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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겠다는 약속 :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는 정의로운가?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0. 9. 11. 23:00

잊지 않겠다는 약속 :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는 정의로운가?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기레기'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세월호 참사 직후였다고 기억한다. 대형오보를 터뜨린 기자들도 많았지만 단원고에 몰려가 취재를 한다며 학생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대고 담배꽁초를 화단에 버리던 기자들이 있었다. 그들을 보며 사람들은 기자와 쓰레기가 합쳐진 기레기라는 말을 대중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일반화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 '일부'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하겠지만 여기에서는 지나치게 반복이 될 테니 생략하겠다. 물론 그렇지 않은 기자들도 있었고, 지금까지 그들은 내부에서 욕을 먹어가며 기자 사회의 적폐를 드러내는 데 열심이니 기레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일부 정의로운 이들은 기득권 방어라는 내부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일부는 소수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에 의해 아직 흐름이 바뀌지는 않았으니 희망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 사회는 얼마나 정의로워졌을까?

 

환경오염으로 인한 기후 변화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또한 정신오염으로 인한 우매화 역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다. 환경오염은 정신오염의 결과일 것이다. 정보화시대가 도래한 이후 정신오염은 한층 심각해졌다.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에는 미친 사람들이 주변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이 미미했다. 그러나 유튜브의 시대에 광인들은 새로운 광인들을 양산하며 돈을 벌고 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세계의 주요 사회 체제는 이기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이며, 민주주의는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다. 사실 근대인들이 목표로 했던 경제 시스템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시장주의였을 것이다. 시장이 생기면서 봉건제가 무너졌다. 사람들은 소비적 주체로 거듭났고, 더 이상 차별을 용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생산수단을 독점하는 자본이 시장을 지배하면서 교환의 불공정이 고착화되었다. 시장은 본래 등가교환을 원칙으로 한다. 우리가 물물거래를 할 때 등가교환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거래를 하겠는가? 자본은 때로는 힘으로, 때로는 상술로 시장을 교란시켜왔다.

 

시장 자체가 문제인 건 아니다. 부등가교환이 개선되지 않는 시장이 문제인 것이다. 자본주의자들은 부등가교환을 감추기 위해 시장을 신성한 것처럼 만들었고, 금권으로 정신문화와 국가를 비롯해 세상을 지배해왔다. 그들에게 사회란 존재하지만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오로지 생산하고 유통하며 소비하는 개인들이 존재할 뿐 사회는 없는 것이어야 했다. 교육을 통해 이 이데올로기가 대중의 의식을 지배하면서 사람들은 기업이 사회를 구성하는 한 부분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자본가가 기업을 운영하는 목적이 단순히 이윤 추구여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빵을 생산하는 기업은 단지 오너 일가의 재산을 불리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적당한 가격에 맛있고 건강에 이로운 빵을 사 먹을 수 있어야 하며, 빵 공장 노동자들은 적정한 임금을 받아서 생활의 재생산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기업은 동사무소나 학교처럼 사회의 한 구성요소일 뿐이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경제라는 개념을 자본주의로 환원하여 이해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정신오염의 한 징후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민낯

 

자, 우리 사회가 얼마나 오염되었는지 돌아보자. 오늘날 신문지상에는 삼성전자 부회장인 이재용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법무부 장관 추미애와 그의 아들에 관한 기사가 넘쳐난다. 작년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재용은 국내 최대 기업의 실질적 오너로서 생사가 불분명한 그의 부친 이건희로부터 지배권을 물려받는 과정에서 은밀하게 국가 권력을 움켜쥐었던 최순실(현재 최서원)에게 말을 사 주고 뇌물을 주었으며 회계부정을 저질렀다. 상속세를 제대로 내지 않기 위해 불법을 저지르는 과정에서 국민연금에 막대한 피해를 안겼다. 그러나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는 이재용을 어리석은 피해자 취급했다. 심지어 그 판사는 회복적 사법을 실천했다고 알려진 정준영이다. 과연 법은 평등하게 작용하는가? 그 존립 근거도 불분명한 기소심의위원회라는 곳에서는 이재용을 기소하지 말라고 권고했고, 검찰은 고심 끝에 겨우 그를 기소했다는 사실에서 한국의 사법체계가 얼마나 병들었는지를 우리는 재확인했다. 삼성으로부터 막대한 광고수입을 얻는 언론은 어떻게든 그를 옹호하느라 궤변을 늘어놓는다. 아니, 심지어 적폐를 청산하자는 정부를 집요하게 공격해 대중의 시선을 돌리고 어떻게든 정부 여당의 지지율을 떨어트리기 위해 안간힘이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기득권 카르텔이다. 교육은 아이들이 다른 생각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 그 카르텔에 진입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해왔다. 결과는 어떠한가? 우병우까지 갈 필요도 없다. 한동훈은 죄 없는 사람이어도 기자 이동재를 이용해 죄를 덮어씌우려 애썼고 총선에 영향을 끼치려 했다. 국가공무원인 검사들이 이렇게까지 불법을 저지르고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기득권 카르텔을 지켜내어 퇴임 후 소위 '전관예우'를 통해 막대한 변호사비를 받고자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면 과한 걸까? 의사들이 진료거부를 하고 의대생들이 국시거부를 하면서도 당당해 보이는 근거가 그들이 움켜쥔 기득권이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명백한 부정과 불법을 저지른 보수정당 인사들은 애써 외면하면서 전 금감원장 김기식이나 전 법무부장관 조국, 윤미향 의원, 추미애 장관을 언론이 물고 늘어지는 현상을 기득권 카르텔이라는 개념 없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세월호 참사 이후의 세상은 달라야 한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것은 한국사회의 기득권 카르텔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 적폐가 쌓이고 쌓여 배가 침몰했다. 가만히 있으라며 아이들을 탈출하지 못하게 막았고, 끝끝내 구조를 하지 않아 300명이 넘는 애꿎은 생명이 목숨을 잃게 됐다. 국민 대부분이 그 현장을 목격했으며 많은 이들이 잊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진통 중이다. 참사의 진상이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고, 정권만 바뀌었지 기득권자들은 여전히 기세가 등등하다. 정권을 무너트리기 위해 일부 종교계까지 나서서 전국민을 향해 테러에 가까운 짓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시대에 정의는 따뜻하고 부드럽기만 할 수는 없다. 정의는 우주의 섭리처럼 무섭고 냉정하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회복적 정의는 그러한 냉혹한 현실 인식 위에서 작동할 수밖에 없다.

 

고 김대중 대통령은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벽을 보면서 욕이라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분노하지 않고 넘어간다면 그들은 대중을 개와 돼지처럼 만만하게 볼 것이다. 다시 세월호 참사 같은 사건이 벌어져도 할 말이 없게 된다.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이제라도 정신오염을 막자는 것이다. 세상이 바뀌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부터 오염에서 벗어나야 한다. "문재인은 빨갱이 공산주의자"라는 오염된 생각에서 벗어나려면 그것이 정말로 그러한지 과학적으로 검증해 보아야 한다.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이상 오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세상이 실제로 어떠한지를 목소리 큰 사람 또는 옛 생각에 기대어 관념적으로 궁리할 게 아니라 눈을 뜨고 실재를 봐야 하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스스로 사고하는 힘을 회복하지 않는 이상 정신오염은 멈추지 않는다.

 

직업적 또는 계급적 기득권에서 벗어나는 일도 중요하다. 이것은 직업적 정체성에 집중할 때 가능할 것이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는 사람이고, 교사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기자는 사실에 기반한 사회적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이고, 경찰은 범죄자를 잡아 그의 잘못과 피해자의 피해를 밝혀내는 사람이다. 검사는 이를 바탕으로 기소하는 사람이고, 판사는 공정하게 판결을 내리는 사람이다. 기업가는 노동자와 함께 재화를 생산하는 사람이다. 모두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이며, 사회 공동체의 안정과 번영, 지속가능한 번영을 위한 협력자들이다. 사회는 잘난 사람, 출세한 사람, 똑똑한 사람, 기득권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소질이 있고 소명이 있으며 고유한 과제를 가지고 와서 이 세상에 잠시 머무르는,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는 사회적 개인들이다. 저마다 존엄한 존재이므로 서로를 존중하고 부족하거나 잘못한 게 있다면 책임을 지면서 성장해가는 정신적 존재들이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사람들과 지금도 직장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생을 달리하는 산업재해노동자들, 온갖 이유로 차별받는 약자 및 소수자들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투쟁을 멈출 수 없다. 세상은 여전히 깊이 병들었고, 싸우지 않고는 건강해질 수 없다. 잊지 않으려면 깨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세상을 치유하는 사랑의 실체라고 믿는다.

 

 

2020.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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