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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의 사회삼원론 - 엘마르 슈뢰더 본문

인지학/사회삼원론

슈타이너의 사회삼원론 - 엘마르 슈뢰더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3. 10. 10. 06:41

슈타이너의 사회삼원론


엘마르 슈뢰더
서울자유발도르프학교
2019년 3월 16일



저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반갑게 맞아주셔서 감사하고, 멘토 활동을 통해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초청해 주신 교사와 부모에게 감사드리며, 아름다운 학교에서 지낼 수 있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독일 남부의 작은 도시 프라이부르크(Freiburg)에서 왔습니다. 프라이부르크라는 이름 자체가 아름다운데 그 이유는 이름에 ‘프라이(Frei)’, 즉 ‘자유’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프라이부르크에는 발도르프학교가 3개 있습니다. 작은 도시임에도 발도르프학교가 많습니다. 제가 그 중 한 학교에서 30년간 수업을 했습니다. 저는 자녀가 3명 있는데, 지금은 다 컸지만, 저와 같은 학교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평소에 교사이기도 하고 아버지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항상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저는 학교를 은퇴하기 전에도, 은퇴한 후에도 발도르프 교육학을 강의하는 강사입니다. 독일뿐 아니라 여러 곳에 그런 과정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은 사회삼원적인 학교의 형태에 대한 강의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하나의 학교로 시작해서 지금은 1,000개가 넘어섰으니, 1년마다 10개의 학교 탄생은 대단한 결과입니다.

발도르프학교가 탄생한 시대적/사회적 배경

첫 발도르프학교가 생긴 1919년은 유럽의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기입니다. 당시 유럽의 사회적 환경은 정말 안 좋은 상황이었습니다. 모든 나라에서 전쟁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전쟁은 국가들이 시작한 전쟁이었죠. 그래서 정부에 대해 많은 비판이 있었습니다. 국가의 도덕성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땅에 떨어졌습니다. 인간이 물질화되고, 전쟁을 일으키는 기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100만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은 끝내려는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쟁에 지치고 고갈되어 전쟁이 끝난 상황이었습니다. 인간을 물질화시킬 수 있는 사회의 시각은 전쟁에서 인간을 태워버릴 수 있다는 시각입니다. 그리고 이런 시각은 사회를 오류로 이끕니다.

이것은 정치가 권력을 남용한 결과이고, 인류에 대해 잘못 사용한 결과입니다. 즉, 일부 그룹에서 소수만을 위해서 권력을 사용한 결과이며, 소수에 축적된 부가 전쟁으로 인하여 더욱 소수로 집중되었습니다. 교육 시스템은 국가에 합당한 방향으로 아이들을 교육시켰습니다. 그런 교육을 시켰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전쟁으로 끌려 들어간 것입니다. 전시에는 소수의 사람만이 제대로 살 수 있었습니다. 국가의 존재가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소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소수에 의한 권력과 부의 독점 그리고 부자유였습니다. 그리고 국가의 권력이 밖으로 향해 있어서 다른 국가를 정복하려 했습니다. 국가 내에서 함께 일하자는 방향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좋지 않은 상황에서 에밀 몰트라는 사람이 슈타이너 박사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새로운 학교를 세울 수 없을까요?” 에밀 몰트는 담배 공장 소유주였습니다. 에밀 몰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아 담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학교를 만들려 했습니다. 그는 읽기, 쓰기 등 실제적인 것뿐 아니라 미술, 음악 등 다양한 것을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교육을 원했습니다. 즉, 아주 포괄적인 인간교육, 8년만이 아니라 더 길게, 12년간 교육할 수 있는 학교를 원했습니다.

에밀 몰트는 자기 공장의 노동자 자녀들을 위해 자신의 부를 내놓았지만 학교의 내적인 모습은 슈타이너 박사가 만들었습니다. 에밀 몰트는 자기가 돈을 냈으니, 교육적 내용도 자기 뜻대로 하겠다고 하지 않고 교육적인 내용은 다른 사람이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란 교육적인 일에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에밀 몰트가 슈타이너 박사에게 이런 뜻을 전하자 슈타이너 박사가 동의했습니다.

사회삼원론: 교육

슈타이너 박사는 이러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국가가 정하는 형태의 학교교육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슈타이너 박사는 교육의 원천이 국가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20세기의 교육은 국가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슈타이너 박사는 말했습니다. 슈타이너 박사는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모았고, 그들이 첫 발도르프학교의 교사들이었습니다.

사회삼원론: 경제

학교를 보내고자 하는 부모들도 당연히 만났고, 이를 위해 건물, 난방, 교사의 의복 등을 위한 모든 것을 마련하는 것이 경제적인 과제였습니다. 경제에 대해 슈타이너 박사는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이 모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경제라는 것입니다. 경제의 목적은 부를 축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쪽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다른 쪽의 부를 빼앗는 그런 소유욕과 이기심이 경제를 휘어잡아서는 안 됩니다. 경제의 과제는 많은 사람이 함께 살고 균등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 함께 사는 것에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사회삼원론: 정치/국가

국가는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면 안 됩니다. 국가가 하는 일은 자기 나라나 이웃나라 사람들에게 권력을 남용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 전제를 만드는 것입니다. 규칙이나 규율을 함께 만들고 그걸 통해 사람들이 함께 잘 살게 하고 경제가 성장하고 정신적 교육이 이루어지는 기본을 만들어야 합니다.


ㅇ 교육은 자유로워야 합니다.
ㅇ 경제는 형제애가 있어야 합니다. 함께하는 나눔이 있어야 합니다.
ㅇ 정치 또는 국가는 평등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의로워야 합니다. 즉, 어떤 규칙이나
규율이 정해지면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ㅇ 교육은 정신적 영역이라 사고 영역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ㅇ 경제는 활동/행동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또는 의지와 연계되어 있습니다.
ㅇ 정치는 감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는 동등함을 느낀다’, ‘이게 옳다고 느낀다’ 하는 느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위험성

정신영역의 자유에는 위험도 존재합니다. 잘못하면 도그마, 이데올로기가 됩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 하는데, 너도 이렇게 생각해야 돼’라고 하게 됩니다. 경제에도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유욕과 이윤추구입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소수에만 부가 집중되었습니다. 정치의 위험성은 권력 남용입니다. 즉, 자기의 권력으로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슈타이너 박사는 이런 생각들을 1919년 학교가 생기기 전부터, 그러니까 전쟁 전부터 이런 생각들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마치 앞을 내다본 것처럼 사회가 계속 이렇게 가면 위험한 곳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1900년도에 이미 사회적 형태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정리했습니다.

이것은 현재 공동체에서 서로 지켜야 할 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우리는 모두 활동을 나누어서 하고 있습니다(분업). 저는 교육자로서 내 아이를 교육할 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의 교육까지 책임지고 있고,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자기 자동차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자동차도 만들고,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자기만을 위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농작물까지 재배합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주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필요한 것을 받는다는 생각입니다. 그건 전체적으로 모든 영역에 해당하는 원칙입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전체 행복은 구성원 각자가 적게 요구할수록 커진다. 즉, 일이나 활동이 자기의 욕구와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만족시키는 활동일수록 행복은 더 커진다.” (R. Steiner)

슈타이너 박사는 전쟁이 끝날 무렵 이런 강한 비전(자유, 형제애, 평등)을 실현시키려 했습니다. 즉, 자유는 정신적 영역에서, 형제애는 경제적 영역에서, 균형/동등함은 정치적 측면에서 현실화하려 했으나, 당시에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애를 썼지만, 반대세력이 너무 강했습니다. 정치는 자기 권력을 계속 남용하려 했고, 국가는 학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규정하려 했으며, 경제에서는 자기의 부를 축적하겠다는 힘이 강했습니다.

슈타이너는 이러한 사회삼원성의 동인들이 아직은 세계에 내놓기는 이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대신 자유로운 학교에 대한 요구가 많아져야 한다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에밀 몰트의 질문으로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발도르프학교는 사회삼원론에서 출발했고, 사회삼원론 없는 발도르프 교육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독일에서는 사회삼원론의 정신이 많이 사라지고 발도르프학교에 대한 생각도 약해졌습니다. 사회 전체적으로도 작은 그룹에만 사회삼원론이 살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의 한 은행은 은행 이름이 ‘빌려줌과 선물/선사를 함께 하는 은행’입니다. 돈을 선물하겠다니 이상한 은행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전혀 다른 생각으로 무언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는 돈을 맡기면 이자를 받지 않습니다. 보통은 내 돈이 일하니까 이자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돈은 일하지 않습니다. 일은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남는 돈을 맡겨서 사람들이 일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 빌려준 돈은 언젠가 돌아옵니다. 약간의 이자와 함께. 그런데 그 이자가 얼마인지는 자유입니다. 이 은행에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경제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학교에서의 교육

다시 학교로 돌아오면, 교사와 아이들 사이에서는 교육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교사와 아이 사이에 일어나는 정신적 활동입니다. 교사들의 의무는 정신적 동인을 통해 아이들을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교사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해야 해”라고 하거나 “내 말대로 해야 해”라고 하면 안 됩니다. 교사가 할 일은 아이들이 자기들이 되어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가능한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입니다. 교사는 그 아이가 되어야만 할 모습이 되도록 교육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자유가 필요하고,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공간이 필요합니다. 여기서의 공간은 물리적 공간뿐 아니라 영혼적, 정신적 공간을 포함합니다. 아이와 교사의 그런 관계는 정말로 정신적 삶이 영위되는 곳입니다. 거기에는 자유가 존재해야 합니다. 무엇인가에 구속되어 있으면 안 됩니다.

학교의 경제적 측면

학교에는 경제적 측면이 있습니다. 학교 건물이 있어야 하고, 수업에 필요한 재료가 있어야 하고, 교사들은 옷과 음식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을 부모가 맡고 있는데, 여기에 형제애가 존재해야 합니다. 한 교사가 “나 혼자 많이 가질 거야”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다 함께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들은 학교의 전체 조직과 경제적 삶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더 낼 수 있을까?’ 아니면 ‘적게 내도 될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학교의 정치적/법적 관계

학교에는 규칙이 있고 그 규칙은 함께 만들어온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화학 시간에는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규칙이 있습니다. 시간표도 정해져 있어야 하고, 시간 배정도 규칙적으로 정해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올바르고 균등하게 정해져 있어야 합니다. 한 교사가 ‘나 일 적게 할래, 규칙 안 따를래’ 할 수는 없습니다. 언제 수업을 시작할지 정하면 그 시간에 다 와야 합니다. (물론, 일찍 올 수는 있습니다.)


ㅇ 아이와 교사 사이에는 교육적 과정이 있고 정신적 삶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자유가 존재해야 합니다.
ㅇ 부모는 학교의 경제적인 측면을 형성합니다. 여기에는 형제애가 존재해야 합니다. 학교에 무엇이 필요한지 묻고, 내가 뭘 줄 수 있는지 함께 물어야 합니다.
ㅇ 규율적/법률적 측면에서는 외부에서 많은 영향이 들어온다 해도 학교 자체적으로 규율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 영역에서는 교사와 부모가 함께 일합니다. 이 영역에서  의장단이 형성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평등/동등함이 있어야 합니다.

유기체로서의 학교

교사는 단지 정신적인 삶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규칙적 측면에서도 학교를 위해 일합니다. 교사들은 경제적 영역에서 형제애가 발휘되는지 지켜봐야 합니다. 의장단의 부모들은 그 영역에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고 교육적 영역에도 관심을 가집니다. 그리고 법률적 측면이 동등하게 이뤄지는지에도 관심을 가집니다. 시간표가 잘 지켜지는지, 좋은 시간표인지, 수업 시작 시간이 모두에게 적합한지 등입니다. 즉, 서로서로 다른 영역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슈타이너 박사의 표현에 의하면 유기체입니다.

정신적 영역은 그 부분을 강조해서 정신적 영역인 것이지, 정신적 영역도 경제적, 법률적 측면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경제적 측면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사들은 정신적 영역 안에서 자유롭습니다. 다른 영역 안에서는 덜 자유롭지요. 교사들은 정신적 영역에서는 원하는 대로 하면 됩니다. 하지만 자유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한쪽 측면에서 는 자유지만 다른 한쪽 측면에서는 아이에 대해, 부모에 대해, 학교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특별히 아이들에게 책임이 크지요.

발도르프학교에서의 책임감

책임감에 발도르프 교육의 핵심 테마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유에 대해 생각해보면, 아주 강하게 나의 자유를 생각합니다. 특히 머리 부분에서 그것을 강하게 느낍니다. 그러나 책임감이란 다른 사람, 다른 것에 대해 함께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의 필요성, 급박한 상황을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나 혼자, 내 생각’이 책임감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향한 제스처입니다. 나를 열고,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나를 열고 확장시키면 나를 잃어버리고,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니고, 나의 자유가 없어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발도르프 교육학, 인지학의 기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내가 내 머리에 집중할 때는 내가 아닙니다. 세상을 향해 나를 열 때 나는 훨씬 더 ‘나’입니다. 나의 정신적 씨앗은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열어 나의 주변으로 보낼 때 나의 주변에 씨앗이 있습니다. 아이들도 자신을 열어야만 미래의 자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미래의 자신은 자신을 열었을 때, 주변의 상황을 만났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슈타이너 박사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를 잃어야만 나를 찾을 수 있다.” 혹은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의지 속에서 살 때만 진정 사는 것이다.” 그래야 진정 자유로운 ‘나’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생소한 사고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슈타이너 박사가 생각한 발도르프 교육의 기본 전제입니다.

교사와 부모의 관계

부모 측면에서 보면, 슈타이너 박사가 발도르프학교를 개교할 때 교사와 부모 사이에 는 진정으로 내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진실로 내면적이고 우정을 쌓을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슈타이너 박사는 ‘내가 너를 좋아한다, 안 한다’,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해야 한다’ 이런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있는 그대로, 객관적인 관계여야 합니다. 같은 아이를 교사도 만나고 부모도 만나고 있습니다. 이건 너무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 관계입니다. 객관적인 관계를 맺어야만 친밀한 관계가 가능합니다.

또 하나, 부모의 입장에서는 교사가 자유롭게 수업하도록 보장해야 합니다. 슈타이너 박사의 표현인데, 자라나는 아이들은 국가와 경제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개별적 능력이 자유롭게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장이 가능합니다. 우리의 교육은 아이가 개별적 능력을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부모도 정신적 삶의 일부를 학교에 표현하고 있고 그 안에 정신적 삶이 있습니다. 그래서 긴장이 존재합니다. 그러면 그런 긴장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부모들의 정신적인 것들이 어떻게 학교를 성장시키고 교사회가 더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할지가 중요합니다. 부모들이 교사들에게 ‘이렇게 교육시키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형태를 찾아야 합니다.


맨 위에 정신적 삶, 오른쪽에 정치적(권리, 법) 삶, 왼쪽에 경제적 삶이 있습니다. 정신적 삶에는 교사와 아이가 있고, 경제적인 곳에 부모, 정치적인 곳에 부모와 교사가 함께 있습니다. 이 구조를 만들어내는 데 각자의 것이 보존되고 조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교사들은 교육회의를 합니다. 이를 통해 정신적 삶 속에서 아이들이 정신적인 것을 발현하게 합니다.

학부모의 날이 있습니다. 이때는 교사들이 교육적인 것을 부모에게 보고하는 자리입니다. 또는 부모들이 “우리 아이는 이래요” 하고 교사회에 재보고하는 날입니다. 또는 학부모의 날에 부모들이 아이디어를 낼 수 있습니다. 학부모의 날은 경제 영역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학부모의 날은 정신적 삶과 경제적 삶의 중간쯤에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 서로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 얘기는 학부모의 날이 좀 더 이쪽으로 혹은 저쪽으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학부모의 날의 질에 달려 있습니다.

의장단은 학교의 법적인 것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여러 활동 형태가 있다. 교사회, 인사위, 학부모회 등 많은 형태가 가능합니다. 학교가 원하고 필요한, 모든 그룹에서 부모와 교사가 함께 일합니다. 학교의 정신적, 경제적, 법적인 것들이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다른 영역들은 서로 공유하고 보고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 함께 모을 수 있고, 그 중심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공화적 운영

1919년에 처음으로 학교가 세워졌을 때 어떻게 학교를 운영해야 할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민주적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했지만 슈타이너 박사는 ‘민주적이 아니라 공화적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민주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은 항상 다수가 소수를 이기는 것입니다. 소수는 다수가 결정한 것을 따라야 합니다. 여기서의 어려움은 소수의 자유에 대한 어려움입니다. 그리고 과연 그 소수가 진정한 책임을 가질 수 있을지의 문제입니다. 공화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각 개인이 자율성과 책임감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교사회가 결정한 것은 유효해야 하고, 그들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인사위가 결정한 것은 유효해야 하고, 그들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인사위에 관한 사항은 정관에 있어야 하고, 몇 년간 일해야 하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정해져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건 함께 정해야 합니다. 자기가 해야 할 규정들, 서약들이 있으며, 그 사람이 약속한 것에 대해 활동의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가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규정을 가지고 서약을 하면 그 규정에 따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기를 거기에 내놓아야 합니다.

제 경험을 말씀드리면, 우리 학교에는 축제위원회가 있습니다. 여기에선 학교의 축제들을 기획하고 어떻게 진행할지 결정합니다. 한번은 축제가 있었는데 엉망이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면 안 되지” 하고 소리칠 수 있으나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규정에 의하면 그 사람들은 그걸 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받습니다. 내 생각에 지금의 운영을 잘 못한다 하면 다음에 다른 사람을 축제위로 가도록 선출합니다.

이 표에 학생들이 보이지 않죠? 상급학생들은 어디에 있나요? 상급학생들(9학년 이상)은 신뢰의 팀에도 갈 수 있고, 교사회의에도 올 수 있고, 학부모의 날에도 올 수 있습니다. 또는 학생회를 만들기도 합니다. 저 같은 경우 학부모의 날에 학생들을 초대했습니다. 어떻게 학생회를 이끌어갈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슈타이너 박사의 두 문장으로 강의를 끝내겠습니다.

“행동을 위한 사랑 안에 살고 타인의 의지를 이해하며 살도록 하는 것이 자유로운 인간의 기본 원칙이다.” (자유의 철학)

“인간 개별 영혼에 전체 공동체가, 공동체 안에 개별 영혼의 힘이 반영될 때만 건강하다.” (사회조직의 3권 분립 시행에 관하여)

여러분의 정신적 삶이 뿌리를 잘 내려 건강해지고, 그 뿌리가 전세계로 나아가도록 기원합니다. 저는 이 학교에 처음 발을 들여 놓자마자 ‘여기 발도르프학교네’ 하고 느꼈습니다. 건물도 그렇고 사람도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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