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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급교사를 위한 조언 : 사춘기 청소년을 위한 발도르프 교육 - 루돌프 슈타이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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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급교사를 위한 조언 : 사춘기 청소년을 위한 발도르프 교육 - 루돌프 슈타이너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1. 9. 1. 20:10

상급교사를 위한 조언 : 

사춘기 청소년을 위한 발도르프 교육

 

 

루돌프 슈타이너

(슈타이너사상연구소 김훈태 정리)

 

 

어린이가 사춘기가 되면 자기 안에서 자기를 둘러싼 세상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일깨우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교육받는 모든 방식에서 청소년들은 그들 주변의 세상에, 그 세상의 법칙에, 그리고 그 과정의 원인과 결과에 주의를 돌리도록 이끌어져야 합니다. 주변의 사람뿐 아니라 모든 것, 이를테면 음악이든 건축이든 그 모든 것은 청소년들 내부에서 계속해서 질문이 울려 퍼질 수 있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질문은 자연, 우주, 세상만물, 인간의 영혼, 역사, 사회에 관한 것이 되고, 그리하여 수수께끼들은 자신의 젊은 영혼 안에서 계속해서 일어나야 합니다.

 

아스트랄체Astralleib 또는 영혼체 Seelenleib가 사춘기에 자유로워지면 그 힘은 이제 이런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자유롭게 쓰입니다. (이 힘은 욕망 Begierde의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본능 또는 천성 Instinkt에서 성향 또는 충동 Trieb으로, 다시 욕망으로 발달합니다. 아스트랄체는 본능과 성향을 더욱 내적인 것으로 만들 뿐 아니라 의식적으로 만듭니다. 욕구는 성향보다 영혼적인 특성을 더 많이 갖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관한 이런 수수께끼와 그 표현들이 젊은 영혼 안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그 힘들은 다른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아스트랄체의 힘이 자유로워져서 세상에 관한 수수께끼들에 강렬한 관심을 일깨우는 데 쓰이지 못하면, 이 힘은 오늘날 청소년 문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들을 반사회적으로 변화시킵니다. 아스트랄체의 힘은 본능적인 충동의 두 가지 경향으로 변화하는데 하나는 힘(권력, 폭력)에의 심취이고, 또 하나는 성욕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교육은 힘에의 심취와 성욕을 이런 변화의 이차적인 결과로 보지 않습니다. 20세 혹은 21세의 젊은이들은 실제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하지만(욕구는 동기 Motiv로 발달해야 합니다. 동기는 자아가 지배적입니다.) 그런 변화들을 사춘기의 인간 안에 있는 본성의 요소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젊은이들이 올바로 교육을 받는다면 이 시기에 힘에의 심취나 성욕에 관해 말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 시기에 그런 문제들에 관해 언급하는 것 자체가 이미 문제의 징후인 것입니다. 우리의 교육, 예술, 과학은 잘못되어 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점점 더 이런 질문들이 대두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들에 많은 비중을 둔다는 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무기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질주의적인 세계관의 시대에 사람들은 더욱 더 무기력해집니다.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세상에 대한 진실한 관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우리 주변의 세상에 충분히 관심을 갖지 않으면 우리는 자기 안으로 던져집니다. 모두가 자기 안으로 들어가버린, 현대문명의 반사회적인 특성에 의해 그런 문제들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너무 큰 관심을 가지면서,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세상을 향한 관심에는 쓰지 않은 채 스스로 어떻게 느끼고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게 무엇인지를 신경 쓰느라 늘 바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자기 자신에게 전념하는 것이 최소한으로 허용되는 인생의 시기는 14세에서 21세 사이(사춘기 청소년)의 시기일 뿐입니다. 오히려 관심을 외부, 즉 세상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교육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판단을 하는 능력은 이 세 번째 7년 주기에 성숙해지며, 모든 분야에서 교육은 세상과의 관계성으로 향해져야 합니다. 세상의 일은 청소년들을 강력하게 사로잡기 때문에 그들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로부터 주의를 돌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시다시피 개인적인 감정에 관심을 갖는 한 고통은 그 감정에 관해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커지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감정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며, 그 고통은 우리가 그것에 관해 생각함에 따라, 다시 말해 집착을 할수록 증가하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고통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치료는 자신의 감정에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관심을 갖고 자기 감정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14세와 21세 사이의 젊은이들 내면에서 발달하는 것은 고통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신체에서 아스트랄체가 자유로워지는 사춘기 이후의 시기는 진실로 부드러운 고통이 계속되는 체험을 합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자기 몰두에서 방향을 돌려 바깥세상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이러한 종류의 고통 체험은 우리를 계속해서 자기 몰두로 향하게 합니다. 만일 교사가 10세 혹은 12세를 가르치면서 실수를 한다 해도 교사와 학생 간에 신뢰관계가 있는 한 이것은 그렇게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 말이 이 시기에 가능한 한 실수를 많이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교사의 권위에 대한 학생의 감정은 아마도 잠시 떨어질 것이지만 그런 것은 불공평에 관한 것보다 상대적으로 빨리 잊혀집니다. 한편 14세에서 21세 사이의 학생들 앞에 설 때는 절대로 숨겨진 무능함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이 시기에 학생이 내적으로 경험하는 질문들을 표현하지 못한다면 교사는 이것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교사는 수업에서 그러한 명확한 표현들을 가져오고, 질문을 할 때 학생들 내면에서 일어나는 깨어나는 느낌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런 작업을 하지 못하면 젊은이들의 영혼 안에서 반영된 모든 것은 잠의 세계로, 즉 잠자는 의식 상태로 빠져듭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며 심하면 몸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내면에서 표현되지 못한 의문들은 말 그대로 유독한 물질이 됩니다. 이런 독성들은 의식적으로 잠자는 상태에서 생성되는데, 바로 그때 의식을 깨워서 실제로는 만들어지는 대신 없어지고 변형되어야 합니다.

 

독성은 수업에 임하는 학생들의 두뇌의 짐이 되고 점차 모든 것이 침체되고 꽉 막혀집니다. 이것은 반드시 피해야 하고 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감정이 학생들 안에서 일어나지 않아야만 피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제 또 선생님은 우리에게 올바른 답을 주는 데 실패했어. 우리는 절대 답을 얻을 수 없어. 우리는 만족할 만한 답을 얻을 수 없어!” 그것이 바로 숨겨진 무능함이며, 아이들이 다음과 같은 것을 느낄 때 일어나는 자기 노출입니다. 선생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답을 주는 법이 없어!” 이것은 교사의 개인적인 능력과 무능력만이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며, 오히려 문제는 교육적인 방법입니다.

 

우리가 이 시기의 청소년들에게 정보를 지나치게 많이 쏟아 붓거나 젊은이들의 의문이나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질문들을 고취하는 방식으로 가르치지 않는다면, (비록 그것이 더 객관적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숨겨진 무능함을 표출하는 꼴이 됩니다. 아시다시피 교사는 9학년에서 10학년으로 가는 학생들의 변화를 다룰 때 충만한 의식으로 계속해서 학생들 속으로 스며들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과정의 전체 변화를 함께 하는 것만이 교육이 과정 자체에 관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6,7세의 아이들을 만난다면 그 과정은 이미 학교에 들어간다는 사실로 정리가 되고 우리는 다른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9학년에서 10학년으로 가는 청소년을 이끌 때는 또 다른 생활 상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아이들은 스스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정말 놀라워! 도대체 우리 선생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이제까지 우리는 선생님을 할 말이 많은 꽤 밝은 빛 정도로 알아왔는데, 이제 선생님은 더 인간답게 말씀하기 시작하시네. 왜 전체 세계가 선생님을 통해 말하고 있는 걸까?”

 

청소년들이 세상에 대한 의문에 가장 강렬한 관심을 느끼고, 청소년들에게 이것을 알릴 수 있을 때도 역시 세상은 교사를 통해 말해집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활기가 생겨야 합니다. 활기는 교사가 이 시기 청소년들에게 가져와야 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활기는 상상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비록 학생들은 판단력을 계발하는 중이지만 그 판단은 실제로 상상력에서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여러분이 지성을 지적으로만 다룬다면, 그리고 그것을 독특한 상상과 함께 다룰 수 없다면 여러분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사는 학생들과 한배를 타지 못하게 됩니다.

 

청소년들은 상상력을 요구합니다. 여러분은 활기차게 그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 활기는 학생들에게 확신을 줄 것입니다. 회의주의는 이 시기, 즉 전반기의 청소년들에게 주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14세에서 18세 사이의 시기 동안 가장 손상된 판단력은 염세적이면서 지적인 방식에서 옵니다. “이것은 알 수 없는 거야.” 이것은 청소년의 영혼을 파괴합니다. 18세 이후에 다소 의심하는 것은 가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4세에서 18세 사이에서는 영혼이 망가지고 약해지며 청소년들에게 염세주의를 얹어줍니다. 청소년들에게 나약한 염세주의를 가져오지 않게 하는 것이 여러분이 수업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교사로서 자기 돌아보기를 많이 하고 망상에 빠지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청소년들이 수업을 하는 교사보다 자신이 더 총명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참으로 치명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부차적인 문제로 (이것이 비록 첫 수업에서는 잘 안 될지라도) 학생들이 듣는 일에 매우 열중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고 그러해야만 합니다. 아마 그들은 자신들의 부주의와 지루함을 교사의 매너리즘으로 돌릴 것입니다. 이때 교사의 숨겨진 무능은 매우 치명적입니다.

 

, 친애하는 동료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힘에의 심취나 성욕 같은 문제를 본성적인 것의 결과로 치부한다면, 청소년들을 자신의 통제 하에서 용감하게 그리고 관대하게 교육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그 시작부터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더 나이든 학생들과, 말하자면 의과대학 같은 곳에서 실수하는 것은 가벼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 어린 청소년들에게 교육하는 것은 이후 그들의 삶에서 엄청나게 파괴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이를 테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파괴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세상에 대한 바른 관심을 15세 혹은 16세에 일깨우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에 대한 올바른 관심은 불가능합니다.

 

만일 청소년들이 태양계의 기원에 대해 칸트-라플라스의 성운설(Kant-Laplace hypothesis)만을 배우고 천문학을 끝낸다면, 그래서 그들의 두뇌에 우주에 관한 이런 정보만을 억지로 밀어 넣는다면 그들은 사회적인 관계에서 현대문명에서 보게 되는 그저 그런 남녀들 정도로 될 것입니다. 현대문명에서 보는 그들은 사회개혁을 외치지만 실제로 그들의 영혼 안에는 반사회적인 자극들에서 반사회적인 힘들을 가져올 뿐입니다. 사회문제에 대해 큰소리치는 논리적인 사람들은 사실 반사회적인 존재들이라고 저는 종종 말해 왔습니다.

 

14세에서 18세 사이에 교사와 학생 간에 아주 사려 깊은 방식을 통해 근본적으로 도덕적인 관계를 세워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충분치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도덕성은 아주 넓은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교사로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 안에서 우리의 과제에 대한 매우 깊은 책임감을 불러와야 합니다. 이런 도덕적인 태도는 주관성과 개인성으로 왜곡된 것에 지나친 영향을 받지 않는 가운데, 그 자체로 보여져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실제로 측정할 수 없는 수많은 것이 교사로부터 학생들에게로 갑니다. 한탄하는 교사들, 달라지지 않고 늘 침울한 교사들, 헤아릴 수 없이 낮은 자아감을 지니고 있는 교사들은 이 시기의 아이들에게 치명적인 심상을 주고, 혹은 그렇지 않다면 끔찍한 개혁을 선동할 것입니다. 어떤 접근방식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가 숨겨진 무능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며, 내적으로 깊이 도덕적인 태도로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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