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상급과정과 진로 - 이상을 향한 삶 첫날 2부 (미하엘 데부스) 본문

발도르프교육학/발도르프 상급학교

상급과정과 진로 - 이상을 향한 삶 첫날 2부 (미하엘 데부스)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1. 9. 1. 20:18

2015년 미하엘 데부스 선생님 초청강연 첫날 2부

 

2015 7 13

통역: 이은경

 

 

<2>

 

과연 청소년기 학생들은 내용적으로 인생의 어느 쪽에 방향을 두어야 할까요?”

 

아까 이분이 부모님의 태도에서 본보기를 본다면 내용적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을 했어요. 내용적이라는 측면이 한국어에서 잘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아요. 한 번 더 이야기해볼게요. ‘이 어른이 이야기하는 것 이 어른이 어떤지는 다른 것이지요. ‘이 어른이 이야기하는 것 이 어른이 어떤 사람인지가 아이들한테는 아까 하느님을 바라본다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서로 같아요.

 

그러나 청소년기 학생들에게는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른들이 누구인가가 중요해요. 그렇기 때문에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 저울질해요. 그것이 바로 아까 이야기한 내용상에서 본보기가 아니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어떻든 간에 청소년기에는 자기 방향성을 갖도록, 어디로 향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을 찾아야 해요. 그것을 제가 내용상의 방향성이라고 표현했어요. 여러분 스스로 알아야 해요. 이런 상황에서 어디를 봐야 하나요? 여기에 어떤 마법의 단어가 있네요. 하지만 제가 이야기하기 전에 여러분이 답을 가지고 오셨지요? 여러분, 쉬는 시간에 깨달음을 얻으셨나요?

 

* 위의 질문에 대한 청중의 답: 꿈이요. 진짜 내가 원하는 삶, 이상, 종교... 여러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고 결정을 내가 하는 것.

 

그러면 무엇을 통해서 내가 스스로 결정하지요? (답변 : 마음에 드는 것) 뭐가 마음에 드는지 어떻게 알지요? (답변 : 느낌일 수도 있고, 가장 마음이 가는 곳으로) 예를 들어, 세 사람한테 물어서 세 개의 조언을 얻었다면 어떻게 결정할 수 있지요? 누가 나에게 이야기하죠? 세 개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면, 왜 내가 그것을 결정하지요? (답변 : 훈련된 부분과 역사적인 부분 등을 조합하여 내가 그것이 옳다고 결정하는 거고, 결정에 책임을 지는 거지요.) 혹시 잘못 결정한 적 있으세요? (답변 : ) 그때 결과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되었나요? (답변 : 책임진 것도 있고 못 진 것도 있어요.) 몇 퍼센트가 옳은 결정이었고, 몇 퍼센트가 틀린 결정이었나요? (답변 : 제가 한 결정이 저를 만들어왔다고 생각해요.) 맞아요. 그러면 모든 결정이 옳았던 거네요. 그럼에도 아무렇게나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요. 임의로 결정하는 건 아니에요.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답을 얻었어요. , 이상, 종교, 조언 등등.

 

이제 제가 마법의 단어를 이야기할게요. 사실은 세 개의 질문이 있어요.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 “나는 무엇을 하고 싶지?”,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 그렇다면 하고 싶은 것과 하고자 하는 것이 일치하는가? 이것을 해야 하는데,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어요. 세 번째 질문은 내가 진정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예요.

 

내가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한 예를 이전 강연에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발도르프 학교는 오전 10시에 온도를 재요. 30도 이상인 경우에는 수업이 없습니다. 그런데 온도계를 아무 데나 두면 안 돼요. 특별한 장소에 두어야 해요. 왜냐하면 상급 학생들이 성냥불을 켜서 갖다 댈 수도 있거든요. 여러분들이 청소년들한테 가서 무더위인데 수업을 결강할까요?” 하면 , 그래요!”라고 대답하겠지요. “그럼, 내일도 수업을 없앨까요?” “, 그래요.” “그럼, 11시가 아니라 10시부터 수업을 없앨까요?”, “!” “그 다음 날은 이것도 저것도 없애고 아예 수업 없는 날로 할까?”, “.” “다음 주 내내 무더위인데 수업을 없앨까요? 한 달 내내 수업을 없앨까요?”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청소년들은 더 이상 수업이 없어지길 바라지 않아요. 어느 순간은 물론 무더위로 수업이 없어지길 바라지만 사실은 학교에 다니고 싶어 해요.

 

그때 당파를 나누어서 교사들이 학교파라면, 학생들은 수업 결강파인 거예요. 근데 교사가 당파를 옮겨가면 학생들은 사실 자신도 배우고 싶다는 것을 느껴요. ‘무더위 때문에 수업이 없어지길 바라지만, 사실 나는 배우고 싶어.’ 물론 수업이 없으면 재밌을 수 있고, 학교에 가면 힘들겠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느낌이 있다면, 어려운 상황이 생길지라도 결정을 할 수 있어요.

 

학생에게 이야기해요. “이걸 하면 네가 경력을 쌓을 수 있어. 돈을 많이 벌어서 집을 짓게 될 테고. 좋겠지?” 그리고 또 이야기해요. “무더위니까 수업을 없애자.” 그러나 학생은 배우고 싶어 해요. 남아서 다른 직업을 선택해야 할지도 몰라요. 직업을 통해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하고 싶기 때문이지요.(??)

 

저는 슈트트가르트 교육기관에서 일한 적이 있어요. 거기에 열심히 일하는 비서분이 있었는데, 그 전에는 어떤 산업 시설에서 일했어요. 이쪽 교육기관에서는 월급을 얼마나 줄 수 있을지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어요. 이분에게 결정할 시간을 주었을 때, 월급에 관한 문제가 있었지만 오겠다고 결정했어요. 월급이 줄었지만 그분은 이곳 사람들과 일하고 싶어 했어요. “저는 평화롭게 일하고 싶어요. 그것이 한 달에 100만 원을 더 받는 것보다 중요해요.”

 

그러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실제로 원하는 일을 찾는 것이 항상 편한 것은 아니에요. 여러분은 학부모로서 청소년들에게 완전한 신뢰를 줄 수 있어요. 언제냐면 청소년이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을 때. 학생이 방황을 하든 무엇을 하든 중요하지 않아요. 하지만 학생들이 그런 진정한 질문을 갖고 있다면, 그러면 저는 그것을 지지할 거예요. 하지만 어떤 학생이 진정한 질문도 없는 상태에서 시간과 힘만 소비한다면 학생에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너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줄 수 없다. 이제는 필요한 돈을 네가 벌어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를 부모가 가지고 있어야 해요.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일까? 이것이 이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거예요. 각자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이상을 가지고 있어요. 일반적인 이상은 없어요. 자유의 이상, 평등의 이상, 박애의 이상. 이것은 추상적인 이상으로서, 바로 정치적인 문제로 들어가게 돼요. 이런 현상을 표출한 것을 사회주의, 공산주의에서 볼 수 있었어요. “모든 사람은 동등해요.” 그러나 이거 이렇게 굴러가지 않아요.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고 해서 사회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아요. 이것이 사회주의적인 추상이에요.

 

사람들은 다르지요. 각자 모든 사람이 자기의 개별적인 이상을 가지고 있어요. 여기에서 어리석은 것은 내가 이상을 가진 것은 알지만, 내가 이상을 알고 있지는 않아요. 이것은 예를 들어 내가 결혼했는데, 내 남편이 누구인지 몰라요 하는 것과 같아요. 그런 경우는 대부분 없지요. 다행히 없지요. “어떻게 내 이상을 찾을 수 있을까?” 이것이 청소년기의 진정한 질문입니다. 그러면 이 질문은 얼마 동안이나 청소년기에 이상을 가질 수 있고, 언제 갑자기 멈출까요? ‘여러분 이상에 대해 힘들어 하나요?’ 그렇게 힘들어 하는 시기가 끝났나요. 객관적이고 그렇게 이상에 좌지우지할 때가 아니지요. 뭐가 굴러가는지 잘 알고 있지요. 이것을 보통 사람들이 인생의 경험이라고 말해요. 청소년들이 여러분들이 이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느낀다면, 여러분은 내용적으로 본보기가 아닐뿐더러, 사람으로서도 사람의 대표적인 모습으로도 보이지 않을 거예요. 배움이 멈추는 것이지요.

 

여기서 질문은 이상이란 무엇인가?”예요. 질문을 드릴 텐데, 이건 여러분이 가지고 가는 질문이에요. 제가 작년에 청소년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어요. 여러분에게도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제 개인적 경험인데요. 제가 만 여섯 살짜리 아이들에게 선생님으로 있었던 체험이에요. 1학년이지요. 저는 상급 학년 담당이지만 1학년 가르치는 거 엄청나게 힘들어요. 아이들의 언어, 아이들의 상상력, 그 모든 것을 시나 그림 속에서 설명해야 하잖아요. 힘들어요. 직접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어요. 산업 시설 쪽에서 일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는데요. 1학년 교실에서 4주 동안 참관 수업을 해보세요. 어떻게 아이들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설명해 주는 이야기들 대부분을 자신이 창작해내야 해요. 예를 들어, 물방울 이야기가 있어요. 떨어지는 물방울이 땅에 스며들고, 스며들면서 모이는 체험들, 이 물방울이 여행을 떠나서 어느 순간에는 다시 돌아와요. 아이들에게는 긴장감 도는 이야기에요. 어른은 그 이야기를 창작하기 위해 몇 시간 동안 고민을 해야 해요. 지금 이야기를 해보면 이해할 수 있어요.

 

왜 아이가 이 세상에 왔는가? 작은 천사가 한 명 있었어요. 저기 위에서 하프를 연주하고 있었어요. 모든 천사들은 하프를 연주하지요. 저기 위에는 항상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요. 하프를 연주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흩어진 구름 사이에서, 구름 구멍을 통해 지구를 보게 되었어요. “여기와는 완전히 다르구나. 산도 있고.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것들이야. 저기로 가고 싶어!” 작은 천사들에게는 다 그들을 돌보는 큰 천사가 있어요. 작은 천사가 큰 천사에게 말해요. “저기로 내려가고 싶어요.” 큰 천사가 조심해. 그러려면 지금의 모습으로는 내려갈 수 없어. 날개는 여기 두고 가야 해. 날개 없이 내려 가야해.” “날개 없이! 하지만 지구에서 사는 것이 정말 흥미로워 보여요.” “그러면 이제 지구에서 어디로 가면 환영받을지 찾아봐야 해.” 여러 군데를 찾았어요. “저기 사랑스런 사람들이 있는 장소를 찾았어요.” 이들은 작은 천사가 오기를 바라요. 그곳으로 내려와요. 큰 천사가 달빛의 길을 만들어 주었고요. 아기 천사는 달빛 길을 통해 지구로 갔어요. 작은 천사는 날개를 남겨 놓아야 했지요. 큰 천사가 이야기하기를, “네가 날개를 두고 가지만 우리와 연결이 끊어지지 않도록 밤마다 올라올 수 있게 해줄게. 그러면 여기서 손도 씻고 더러워진 옷도 깔끔하게 빨 수 있어. 그리고 밤이 지나면 내려갈 수 있어!” 아기 천사는 그렇게 했어요.

 

여러분, 이 이야기를 2학년 아이에게 한다면, 아이들이 눈을 크게 뜨고 진실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아이들은 바로 이해해요. ‘, 이 어른은 내 이야기를 해주고 있구나.’ 여러분, 왜 아기 천사가 이 땅에 태어났지요? 무엇을 봤잖아요. 무엇을 보았지요? 몰라요. 우리는, 아기 천사는 자기가 무엇을 봤는지 더 이상 몰라요. 아래에 도착하자마자 다 잊어버렸어요. 부모들이 환영했지만 부모 때문에 온 것은 아니에요. 물론 무엇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지요. 진정한 이유가 있는데요, 다행히 아이는 이것을 잃어버렸어요. 과제일 뿐이잖아요. 이 천사 이야기를 했지만, 이 아기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고민을 하지요. 이것이 이상이에요.

 

이 땅에서 내가 무엇을 찾고 있어요. 하지만 무엇을 찾는지 잊어버렸어요. 이 땅에서 이상을 찾는다면 나는 자유로워질 거야. 내가 찾은 이상을 따라갈 거야. 내가 잊지 않았다면, 난 이상을 찾아야 할 의무가 있어. 잊어버렸기 때문에 찾아요. 여기에 많은 분들이 모였어요. 이 질문은 사적인 질문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 질문에 답할 필요는 없어요. 여러분 중 몇 분이 혹시 표현하실 수 있겠어요? 첫 시작이지만 왜 여기에 오셨는지에 대해. 왜 위에서 하프 연주하지 않고 여기에 계신가요? 각자가 이유가 있어요. 백 명이면 백 가지 이유가 있어요. 각자 자신의 이유가 있어요. “이것을 배우고 싶어. 이것이 나의 이상이야.” 언젠가 큰 천사가 앞에 나타난다면, “내려갈 만한 가치가 있었어?”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었어?”라고 질문하겠죠.

 

청소년들에게 이것은 매우 생동감 있는 질문이에요. 청소년기뿐만 아니라 죽기 직전까지 모든 사람에게 생동감 있는, 살아 있는 질문이어야 해요. 청소년기에는 이 질문이 자연적으로 살아 있어요. 억지로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스스로에게 의식적으로 질문해야 해요.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저절로 돌아가는 인생을 살게 돼요. 한 가지 일이 생기면서 다음 일이 생기고, 이 일이 다음 일을 결정하는 연속적인 상황, 결정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에요. 그렇게 때문에 굉장히 의식적으로 네가 하고 있는 일이 진짜 네가 하고 싶은 일이니?”라고 물어야 해요. 상황에 따라 용기가 필요한데, 결강에 반대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해요. 그러나 나이가 들면 그런 거 원하지 않아요. 청소년들은 그럴 문제가 없어요. 그런 이유로 어른들은 청소년들에게 많이 배울 수 있어요. 청소년들이 하는 어리석은 짓을 배우라는 게 아니에요. 인생을 어떻게 사는지 그 태도에서 배울 수 있어요.

 

이 상황에서 직업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지난 질문들은 스물여섯 살이 될 때까지 답을 얻지요. 스물여덟일 수도 있고요.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고, 어떤 남편, 어떤 부인과 있는가? 여기까지 오면서도 이미 중요한 결정들을 한 상태에요. 결정한 상태에서도 내가 생동감 있는 삶, 움직임이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이제 어른이 되어 질문하는 시기에 청소년과 함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요? “네가 진정으로 찾는 것이 무엇이니?” 청소년이 못 보는 것을 어른이 볼 수 있을지도 몰라요. 이 질문을 내면적으로 하시는 거예요. “네가 진정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니?”, “이게 옳다고 보니?” 이것은 어른들이 해야 하는 연습 중에서 아주 중요한 거예요.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특정한 태도가 있지요. 그런데 내가 아들이나 딸이나 학생들을 바라볼 때, “이 학생이 진정으로 찾는 것은 무엇인가?” “이상한 일을 이 학생이 할 것 같아 등등.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저랑 대화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 학생이 뭔가 특별한 일을 할 것 같아. 이 학생이 오스트레일리아에 가야 할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그러면 관계 속에서 자기가 찾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오스트레일리아에 가면 찾고 싶은 것을 찾을 거야.”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본 적 있니?” “, 맞아요.” 이런 상황에서는 어른이 내용상 도움을 준 거예요. 존재만으로 도움을 준 것이 아니에요. 자기 자신과 간격을 두었잖아요. 자기를 버리고 이 청소년의 삶에 대해 함께 고민을 했던 거예요. 내가 속으로 질문했던 것은 이거예요. “이 학생이 진정으로 찾는 것은 무엇인가? 찾는 과정에서 아주 색다른 길을 갈 수도 있을 거야.” 이렇게 생각한 다음에 이 학생에게 물어봐요. 그러면 맞아요. 내가 찾고 있는 거예요라는 대답을 들을 수도 있어요.

 

어른들 중에서 젊음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청소년들을 내용적으로 많이 도울 수 있어요. 청소년들이 진정으로 찾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력이 필요해요. “내가 진정으로 찾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지점까지 올 수 있다면, ‘무더위가 온다면 항상 결강하고 싶다에서 거리감을 둘 수 상황이라면, 거기에 반대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그런 상황에서는 내면적인 확신을 가질 수 있어요. 아까 이야기하신 것처럼 꿈, 이상, 종교, 조언 중 어떤 것을 이야기하더라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무엇인가를 찾았어요. 내가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것을 찾아서 이 길을 갈 거야.” 이런 것이 본인의 지점에 있을 때에야 직업에 대해 상담해줄 수 있는 위치인 거예요. 청소년이 질문할 때,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과 작업을 충분히 해야 해요. 그전에 최선의 조건, 중요한 조건 하나는 사회가 원하는 것, 사회를 충족시키는 기대를 찾지 않는 거예요. 사회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 학생이 진정으로 찾는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해요.

 

한 번 더 말씀드릴게요. 질문이 제일 중요해요. 답을 할 때 착각의 가능성이 있어요. 착각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해요. 답할 때는 질문을 갖는 것이 중요해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요. 아까 받았던 질문을 집으로 가져가세요. “여러분은 왜 이 세상에 계신가요?” 각자 자기에게 질문하는 거예요.

 

<청계자유발도르프학교 초청강연 http://www.cgfreeschool.kr/xe/pds_referencepublic/161531>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