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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급과정과 진로 - 이상을 향한 삶 첫날 1부 (미하엘 데부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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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급과정과 진로 - 이상을 향한 삶 첫날 1부 (미하엘 데부스)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1. 9. 1. 20:16

2015년 미하엘 데부스 선생님 초청강연 첫날 1부

 

2015713

통역: 이은경

 

 

<1>

 

좋은 저녁이지요? 사랑하는 부모님 여러분.

 

여러분은 학부모인데요, 어떤 학생들의 부모인가 하면 굉장히 흥미진진한 시기를 겪고 있는 아이들의 부모예요. 오늘 오전에 상급 학생들과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는 하나가 되었어요. 첫 번째 태어나서 14살 정도까지는 모든 것이 그대로 스스로 돌아가지요. 이 시기의 아이들에게는 다른 시기에 생기는 질문 같은 것이 별로 없고, 일상생활이 그대로 돌아가요. 갑자기 그런 일상생활이 멈추진 않아요. 그러면서 조금씩 질문이 생겨나지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사실 이 말에는 비밀이 가득해요. 내가 누구인지는 알아요. 발도르프 학교 학생이고, 서울 근처에 살고 있고, 우리 부모님의 아이이고, 한국어가 내 모국어이고, 남학생 혹은 여학생이고, 모든 청소년이 그렇게 마흔 가지 정도의 자기 정체성을 셀 수 있겠지요. ‘그것이 나야!’라고 이야기해요. 근데 여기서 희한한 것은 다른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봐요. 사회적인 질서에 나를 맞추어가는 학생은 우리 사회에서 아주 사랑스런 아이에요. 아이에게 외부에서 바라는 것이 있지요. 부모, 교사, 사회가 바라는 것을 그대로 한다면 그 아이는 아주 사랑스런 아이에요. 이때 내 정체성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냐면, ‘내가 언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가?’에요. 내가 다른 사람이 기대한 것을 충족시키면, 그것은 누구의 기대지요? 다른 사람의 기대인 거예요. 한 번 더 말씀 드릴게요. 내 정체성은 어떤 것으로 구성되어 있냐면, 내가 어떤 기대를 충족시키는데 그 기대는 다른 사람의 기대에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돼요. 이거 공허하지 않나요? 여러분 중에서 자녀를 갖고 계신 분들!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보세요. “나는 내 아이에게 그런 기대가 있는가?”

 

여러분 모두 자녀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긴장감 있는 질문을 하나 할게요. 여러분의 자녀가 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실망하시겠어요? 모든 부모들은 교육자나 마찬가지에요. 언젠가 경험할 텐데요.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해요. “천만다행이다. 내가 착각을 했구나!” “천만다행이네, 내가 잘못 생각했어!” 이때 그게 천만다행인 일일까요? 내 아이가 내가 좋지 않게 생각하는 뭔가를 해요. 내 딸이 정말 내 마음에 안 드는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3년 뒤에 이렇게 이야기해야 할 때가 있어요. “그게 더 나은 일이었어. 천만다행이야. 그때 내가 잘못 보았던 거야. 내가 착각했어라고.

 

물론 반대되는 일도 있을 수 있어요. 내 아들이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아들에게 당연히 이야기를 하지요. 부모들은 그런 것을 보면 곧장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둘 사이에 위기감이 생겨요. 아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요. 4년 뒤에 내가 아들에게 이야기하기를, “내가 잘못 생각한 거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내가 착각한 게 아니었어. 내가 예상했던 일이 일어났잖아. 네가 내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서로 다른 두 가지의 태도를 보았지요. 그 딸은 옳게 행동했어요. 아빠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어요. 그 아들도 딸처럼 아빠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어요. 여러분 보세요. 아빠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여기서 무엇을 끌어내야 할까요? 청소년기가 그래요. 청소년들은 부모가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부모가 경험이 많은 분들이라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이들도 느끼고 있어요. ‘부모들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구나라고.

 

그러면 부모님들이 그 당시에 옳은 일을 하는지, 안 하는지 누가 판단해야 할까요? 질문이 있을 때 누구에게 물어보죠? 오전에 청소년들에게 답을 모르겠으면 누구에게 물어보냐고 물었어요. 학생들은 부모라고 대답했어요. 이건 여러분에게 칭찬할 만한 일이에요. 유럽에서는 그런 답이 안 나와요. 부모님들이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른다면, 그럼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요? 한 번 더 이렇게 어려운 질문을 해볼게요. 나의 부모님이 나에게 뭔가에 대해 옳다 그르다 이야기를 해줄 때 그들도 착각할 수 있잖아요. 그러면 도대체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요? 부모님들이 가끔 착각을 하니까 내가 질문을 할 때 부모에게 물어야 할지 아닐지 모르겠어요. 아버지가 이것을 하라고 했을 때, 아버지가 그 순간에 옳은 말을 하는지 착각을 하는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오전에 청소년들은 내가 결정할 수 없는 것을 아버지에게 물어봐요라고 이야기해주었어요. ‘아버지, 저 문제가 생겼어요. 그런데 아버지 당신이 (혹시)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지금 아버지 당신이 이 순간에 착각하고 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것은 역설이에요. 말로는 이렇게 표현하지 않겠지만 사실 이런 순간이 자주 일어나요. 어떤 청소년도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직접적으로 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데 그들의 영혼 안에는 그런 것들이 살아 있어요.

 

저는 부모님이 있고, 부모님을 존경해요. 나는 청소년으로서 부모님이 착각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요. 사랑하는 부모님, 저를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질문의 화살을 돌립니다. “나는 착각할 때가 있는가, 없는가?” 한 아이한테는 내가 옳았어요. 그런데 다른 아이한테는 내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러면 세 번째 아이에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한 아이가 어머니에게 와서 도와줄 수 있냐고 물어요. 뭐라고 하실 거예요? “그건 네가 할 일이야!” 하고 가버릴 건가요? 아니지요. 어머니가 답을 몰라도 그것은 어머니 일이지요. 제가 한 번 더 반복할 게요. 어떤 아이도 내면에 있는 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아요.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 질문이 안에 있는 거예요. 그 질문이라는 건 명확하게 어머니가 잘못 판단할 수도 있겠지만 나를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예요. 그것을 말로 직접 표현하지는 않겠지만 이 말이 아이의 내면에 있는 거예요.

 

외적으로 어머니가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저는 몰라요. 그러나 내면적으로 진실되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나라면 그렇게 안 할 거야. 그런데 난 한 번 착각한 적이 있거든. 네가 하려는 일이 옳을지도 몰라. 지금 이 순간에 나는 명확하게 볼 수 없어.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문제점이 하나 있다는 거야. 문제점을 하나 보고 있지만, 이것 이외에는 문제가 없기를 바랄게.’ 어머니가 솔직하게 내면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아이를 돕는 일이에요. 완성된 답을 주는 것이 도움을 주는 게 아니에요. 청소년들은 이런 어른들을 ! 권위가 있는 어른이구나!’ 하고 느껴요. 이 사람들이 바로 권위가 있는 어른이에요. 독일어 표현에 자기 계좌 통장에 있는 것 이상을 쓰려고 하는 사람’, ‘자기가 갖고 있는 것 이상을 쓰려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런 사람이 아닌 거죠.

 

하지만 부모로서, 선생님으로서 14살 이하의 아이들에게는 자기 통장에 있는 것 이상을 쓸 수 있어야 해요. 어쩔 수 없어요. 여러분, 이런 시를 알고 계시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누군가 이 시를 이야기해주실 분이 계신가요? 가정의 종교생활에 대해 시험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웃음) 없으시다면, 제가 독일어로 이야기할 게요. 그럼 통역자가 통역을 해주세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는 하느님의 형상이다. / 심장부터 손끝까지 하느님의 호흡을 느낀다. / 내가 입으로 이야기하면 나는 하느님의 의지를 따른다. / 내가 하느님을 바라보면 모든 도처에, 모든 것에, 어머니 안에서, 아버지 안에서, 모든 사랑스런 사람들 안에서 / 동물과 꽃 안에서, 나무와 돌 안에서 나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통역한 시)

 

머리에서 발끝까지 나는 하느님의 형상입니다. / 가슴에서 손끝까지 나는 하느님의 숨결을 느낍니다. / 입으로 말할 때 나는 하느님의 뜻을 따릅니다. / 어머니 안에, 아버지 안에,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안에 / 동물과 꽃들 안에, 나무와 돌들 안에 / 곳곳에 깃들어 있는 하느님을 바라보면 / 두려움은 나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 오직 사랑만이 나를 감싸줍니다.”(기록자가 옮긴 시)

 

여러분은 청소년이 된 자녀가 있는 분이지요? 그러니까 이 시는 약간 늦은 감이 있어요. 여러분 친구 중에 어린 자녀를 둔 사람이 있다면 이 시를 추천해주세요. 이 시에 뭐가 나타나 있냐면, 세상 모든 곳에서, 동물과 꽃, 식물들 안에서 하느님을 바라봐요. 그런데 그 전에 어머니, 아버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을 봐요. 어머니, 아버지가 모든 것보다 먼저 나오지요. 아이 앞에서 격언처럼 이 시를 이야기해 보세요. 그 안에서 신을 보는 거예요. 통장의 액수를 넘어서는 것이라는 표현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데요, 아이는 부모님 안에서 신을 바라봐요. 여러분은 신이 아니에요. 그런데 어떻게든 아이들은 여러분을 통해서 신을 바라볼 수 있어요.

 

부모님으로부터 온 것은 모두 옳아요. 질서가 있어요. 아이는 신적인 질서와 인간적 질서를 구분하지 못해요. 하나의 질서이지요. 두 번째 7년 주기의 부모들은 이렇게 굉장히 힘든 일을 해야 해요. 불쌍한 부모님이고요, 교사도 불쌍한 교사인 거예요. 자기의 능력을 뛰어넘어야 하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내면적인 연습이 아주 중요해요. 인지학에서는 이런 연습에 이름을 하나 지었는데, 그것을 어떤 특정한 내면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어요. 표현 영혼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것을 의식혼이라고 해요.

 

의식혼이라는 것은 거리감을 두는 거예요. 여기에 자기 이상이 있다면, 저기에 네가 있어. 내 이상은 여기에, 나는 저기에. 의식혼은 하나의 힘인데, 자기 자신에게 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힘이에요. 자기 자신에게 라고 이야기해요.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서 여러분 자신에게 라고 이야기할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제 자신에게 자주 라고 이야기하는데요. “너 당나귀야!”라고. 이건 독일식 표현이에요. 독일에서는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했을 때, “너는 당나귀야라고 해요. ‘나는 당나귀라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나의 자아는 올바르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은 아주 가끔 둔한 일이에요. “너 당나귀같이 또다시 틀린 일을 했구나.” 여기에는 간격이 있어요. 자기 자신을 외부에서 바라볼 수 있는 거리감’. 어른 중에서 내면이 성숙되어 있다면 이것을 할 수 있어요. 그렇게 연습하다 보면 자기 자신을 평가할 수 있는 힘이 생겨요.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나에 대한 평가를 들을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에요. 되돌아보기를 하는 거지요.

 

오늘 무슨 일이 있었지? 대화가 있었지.’ 이렇게 하루 되돌아보기를 하면서 알아차리는 일이 있어요. ‘그 사람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구나.’(같은 것이에요) ‘그 사람이 침묵했는데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어. 그때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구나! 상대방이 내가 무슨 말을 해서 침묵을 했어. 그 당시엔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내가 무엇인가를 이야기했어.’ 이렇게 그때 내가 잘못한 일을 스스로 알아차리는 거죠. 이제 제가 그 사람에게 스스로 찾아가요. “어제 우리의 대화 중에 뭔가 잘못이 있었던 것 같아요. 미안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어요. 내가 스스로 그 실수를 발견했기 때문이지요. ‘간격’, ‘거리감을 둘 수 있는 힘, 이것이 의식혼의 힘이에요.

의식혼을 연습하는 방법이 있어요. 예를 들어, 저녁마다 하루 되돌아보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저녁뿐 아니라 낮에도 이런 것을 알아차리는 힘이 생길 수 있어요. 더 이상 감정에 치우친, 감정에서 나오는 결정을 하지 않을 수 있어요. 물론 감정도 매우 중요해요. 하지만 감정이 항상 결정을 내려서는 안 돼요. 때때로 감정에 반하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있어요. 그렇게 연습하다 보면 저녁에서야 깨닫던 일들을 생활하면서 낮에도 깨닫게 됩니다. 의식혼은 간격을 만드는 힘이에요. 청소년기의 자녀를 둔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에요.

 

자기 역량을 뛰어넘는 현상은 굉장히 실제적인 현상이에요. 첫 번째와 두 번째 7년 주기에는 내가 어떤 권위를 대표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요. 아이가 부모에게서 보는 질서를 신적인 질서라고 받아들이는 시기에요. 하지만 교육자로서 스스로에게는 나는 신적이지 않아라고 이야기하지요. 나한테는 어떤 의무가 있어요. 부모로서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내 강점과 약점을 통틀어 아이에게 모든 것을 다하려는 의무가 있어요. 그렇게 되면 나는 아이에게 크든 작든 완벽해요. 물론 나는 나에게 불완전한 면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면 어느 상황에서는 자기 영향력을 넘어서는 일을 하고, 어느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을까요? 아이디어 있으세요? 무엇을 꼭 이야기해야 할 의무는 없어요.(웃음) 아이가 나를 교육자로서 올려다본다면, 그래서 이야기할 때 맞아, 나는 무엇이 옳은지 알아!”라고 생각한다면, 나의 영향력을 뛰어넘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나는 이 아이의 상대로서(이 아이를 상대하면서) 충족시켜야 할 의무가 있어라고 생각한다면, 그 과제를 충족시키고 싶을 거예요. 그런데 내가 항상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다면 그건 아이를 돕는 게 아니에요. 아홉 살짜리가 물어보는데 부모가 내가 답을 알겠니? 모르지. 내가 알았더라면...” 이렇게 불확실한 태도를 보인다면 어떨까요? 물론 진정성 있는 답이기는 하지만, 이건 아이를 돕는 것이 아니에요. 진실한 것이 항상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라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내가 잘 알지 못하더라도 진실 되게 아이의 과제를 충족시키는 거예요. 이 두 가지는 차이가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내 능력을 뛰어넘는 일을 해야 하는데, 객관적으로는 내 과제를 충족시키는 것이지요. 이런 조건의 인간적 위계질서에서는 어떤 정당성을 볼 수 있어요. 인간 사회에 이익이 되는 입장에서 그 당사자가 알 수 있어요. 이것이 첫 번째와 두 번째 7년 주기에 관한 이야기에요.

그러고 나서 세 번째 7년 주기가 와요. 그때는 부모가 자신의 영향력을 넘어서는 일을 하지 않아요. 마침내 내 자녀와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기에요. 아까 이야기했던 딸 이야기를 다시 해볼 게요. 딸이 얘기해요. “나 이것저것 하려고 계획하고 있어요. 패션에 관한 직업을 갖고 싶어요.” 이때 부모가 딸한테 이렇게 이야기해요. “완전히 외형적인 직업이구나. 12년 동안 발도포프 교육한 것이 아깝구나.”

 

그런데 딸한테 이야기할 때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어요. “나는 예언자가 아니야!” 딸은 내가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느껴요. 어른이 고민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은 아이에게 엄청나게 도움이 돼요. ‘! 어른들도 모든 것을 아는 게 아니구나.’ 그런 모습을 보게 되지요. 그런데 아이가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은 무엇일까요? 바로 어른이 위기에 빠지는 것이에요. 인생의 위기에 빠진 어른을 보는 것은 청소년들에게 좋은 역할을 못해요. “나도 몰라. 수많은 착오를 겪었거든. 이것을 하든 저것을 하든 뭐든지 네가 알아서 해! 뭐든지 잘못된 일이니까. 무엇을 하든지 중요하지 않아.” 이렇게 말하는 거, 물론 진정성은 있어요. 하지만 절대 도움이 안 되는 일이에요. 두 번째 7년 주기에서 이야기했어요. 진정성은 있지만 도움이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러나 세 번째 7년 주기에는 진정성이 있는 것과 도움을 주는 것이 좀 달라요. 청소년기에 있는 학생이 ! 어른들도 모른 것이 있구나라는 상황을 경험하는 것은, 이 아이에게는 커다란 도전이에요.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지겨울까요.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하고, 그것이 세상을 흥미롭게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모든 것을 다 꿰뚫을 수 있다면 아마 결혼은 안 할 거예요. 모르기 때문에 흥미로운 도전을 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일을 맞이하게 돼요. 그러면 이 순간에는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간에 내가 결정하는 것을 통해 새로운 일, 놀라운 일이 생겨나리라는 것을 알아요. 다른 태도로 처신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해요. “확실히 볼 수는 없겠지만 네가 어떻게 할지에 대해 결정을 해. 그렇게 하면 네가 결정한 다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게 될 거야.”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결과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입니다.

 

좀 위험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결정은 모두 옳아요.” 여러분이 일어날 모든 결과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면요. 인간들이 겪는 대부분의 위기 상황은, 사람들이 그런 결정을 한 다음 스스로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죠. “그 상황에서 내가 미리 알았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거야. 네가 진실을 말하지 않았으니 너에게 내 고통에 대한 책임이 있어. 네가 알고서도 이야기 안 했잖아.”

 

저기에 잘못한 사람이 있어.” 항상 잘못한 사람이 저기에 있다고 하는 거죠. 이것이 모든 위기의 원인이에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요소는, 위기감이 생겨난 원인과 스스로를 동화시키면서, ‘라고 이야기하는 것에서 시작해요. 물론 저는 어른, 성숙한 사회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숙하면서도 자기가 자기 일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율적인 예요. 자율적인 사람, 성숙한 사람은 내가 겪고 있는 위기감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아야 해요. 하지만 스스로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주변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주위 사회가 나에게 기대하는 점들, 그래서 외부 사회와 나의 관계성을 잃어버린다면 위기감이 생기는 거예요. 이 두 가지, 밖에서 바라는 점과 내가 하는 것과의 관계 말이지요.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당신 지금 이상해, 평범하지 않아라고 이야기한다면 위기감이 생기는 거예요.

 

오늘 오전에 청소년과 함께한 대화에서 흥미로운 일이 있었는데, 학생들이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 정말 훌륭한데요. “저도 제가 하고 싶은 대로 결정할 겁니다. 그렇다면 저는 들어올 때 신발 갈아 신지 않을 거예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었어요. 청소년들이 답하기를, 그렇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이야기했어요. 아주 흥미로워요. 사람은 자유로운 존재인데, 신발은 갈아 신어야 해요. 그럼 어디에 사회의 질서가 있고, 어디에 개인의 자유가 있나요? 두 가지 모두 자기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다시 대화로 돌아올게요. 세 번째 7년 주기 자녀를 둔 부모로서 밖으로 펼쳐서 보여줄 수 있는 것, 빛이 날 수 있는 것은, “나는 네가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봐. 하지만 내가 잘못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나도 알아.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이야기할게. 하지만 결정은 네가 해. 네가 어떻게 결정하든 너는 무엇인가를 배우게 될 거야.” 이것이 중요한 지점이에요. “뭐가 옳았어, 틀렸어가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 내가 무엇인가를 배웠어라는 것이 중요해요. 그러면서 인생의 경험을 쌓는 거예요. 인생의 경험은 결과에 책임을 질 때만 생겨요. 저 사람이 잘못했다고만 이야기한다면 아무것도 배운 게 없지요. 한 가지 더 배웠어요. 전생에 대하여. 그러면 좀 더 밝아지지요. 이것이 바로 청소년기 학생들이 찾는 거예요. 인생이 학교에요. 청소년은 찾는 거예요.

 

어른들에게는 위험성이 있는데요, ‘나는 어른이니까 학교를 다닐 필요가 없어. 나는 다 알고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 인생은 학교와 다름없구나.’ 이런 느낌. 여러분들이 나중에 자녀나 청소년들에게 간다면, 그 청소년들이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세요.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많이 배운 어른들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불확실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모름에도 불구하고 확신에 차 있는 것, 이것이 아주 중요해요. 명확한가요? 이해 안 되는 것을 이해합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나는 확실히 알고 있어.” 내가 지금까지 반복했던 것처럼, 딸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해요. ‘잘 모르겠어같은 불확실한 모습을 보이지 말고,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 내 경험에 따르면 나는 아마 다르게 결정했을 텐데, 네가 결정하고 행동한다면 끝까지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해! 거기에서 뭔가 배울 수 있을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어른은 확신에 빛을 비출 수 있어요 이것이 의식혼이에요. 모든 것을 알 수 없지요. 그럼에도 확신에 차 있을 수 있어요. 모르는데 확신은 어디에서 생기지요? 내가 배울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신뢰에요. 물론, 내가 한 결정을 통해 어떤 복잡한 일을 초래할 수도 있지만, 결정한 순간 나는 새로운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실수도 할 가치가 있어요. 배운다면!

 

오늘 낮에는 교사회 면담이 있었는데, 거기서 이야기한 것을 다시 한 번 이야기할게요. 제가 알고 있는 어떤 선생님께 감사를 드리고픈 글귀인데요, 간단하게 표현하기를, “진정한 진리는 회피한 악, 오류가 아니다. 진정한 진리는 극복한 진리이다.” “진정한 선이라는 것은 회피한 악이 아니라 극복한 악이다라는 글귀에요.

 

인생을 살면서 굉장히 어려운 일이 생길 수 있는데 그럼에도 긍정적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런 상황에 직면해서 토론하고 분석할 자세가 되어 있다는 거예요. 착각도 없고 오류도 없다면 우리는 절대 배울 수 없어요. 인생에 대한 질문이 있을 때마다 성인(聖人)에게 물어봐요. “나는 쉰이 되었는데, 내 인생에서 절대 실수가 없었어. 항상 성인에게 물어보았기 때문이지.” 훌륭하지요? 아니에요. 아주 나빠요. 방황하고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용기, 이것이 세 번째 7년 주기의 내용이에요. 옆에 어른이 서서 나도 그 시기 알고 있지!”라고 얘기해요.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허락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때때로 멈춰, 거기까지!”라고 이야기할 필요도 있어요.

 

그러면, 내용적으로 부모에게 더 이상 의존할 수 없는 시기가 온다면 청소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는 부모에게 내용적으로 조언을 받을 시기가 아니에요. “아버지 이렇게 할까요, 저렇게 할까요?” 이 시기에는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아요. 내용적으로는 아니지만, 어른이 어떻게 하는가(어른의 태도)는 청소년기의 본보기에요. 이 어른이 인생에 대해 신뢰를 가지고 있는가, 없는가와 같은 태도 말이에요. 상황이 어려워질 때, “아주 바보 같은 것을 했어. 그렇지만 너는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어라고 말해요. 어리석은 짓을 했어도 다른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어요. “그때에 바보 같은 짓을 안 했다면, 너는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거야. 네가 여기에 도착한 것은 대단한 일이잖아. 그 당시에는 바보 같은 일이었음에도 말이야.” 이 어른은 그때 한 행동을 바보 같은 짓이라고 표현해요. 그렇게 표현하면서도 인생을 살면서 배울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이해를 해주는 거죠.

 

청소년기에는 부모가 내용적으로 본보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서 본보기가 되는 거예요. 부모들은 청소년기에 아주 좋은 본보기에요. 청소년들이 대화할 때 자주 들을 수 있는 내용인데요. “그 친구 집 모습이 어떤지 알아? 나는 차라리 내 부모한테 감사해.” 이때는 내용이 아니라 부모의 태도를 말하는 거예요.

 

그러면, 청소년기 학생들이 내용적인 방향성을 찾고 싶다면 누구에게 가야 할까요? 학생들이 무엇인가를 하도록 누가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잠깐 쉴까요? 위의 질문을 가지고 휴식 시간을 갖겠습니다.

 

 

 

<청계자유발도르프학교 초청강연 http://www.cgfreeschool.kr/xe/pds_referencepublic/16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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