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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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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적 정의+비폭력 대화

세월호 참사와 교육 : 응보적 교육에서 회복적 교육으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4. 13. 05:53

세월호 참사와 교육 

응보적 교육에서 회복적 교육으로


김훈태(슈타이너사상연구소)



4월 16일이 다가온다. 그날의 어처구니없는 일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결코 잊지 않겠노라 다짐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어처구니없는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벌 총수는 범죄를 저지르고도 죗값을 받지 않으며 사법과 언론, 국회는 이를 옹호한다. 해수부와 언딘의 유착 관계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고, 국가 관료들의 무능과 무책임은 제대로 처벌되지 않았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고 개혁하는 작업은 전 사회적인 운동으로 지속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교육의 역할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 이후의 교육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아니, 교육은 세월호를 철저히 반성했는가? ‘가만히 있으라의 교육을 우리는 좀 더 성찰해야 한다.

 

공동체는 본래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공간이라기보다 갈등과 적대, 억압과 착취가 가능한 공간이다. 역사적으로 공동체의 평화는 다수의 구성원에게 입 다물고 시키는 일이나 잠자코 하도록질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불만이라도 표현할라치면 가만히 있으라고 억누르는 식이다. 개인주의 문화를 통과하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공동체는 억압의 기제로 작용해 왔다. 그리고 우리의 교육은 사랑과 행복으로서의 공동체적 이상을 강요해 왔지만 아이들을 주체적 개인으로는 키우지 못했다. 더구나 오늘날에는 그나마 남아 있던 공동체 문화의 순기능마저 사라지면서 문화적 공백 상태에 놓인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우리의 교육은 이 혼란스러운 현실을 인식하고 있는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는 그동안 추구해온 삶의 가치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대체 우리는 어떤 삶을 지향해온 것인가? 그리고 어떤 삶을 지향해야 하는가?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정말로 바라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침몰하는 뱃속에서 승객들은 절박하게 살고 싶었고, 가족들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 그들의 삶을 대신해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바라는가?

 

흔히 인성이 파괴된 사회가 되었다고 말을 한다.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하는 행위가 사적 공간에서 나와 공론의 장까지 확산되었다. 슈타이너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이 인간을 잃어버린 시대다. 우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고 있다. 인성이 파괴되기 이전에 사회의 안전망이 파괴되었고, 안전하지 못한 사회에서 더욱 각자도생의 길을 걸어왔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위로 올라가려는 것이 우리 사회 전반의 맹렬한 삶의 모습이었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압축성장과 치열한 경쟁문화는 우리 교육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짧은 기간 동안 물질적 풍요를 위해 희생한 가치가 무엇인지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우리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왜 이렇게 살아가는지 멈추어 서서 물어본 적도 없다. 멈추면 쓰러지는 자전거처럼 달리기만 했다. 경고음은 계속해서 울렸다. 그러나 우리는 무시했다. 수많은 아이들이 자살했고, 수많은 약자들이 학대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차별이 당연한 사회였다.

 

이것은 넘어서야 할 문지방이다. 넘어서지 못하면 우리는 이 방에 갇혀 몰락하고 말 것이다. 에고의 문제에서 사회 모순의 문제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자기 죽음의 문턱에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특히나 교육을 하는 사람이라면 바닥 아래까지 내려가 심연을 들여다봐야 한다. 어떻게 해야 인간을 되찾을 수 있는지, 심도 깊은 고민과 대책 마련이 없다면 희망은 없다. 정직하게 절망하고 내려놓아야 할 시점에 와 있다. 극심한 경쟁교육의 뿌리에 교육에 대한 무지가 도사리고 있다. 삶에 대한 아무런 성찰이 없는 사회, 우리는 그런 사회에서 살아왔다. 에고가 확장되기만 하는 사회, 또는 참담하게 짓밟히고 망가지는 사회, 피해의식의 사회, 좀비가 되어가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았다. 항상 잘해야 하고 못하면 안 되는 사회였다. 교육이 그러했다. 잘해야 한다, 최고가 되어야 한다, 실수하면 안 된다,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1등이 되어야 한다, 낙오되어서는 안 된다, ... 경쟁교육의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이것을 응보적 교육이라 부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회복적 가치이다. 우리는 온전한 삶을 회복해야 한다. 인간성의 회복, 교육의 회복을 고민해야 한다. 회복이란 말은 기독교 전통에 토대를 두지만 기독교의 테두리 안에만 머무르는 개념은 아니다. 회복한다는 것은 우리가 간직해온 오래된 지혜 속에 답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인간다움을 갈망한다. 인간을 잃어버린 시대에 인간을 찾고 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인간적인 그 무엇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삶의 소중한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어떤 가치인가? 그것은 오래 전에 잃어버린 정신적인 가치이다. 관계, 우정, 사랑, 존경, 공동체, 존중, 배려, 상부상조, ...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정신적인 가치들이다. 회복적 정의는 본래 제자리에 있어야 할 우리 내면의 것들을 제자리에 가져오자고 하는 것이다. 이 일은 가정에서, 그리고 학교 교실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정신적 가치들은 각자 본래의 자리가 있다. 문화는 자유로워야 한다. 법률은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경제는 이윤추구가 아니라 협력과 박애, 서로 돌봄에 그 이상을 두어야 한다. 교육은 예술, 과학, 학문, 종교 등과 함께 문화의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교육의 자리를 국가와 사법이 차지하거나 경제 논리가 지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다는 게 문제다. 


이제라도 교육은 본래의 자리를 회복해야 하며, 자치 독립을 위해 싸워야 한다. 학교는 국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교육의 목적은 개인의 성장에 있는 것이지,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롭게 성장한 개인들만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창조적 역량을 발휘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학교 현장에 사법의 논리가 들어올 수 없다. 아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을 사법, 그것도 응보적 사법의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흐름이 학교를 무너트린다. 전통사법은 인간을 바라보지 않는다. 피해자를 돕는 게 기존 사법의 목적이 아니다. 오로지 가해자를 찾아내 처벌하는 것, 그래서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다. 인간 위에 법이 있다. 가해자 처벌은 본질적으로 법규의 위반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재판은 인간, 특히 피해자를 소외시키는 냉혹한 국가 기계다. 이것이 교육에 들어올 수는 없다.


응보적 사법에 대한 비판과 성찰에서 회복적 사법이 태동했다. 그렇다면 '회복적 경제'라는 개념도 고민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은 인간 생활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 근대사회에서 인간은 누구나 독립된 개인이다.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시장이다. 우리는 시장에서 주체가 된다. 돈이 있다면 누구나 당당한 소비자가 된다. 해방된 농노는 노동자이자 소비자가 되었다. 시장경제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시장경제 덕분에 민주주의가 가능했다. 시장의 본질은 등가교환에 있다. 나의 노동이 정당한 임금이 될 때, 착취나 억압 없이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을 때 시장은 온전하게 기능한다. 이것을 왜곡하는 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다. 이기주의와 불평등에 기반한 자본주의 체제는 등가교환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갑질이 나온다. 착취를 당하고 인간적 모욕을 겪어도 참아야 한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살인 같은 해고가 기다리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시장 그 자체가 악이므로 시장경제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류의 진보는 퇴행할 수 없다. 계획경제? 엘리트들에 의한 계획경제는 대중의 욕구를 결코 충족할 수 없다. 본질은 등가교환에 있다. 어떻게든 사회가 등가교환을 강제해야 한다. 대표적인 예가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 사주는 갑질을 할 수 있을까?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사주의 갑질을 견딜 이유가 있을까? 생존을 위해 몸을 팔지 않아도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아실현'을 위해 노동할 수 있을 것이다. 두려움 없이 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세월호의 선원들 역시 비참한 마음으로 출항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증언에 따르면 선원들은 기상악화를 이유로 선장에게 출항을 만류했다고 한다.) 사회의 하부토대인 경제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의 외침은 한낱 소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패배주의는 낭만적 이상주의자들의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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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적 정의에서 '정의롭다'는 것은 '올바르다'는 것이다. 올바름, 온전함, 바른 의의,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 길이라는 말이다. 이야말로 인성의 본질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인성은 스스로 자라나지 못한다. 관계 속에서, 공동체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정의로움을 배우고, 인격적으로 성숙해 갈 수 있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무엇인가? 그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교육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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