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루돌프 슈타이너의 사회조직 삼분론과 사회경제사상 - 윤선구 본문
루돌프 슈타이너의 사회조직 삼분론과 사회경제사상
윤선구
(서울대 교수, 철학자)
I. 슈타이너 사회사상의 출발점
1) 루돌프 슈타이너 사상의 성격
루돌프 슈타이너는 생애의 후기라고 할 수 있는 1919년에 “현재와 미래의 생활필연성에 있어서 사회 문제의 요점”(Die Kernpunkte der sozialen Frage in den Lebensnotwendigkeiten der Gegenwart und Zunkunft)이라는 저술과 ‘사회 조직의 삼분화’에 관한 일련의 논문과 강연을 통하여 그의 사상이 삶과 학문의 특정한 분야에 대한 관조적 이론이 아니라 총체적 삶의 문제에 대한 실천적인 사상임을 밝히고 있다.
정신의 영역과 교육의 역할을 특별히 강조하는 그의 사상은 ‘끔찍한 사건’인 일차세계대전을 초래한 자본주의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과 프롤레타리아-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슈타이너는 사회문제(Soziale Frage)를 삶의 문제(Lebensfrage)로 보고 있다. 사회문제는 삶의 문제이며, 삶의 문제는 바로 사회문제이다. 따라서 그는 총체적 삶에 관한 사상을 전개함에 있어 사회 조직을 정신 생활과 법적-정치적 생활, 그리고 경제 생활 등 세 영역으로 나누고 이에 대해 각각 정신 문제, 법의 문제, 경제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대답하는 것으로 그의 사상을 전개한다.
이러한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함에 있어서 그는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한다. 이것은 그가 일정 부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견해를 같이하며 다른 한편으로 그들과 생각을 달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에서는 그들과 견해를 같이 하지만 이에 대한 해결방법에 있어서 그들과 견해를 달리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경제가 정치 및 정신생활을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현실에 대해서는 이를 개혁해야 할 과제로 보고 비판하지만, 이와 반대로 경제생활과 정신생활을 정치생활에 종속시키는 마르크스주의적 처방에 반대한다.
2) 자본주의 사회비판
마르크스가 사회전체를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로 이분화하는 데 대하여 슈타이너는 상부구조를 더 세분화하여 정신적 생활과 법적-정치적 생활의 두 영역으로 나눔으로서 하부구조에 해당하는 경제생활과 더불어 사회조직을 삼분화한다. 이러한 사회조직의 삼분화는 현대사회에 있어서의 정치, 경제, 교육의 독립성에 대한 요청과 상응한다. 그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실사회의 구조에 있어서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에 상응하지 못한다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비판에 동의한다(23f). 이것을 그는 작은 옷을 걸친 사람에 비유한다. 즉 인간의 몸집에 해당하는 하부구조는 발전하였는데 옷에 해당하는 상부구조는 여전히 낡은 정치적 법률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22).
그에 의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에 상응하지 못함으로서 사회적 손상이 발생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정신생활과 법적-정치적 생활이 경제생활에 종속되어 있다.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생활의 양식과 방법에 따라 정신생활과 법-정치생활이 결정된다. 경제적인 강자는 교육을 독점하고, 경제적 약자는 무교육 상태에 머무른다(23). 경제적 강자는 정치를 지배하고, 정치 또는국가가 정신 생활, 특히 교육과 학문에 관여함으로서 정신 생활은 독자성을 상실하였다. “정신 생활은 그 자체로부터 형성되지 못하고, 법적 생활, 국가 생활, 정치 생활, 경제 생활에 순응된다”(23).
이러한 정신 생활의 경제 및 정치 생활에의 종속은 무엇보다도 사회 변혁에 대한 정신의 무기력 상태를 초래한다. 여기서 슈타이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괴리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손상을 마르크스와는 달리 보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에게서는 주로 자본가 계급에 의한 노동자 계급의 경제적 착취가 문제인데 대하여, 슈타이너는 정신 생활의 의존성과 무기력을 들고 있는 것이다.
3)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
그는 아담 스미스, 리카르도 등 근대의 국민경제학파들의 이론이 이러한 사회적 손상을 해소하려 하지 않고 사회를 단순히 관조만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10). 그는 사회경제이론은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지향해야 한다고 봄으로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입장을 같이 한다. 그에게는 현실을 이해하고 서술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적 손상을 제거할 수 있는 행동 프로그램을 제시하는것이중요하다(16).
그러나 그는 주요한 부분에서 마르크스주의 입장에 반대하는데, 첫째는 마르크스 및 그의 추종자들이 경제 생활만을 실재로 인정하고 정신 및 정치 생활을 이데올로기로 보는 것을 반대한다. 마르크스주의에 의하면 상부구조(Uerbau)인 법, 도덕, 종교, 예술, 학문 등은 ‘단순한 사고의 형성물’(bloßes Gedankengebilde)로서 유일한 실재인 생산관계(Produktionsverhatnis) 위에 피어오르는 “연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15). 슈타이너는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정신 생활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16). 그러나 그것은 정신 생활의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의해 손상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이 비어 있는 정신 생활을 어떻게 충만하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에게 있어 “정신 문제”를 이룬다.
둘째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봄으로써, 유일한 실재로서의 경제 생활이 그 자체로서 새로운 정신 관계 및 법적 관계를 산출한다고 주장하는데, 슈타이너는 이것을 ‘미신’이라고 비판한다(24). 슈타이너 자신은 이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하부구조의 발전은 상부구조의 발전을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즉 하부구조가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상부구조를 형성하는 것은 동구의 실패에서 볼 수 있듯이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하부구조가 성숙했다고 해서 이에 걸맞은 상부구조, 즉 정신, 법-정치적 생활이 자동적으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셋째로 마르크스가 대안으로제시한 이론에 의해 건설된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국가가 소멸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국가가 존재하며 자본주의 사회와 반대로 국가 생활이 정신 및 경제 생활을 지배한다. 즉 국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함으로서 국가 스스로가 자본가가 되었다. 슈타이너는 이러한 방법으로는 “사회적 손상”이 제거될 수 없다고 본다(42). 역시 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이 비판은 슈타이너가 말하는 “사회적 손상”이 단순히 자본가 계급에 의한 노동자 계급의 착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립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국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함으로서 계급의 착취는 소멸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4)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서의 사회조직삼분론
슈타이너에 의하면 오늘날(20세기 초) 사회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회를 포함하여) 정신 생활(Geistesleben)과, 법, 국가 또는 정치 생활(Rechts-, Staats- oder politisches Leben) 및 경제 생활 (Wirtsschaftsleben)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고 이로부터 사회적 손상이 발생한다. 앞에서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불일치로 인하여 사회적 손상이 발생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부구조와 상부구조, 즉 정신 생활 및 법-정치 생활이 일체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슈타이너는 이러한 사회적 손상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사회조직이 교육과 수업의 영역에 있어서 공적인 정신생활을 관리하는 독립적인 정신행정(Geistesverwaltung), 정치, 국가, 법 관계를 관장하는 독립적인 행정, 그리고 경제 생활을 관리하는 독립적인 행정으로 분할되어야 한다고 본다(39).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경제, 정치, 교육의 독립을 어느 정도 보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요구라기보다는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주장되었던 요구들을 전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주장되어온 요구들은 ‘정신적인 생활의 자유’, 정치에서의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적 공동체의 형성 등인데, 이들 세 요구들은 서로에 대하여 배타적이기 때문에, 사회가 유일한 통합적 행정체계를 갖게 되면 이요구들은 진지하게 수용되어질 수 없게 된다(39). 예를 들면, 민주주의는 몇몇 대표들에 의한 대의제를 전제하므로 모든 사람들의 평등을 주장하는 공동체의 사회성과 민주주의의 요구는 상호 충돌한다. 민주주의 원리에 의한 정치적 결정이 정신 생활, 특히 교육의 영역과 경제 생활의 영역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사회조직의 삼분론은 특히 정치논리로부터 교육과 경제를 독립시키고 교육과 경제도 서로 독립시키자는 주장이다. 정치는 모든 성숙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부분이지만 교육과 경제의 문제는 단지 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자율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즉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까 하는 문제는 정치와 경제 논리로부터 독립하여 교사들 스스로가 결정해야 한다고 본다. 교사는 동시에 정신 문제를 관장하는 행정기구의 관리자가 되어야 한다. 슈타이너는 이렇게 정신 영역, 특히 교육 영역이 독립적으로 됨으로서만 개개인이 동시에 정치적 생활과 경제 생활의 종사자가 될 때, 정신이 정치와 경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된다. 즉, 정신은 교육이 독립적이 됨으로서만 정신은 실천적으로 될 수 있다. 경제도 마찬가지로 정치 및 교육의 영역에서 독립되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사회조직의 삼분은 사회적 손상을 제거하고 조화로운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 전제조건일 뿐이고 각각의 영역은 해결해야 할 고유한 과제가 제시되는데 이것이 세 가지로 구성되는 슈타이너의 ‘삶의 문제’ 또는 ‘사회 문제’이다. 이러한 삼분화 이론의 궁극적 목적은 정신생활을 경제 및 정치 생활로부터 독립시키고, 교육을 통하여 정신을 강화시킴으로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단지 “유토피아”로서만 제시할 수밖에 없었던 이상적인 사회를 실현하자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II. 세 가지 문제로서의 사회문제
1. 정신문제
1) 국민경제학파에 대한 비판 - 현실을 관조할 뿐임
마르크스는 독일의 관념론자들의 주장에 반대하여 인간의 정신이 사회문제 해결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음을 간파했는데, 슈타이너도 현실적으로 이를 인정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견해는 유물론적-형이상학적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는데 반하여, 슈타이너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이 현실문제에 무기력한 것은 정신의 본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에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교육을 통하여 정신의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의 정신 문제에 대한 대답은 “정신 생활이 독자성을 통하여 실제로 국가-와 경제 생활에 생산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41). 그는 정신 문제(Geistesfrage)를 제기함에 있어, 아담 스미스, 리카르도 등의 국민경제학파와, 푸리에, 루이스 블랑, 셍 시몽 등의 소위 공상적 사회주의자, 그리고 근대의 자연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세 가지의 과제로 표현하고 있다.
봉건시대 이후 근대기술과 자본주의의 발달로 경제활동이 복잡해짐에 따라, 국민경제가 하나의 연구, 사유의 대상으로 대두하게 되는데 중농주의 및 중상주의학파를 뒤이은 아담 스미스와 리카르도 등의 국민경제학파들은 국민경제 현상의 특정한 한 흐름만을 주목함으로서, 국민경제적 생활을 형성할 법칙을 발견하려 노력하였다(10). 그러나 슈타이너에 의하면 이들이 제시한 경제 법칙들은 일면적이기 때문에 일부의 사실에는 타당하나 또 다른 사실에는 타당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국민경제학이 대학에서까지 연구하는 하나의 학문으로 발전하면서 이것은 인간의 전 경제-사회적 생활을 탐구하려 시도하게 되었고, Roscher와Wagner 등에 이르러서 국민경제학은 경제 생활을 형성하는 노력을 중단하고, 현실을 고찰하는 법칙의 발견에만 치중하게 된다. 학문적 국민경제학은 인간의 생활 속에 실천적으로 관여하는 학문이 아니라, 단지 관조하는 학문이 되고만 것이다(10).
2) 공상적 사회주의 - 실현가능성이 없음, 유토피아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푸리에, 셍 시몽, 루이스 블랑 등과 같은 관용적이고 인간친화적인 동포애를 지닌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그것이 실현될 경우 사회적 손상이 사라지게 될 이상적 사회 모델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이들의 사상을 유토피아라고 부른다. 아무리 이상적인 사회이론을 제시한다 해도, 인간의 의지, 특히 유산자들의 의지는 이 이론을 실현할 생각을 갖지 않는다. 마르크스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이들의 사상이 공상적이기 때문에 실현가능성이 없다고 보지만, 슈타이너는 푸리에, 셍 시몽의 주장이 실제로 공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이것을 공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정신적 실천력이 빈약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3) 자본주의적 경제질서와 기술문명에서의 과학지향적 세계관의 이데올로기성
논의를 치밀하게 전개하고 있지는 않지만, 슈타이너는 인간의 정신이 사회문제에 관하여 무기력하게 된 원인이 근대의 자연과학중심적 세계관에 기인한다고 본다. 근대에 자본주의와 더불어 기술과 자연과학을 숭상하는 세계관이 대두하였다. 이러한 세계관은 기술과 자연과학의 발전에 큰 성과를 가져왔는데, 슈타이너는 이 새로운 세계관이 가져온 성과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 점에서 완전히 인류의 진보를 인정한다고 강조한다(12).
그러나 이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은 다른 측면에서 종교적이고, 예술적-미학적이며, 또한 윤리적인 구세계관의 쇠퇴를 초래하였다. 슈타이너에 의하면 구세계관은 그에 대한 평가가 어떻든 인간본질의 정신성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 세계관은 삶에 대한 추동력, 또는 사회적 추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지향된 신세계관은 추상적인 자연법칙을 가지고 자연현상들과 인간의 육체적-물리적 성질을 고찰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인다. 그것은 인간의 내적 본질에 대해서는 해답을 주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
슈타이너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세계관이 소위 부르주아 계급 또는 보수주의자들에게서나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또는 사회주의 사상가들에게서 공통적이라고 보고 있다. 과학적 세계관에 의해 발전된 기술문명이 노동자들을 그들의 생산품으로부터 소외시켰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그들 스스로가 젖어있는 과학적 세계관을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한다(14). 광범한 인민대중들에게는 따라서 경제 생활만이 실재(Wirklichkeit)이고 그들이 ‘상부구조’라고 부르는 법, 도덕, 종교, 예술, 과학 등 정신 및 정치 생활은 단순한 사유구성물, 즉 이데올로기에 다름아니라고 본다.
슈타이너에 의하면 아마도 부르주아 계급을 의미하는 듯한 지도계층들은 머리로는 자연과학주의적 세계관을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 전통적인 구세계관을 여전히 버리지 않고 있다. 그들은 새로운 경제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구시대의 전통에 머무르고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서는 정신 생활과 경제 생활 사이에 괴리가 발생한다. 즉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15).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을 의미하는 듯한 광범한 대중들은 새로운 정신 생활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정신 생활은 그것이 이데올로기라고 보기 때문에 그들의 가슴과 영혼을 채워주지 못한다. 따라서 양쪽 계층 모두에게서 정신생활의 빈곤이 나타난다.
4) 정신 문제
이 “새로운 정신 생활의 공허”(Die Leerheit des neueren Geisteslebens)가 바로 사회 문제의 첫 번째 분지인 “정신 문제”를 이룬다. 그것의 일반적인 형태는 “사회 문제를 극복할 수 있기 위하여 인간정신이 어떠하여야 하는가 하는 형태로 표현된다”. 그러나 앞에서 서술한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 따라 세 가지의 특수한 형태로 서술될 수 있다. 첫째로 국민경제학파의 비실천적이고 관조적인 경향과 관련해서 정신 문제는 “실제적인 사회적 의지의 토대가 되는 그러한 국민경제학이 나타날 수 있기 위해서 정신이 어떠해야 하는가”의 형태가 되며, 둘째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은 사회적 이상이 실현될 수 있다고 믿기 위하여 정신 생활은 어떡해야 하는가, 그리고 셋째로 자연과학적 세계관과 관련해서 정신 문제는“정신 생활이 이데올로기를 산출하지 않고, 인간이 실제로 사회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줄 수 있도록 사회의 사실에 개입할 수 있기 위하여, 정신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형태가 된다.
2. 법 문제(국가, 정치 문제)
법 문제는 현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에 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통찰에 기인한다. 친자본주의적 사회비평가인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은 1919년 당시의 미국사회에 대하여 경제적 제반관계는 진보했는데 법의 이념이나 정치적 공동체 생활의 이념은 이에 미치지 못하고 이전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새로운 상황에 따라 경제 활동을 하고 있는데 반해 낡은관점에서 경제에 관하여 사고하고 입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낡은 정치적, 법적 이념을 가지고 전적으로 새로운 경제 질서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드로 윌슨의 미국사회 비판은 자본주의에 대해 적대적인 레닌 및 트로츠키와 같은 사회주의자들에 의한 자본주의 비판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그런데 바로 이 법적 생활과 경제 생활의 불일치에 오늘날의 사회적 손상이 존재한다. 따라서 법 문제로서의 사회 문제는 “근대적 경제 생활의 요청을 지배할 수 있기 위하여 법 또는정치적 이념이 어떻게 형성되어야 할 것인가”(20) 또는 “진보된 경제 관계 하에서 어떤 법 제도가 인간을 다시 평화롭게 살도록 할 수 있는가”(27) 하는 문제가 된다.
3. 경제 문제
슈타이너의 경제 문제는 정신 문제나 법 문제처럼 분명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그는 세 번째 사회 문제로서의 경제 문제를 우선 “어떤 사회구조가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인간적인 공동 사회의 복리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그런 일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는가” 하는 형태로 정형화한다(27). 이것은 “사회적 손상이 사라지도록 하기 위해서 인류의 미래에 경제 생활은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하는가” 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물음과 사실상 동일한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42). 이에 대한 슈타이너의 대답은 그의 독특한 경제사상을 이루고 있는데, 그의 경제사상은 사회주의의 통제경제와 자본주의의 자유시장경제의 중간적인 경제체제를 이상적인 경제체제로 보고있다.
그것은 국가와 정신 생활로부터 독립된, 전적으로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시장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닮고 있지만, 그러나 두 가지 점에서 자유시장경제와는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자유주의 시장경제에서는 노동도 상품으로 보고 노동의 거래도 시장 안에서 시장의 원리에 따라 일어나지만 슈타이너는 노동의 상품성을 부정한다. 따라서 노동관계와 노동조건의 문제는 시장에서 떼어내 정치 생활 안으로 편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로 그의 시장에서는 공급을 무질서에 맡기지 않고 일종의 생산자조합(Assoziation)을 만들어 생산을 자율 관리함으로써 시장의 무정부 상태에서 오는 단점을 제거하고자 한다. 사회주의 통제경제체제와 다른 점은 가격이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 이외에도 생산자 조합이 중앙행정기구로부터 강제하는 조직이 아니라 개인생산자들의 자율적인 조직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슈타이너의 결사원리(Assoziatinsprinzip)에 의거한 시장의 변혁론(Umwandlung desMarktes)이 성립한다.
III. 경제문제: 슈타이너의 대안경제구조 (경제문제에 대한 대답)
1) 사회주의적 대안에 대한 비판
슈타이너의 시장변혁론과 결사의 원리는 사회주의자들의 대안경제체제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한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사회적 손상(구체적으로 말하면 자본가계급에 의한 노동계급의 착취)은 생산수단, 즉 자본이 사유화된 데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그것을 공동체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관리하면 그 손상이 사라지게 된다고 본다(42). 사회주의 진영에서 제기되는 생산수단의 공동관리 형태로는 국유화(Verstaatlichung), 공유화(Kommunaliserung), 소비조합(Komsumgenossenschaft), 노동자-생산조합(Arbeiter-Produktivgenossenschaft), 그리고 대조합(Großgenossenschaft) 등을 들 수 있는 데, 슈타이너에 의하면 이들은 모두 자유시장 경제체제의 올바른 대안이 될 수 없다. 국유화 내지는 공유화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를 자본가로 만드는 것이고, 소비조합은 특정 상품의 소비자들이 연합하여 생산을 통제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소비자가 생산자에 대한 독재자가 된다. 노동자-생산조합은 소비자들에 의한 생산의 독재를 방지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여기서는 개별노동자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그대로 내포된다. 마지막으로 대조합은 한 경제단위 내의 모든 소비자 생산자들이 연합하여 조합을 만듦으로써 조합의 중앙행정기구가 소비자들의 요구 및 생산과정을 통제하는 제도이다. 이것은 슈타이너에 의하면 당시 대부분의 경제체제개혁론자들에 의해 지지되고 있던, 동구권 국가들에서 시행하고 있던 제도로서 전형적인 국가 또는 정치에 의해 경제를 통제하는 제도이다(45). 이 제도는 경제활동 영역 밖에 있는 정치가들이 정치의 논리와 원리를 경제에 적용하려는 제도인데, 슈타이너에 의하면 이것은 사회적 손상을 제거하기보다는 동구에서 보듯이 오히려 더 큰 사회적 손상을 초래하고 있다.
2) 조합원칙(Genossenschaftsprinzip)과 결사원칙(Assoziationsprinzip)
이러한 정치에 의한 경제의 개입 또는 중앙행정조직에 의한 말단 생산조직의 통제는 자본가계급에 의한 노동자들의 착취는 제거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경제활동에 있어서 개인의 주도성(Initiative)을 위축시키는 문제점이 있다. 근대적 생산과정은 기술에 의존성이 매우 높다. 슈타이너는 근대 사회의 기술발전에 대하여 전적으로 긍정적인 입장을 취한다(11). 기술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전문지식을 가진개인의 주도성을 필요로 하고, 생산과정 또한 기술의존성이 높기 때문에 자본과 생산과정에 대한 개인의 주도성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슈타이너는 개인의 주도성을 배제하는 조합원칙(Genossenschaftsprinzip) 대신에 결사의 원칙(Assoziationsprinzip)을 제시한다.
조합의 원칙에 따르면 개인들은 먼저 결합체를 구성하고 결합체의 결정을 통하여 생산과정에 참여한다. 그러나 결사의 원칙에 따르면 전문적 지식을 가진 개인들이 생산에 종사한다. 생산과정은 전적으로 이러한 전문적 지식을 가진 경제 당사자들에게만 의존해야한다. 그 다음에 개인의 주도성에 근거한 생산을 토대로 생산하는 개인들이 결사체를 만들어 경제생활을 관리한다. 슈타이너에 의하면 결사원칙의 또다른 중요성은, 그것이 현대의 화폐 및 신용경제체제 하에서 소홀해질 수 있는 사회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데 있다. 이전의 물물교환의 자연경제 하에서는 모든 경제당사자들의 직접 접촉을 통하여 경제 생활이 이루어졌지만 화폐경제 하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 소비자 등이 직접 만나지 않고도 경제활동이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화폐경제 하에서는 인간생활의 사회성이 결핍되기 쉬운데 결사원칙을 통하여 사회생활을 촉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3) 노동문제
슈타이너는 결사의 원칙을 제시함에 있어 사회주의자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문제, 즉 노동자들이 생산한 잉여가치의 착취문제를 도외시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노동가치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잉여가치의 착취설이 타당하지만, 또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의 대가인 임금이 자본에 의해 지불되는 것도 사실이라고, 즉 자본이 노동의 기생물임과 노동의 대가인 임금의 창조자라는 상반된 주장이 모두 사실일 수 있다고 봄으로써 이 문제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고 있다(52).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 슈타이너는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을 논박했다기보다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를 인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자들의 본의는 자본의 생산성을 부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을 노동자들이 소유함으로써 잉여가치의 분배에 있어 자본가들의 몫을 배제하려는 데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자본의 생산성을 인정할 경우에는 노동과 자본 사이의 잉여가치의 공정한 분배와 미래의 경제체제에서는 노동이 더 이상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만이 문제가 된다. 그는 노동문제를 경제영역에서 분리하여 정치-법 영역으로 편입시킴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54). 그러면 노동은 더 이상 노동시장에서 사고파는 상품이 되지 않으며 분배는 투쟁이 아니라 정치적 협상을 통하여 공정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슈타이너는 노동은 그 자체로서는 경제활동의 대상이 아니고, 단지 노동의 산출물인 상품만이 경제 생활에서 문제된다고 본다(54). 여기에 슈타이너 경제사상의 독특성이 존재한다. 즉 그에 의하면 노동은 경제순환에 포함되어서는 안 되며, 시장은 단지 상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역할만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은 동등한 자격을 갖는 성숙한 인간들이 서로에 대하여 평가하는 법과 정치의 영역에 속하며, 여기서 노동의 방식, 시간, 성격 등이 결정된다.
슈타이너는 소비자에게 직접적으로 제공되는 노동인 서비스는 경제영역 안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까닭에 그가 법-정치 영역으로 이전시킨 노동은 생산자 또는 자본가가 지불하는 노동에 국한되는 것으로 보인다.
4) 시장의 변혁
슈타이너가 구상하는 사회조직의 삼분화 원리에 따른 경제영역, 즉 시장은 노동이 상품에서 배제되는 외에도 생산량, 즉 공급량의 결정이 시장의 무정부성, 즉 시장의 우연에 맡겨지지 않고 이성에 의해 조절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시장의 우연성 문제는 마르크스가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의 치명적 약점으로 비판하는 부분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가는 상품의 생산과 판매를 통해 잉여가치, 즉 이윤을 취하기 때문에 가급적 많이 생산하려 하고 이것을 통제하는 기능이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생산과잉에 빠지고 유통공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슈타이너는 이 문제를 생산자들 간에 또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결성된 결사체(Assoziation)에 의해 운영되는, 수요를 조사하고 생산량을 조절하는 일종의 시장조사기구를 두어 해결하고자 한다. 이것은 일종의 인위에 의한 시장개입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생산자들의 자율적 결사에 의해 관리된다는 점에서 생산에 대한 독재가 아니며, 사회주의적 통제경제처럼 수요를 통제하지도 않는다. 다만 수요를 조사하여 생산을 조절할 뿐이다. 슈타이너는 자유시장의 기능을 수요와 공급에 의한가격결정으로 국한시킨다. 시장가격이 비싸지는 경향을 나타내면 이것은 생산이 부족한 것을 의미하고, 가격이 싸지는 경향을 보이면 이것은 생산을 축소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격이 싼가, 비싼가 하는 기준은 그 가격으로 상품을 판매할 때 생산자가 이윤을 남길 수 있는지 여부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장제도의 성패는 노동의 대가, 즉 임금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임금은 상품의 생산원가에 포함되기 때문에, 생산자가 이윤을 남길 수 있는가의 문제는 임금의 수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IV. 맺음말
슈타이너의 사회사상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사회주의 사상의 한계에 대하여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과 사회주의적 대안의 한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고 문제의 핵심에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사상은 특히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이데올로기로 간주된 인간의 정신 생활과 정치 영역의 의미를 회복시키려 하는 점에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정신 생활의 독자적인 의미를 확립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정신 생활, 특히 교육을 통하여 자본주의적 현실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사회개혁의 성패가 그가 개발한 교육방법이 과연 이러한 목적에 실제로 효과적인가, 즉 인간정신이 경제 생활과 정치 생활에서 의도하는 바를 실제로 실현할수 있을 만큼 강한 의지력을 갖도록 하는 데 효과적일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달려 있는 외에도, 순환론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즉 그의 생각에 의하면 교육이 올바로 이루어지고 따라서정신이 강화될 수 있으려면, 먼저 사회조직에 있어서 세 분야의독립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사회조직의 삼분화는 정치적으로 결정하거나 혁명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만일 정치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면 이는 순환논리가 되고, 이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혁명의 방법만이 남게 된다. 그러나 슈타이너의 의도는 사회 문제를 혁명에 의해 해결하지 않고 교육에 의해 해결하려 한 것이므로 결국 순환론의 문제를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인지학 > 사회삼원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슈타이너의 사회삼원론 - 엘마르 슈뢰더 (0) | 2023.10.10 |
---|---|
마르크스주의와 삼원론적 사회 질서 - 루돌프 슈타이너 (0) | 2023.08.21 |
왜 근대인가 - 김만권 (0) | 2022.08.30 |
백성욱 박사의 삼지(三枝)사회조직론 연구 - 정천구 (2) (0) | 2022.04.12 |
백성욱 박사의 삼지(三枝)사회조직론 연구 - 정천구 (1) (0) | 2022.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