 재앙으로 가는 길을 닦고 있다"다. 실제로 최근의 사건들에 의해 교훈을 얻지 못한 마르크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세계관에서 여전히  작동하는 "부적절한 진실"이다. 세계대전의 참화 이후, 진정한 시대적 요구에 직면한 마르크스주의는 "세기를 속이는" 것을 막아야 하는 "눈부신 거짓"이 되었다. 이를 막으려는 시도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그들의 "부적절한 진실"로 어떤 재앙에 돌입하고 있는지 인식하는 모든 사람에게 호의를 얻을 것이다. 이 "부적절한 진실"은 실제로 "일반화"를 낳았고, 그들의 지지자들은 그들의 유토피아적 일반화를 삶의 현실로 대체하려는 모든 것을 유토피아적이라고 거부하면서 적지 않은 오만함을 보여준다.

 

 

<Aufsätze Über die Dreigliederung des sozialen organismus und zur Zeitlage 1915–1921> 중에서

 

[출처 : https://rsarchive.org/Books/GA024/English/AP1985/GA024_c03.html]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