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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미래 - 우리 시대의 요구는 무엇인가? (클라우스 페터 뢰) 본문

발도르프교육학

학교의 미래 - 우리 시대의 요구는 무엇인가? (클라우스 페터 뢰)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6. 9. 21. 01:55

학교의 미래

“우리 시대의 요구는 무엇인가?”

강사: 클라우스 페터 뢰 (괴테아눔 교육분과 수장)

통역: 신영주 (부산자유발도르프학교 담임교사)

주최: 발도르프학교 교사 연합회

 

안녕하세요. 이렇게 무더운 여름날에 한국에 있는 것과 한주동안 한국의 발도르프 교사들과 연수를 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손님을 이렇게나 친절하고 따뜻하게 사랑으로 맞아주시는 한국의 모든 발도르프 학교와 학부모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 이름은 클라우스 페터 뢰이고 출신은 독일입니다.

함부르크는 독일 북부에 있는데, 그 보다 더 위에 있는 덴마크와 독일의 경계를 이루는 지역에 1983년 발도르프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 곳에서 담임교사, 외국어교사, 음악교사, 그리고 상급의 철학교사로 근무했습니다. 그리고 5년전에 스위스 괴테아눔 –세계 인지학 센터 교육분과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세계인지학센터에서 오스발트 교수와 함께 동료가 되어 전세계 1600여개의 학교들과 연결되어 일하고 있습니다. 많은 나라의 발도르프 교육운동을 경험하며 전 세계에 정말 훌륭한 교사들이 발도르프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깊고 열정적으로 살고있는 것을 볼 놀라움을 느낍니다.

 

오늘 부모특강의 주제는 ‘미래의 학교는 어떤 모습일까?’입니다.

우리 시대는 어떤 새로운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을까?

 

현재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는 시를 여러분들께 소개드리며 오늘 시간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에 질문을 던지는 현대적 시입니다. ‘로제 아우스랜더’라는 유대인 여성시인의 시입니다. 많은 풍파를 겪으며 살아온 인물입니다. 그녀는 삶 속에서 자신에게 어떤 세 가지 가능성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을 바라봄에 있어서 세 가지의 관점입니다.

첫째는 ‘나는 과거와 함께 내 과거에 만족한다.’라는 것.

둘째는 ‘나는 오래된 것들에 반하여 새로운 것으로 향해 나간다.’

셋째는 ‘내게는 매순간 미래를 만나기 위한, 새로운 것을 만나기 위한 힘이 필요하다.’입니다.

 

<시낭송>

 

『 과거의, 그리고 현재의 풍경과 함께

새로운 그리고 오래된 언어

 

잃어버리고 그리고 다시 찾게 된

친구들과 함께 사는 것

 

순간을 이해하는 것

 

절벽 앞에서 눈을 감지 않기를,

오래된 것과 함께 사는 것에 만족하는 것.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것.

그리고 끝없이 새로운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

 

현대는 항상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여러분들께 한 철학자를 소개하겠습니다. 이 철학자는 ‘현재’에 아주 관심이 많은 철학자입니다. 이 ‘현재 철학자’는 유럽에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베를린에 사는 ‘한병철’이라는 베른린 예술대학의 교수입니다. 한교수는 ‘시간의 질’에 대해 논합니다.

 

“시대의 시간이 가속도를 내는 경향은 낡은 경향이다. 우리시대, 시간의 가속도는 세상을 혼돈으로 몰고 균형을 파괴하는 것이다. 현대는 그 경향으로 인해 온전한 정돈이 부족하다. 따라서 리듬적인 운영이 되지 않고 리듬을 벗어나는, 불규칙한 리듬을 가진 것이 이 시대의 전반적인 특징이다. 그렇기에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적합한 경향을 띄고 있다. 마치 방향성을 잃은 소용돌이같이.”

 

이어서 교육적인 관점을 말합니다.

 

“이런 시대적 경향 때문에 ‘내가 여기에 있다.’는 나의 존재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나’라는 것은 멈춘 듯 한 집중되어 있는 시간과 한 공간 안에 머물때 온전히 발견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는 우리는 달아나는 듯한 시간과 자신을 경험하게 된다.“

 

요즘 청년들을 보면 하나에 깊게 뿌리내린 ‘나’로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기보다 방향을 잃은 듯 어디론가 계속 떠나가려는 경향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달아나다가 후에 발견되는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도 작습니다. 시간을 잃으면 세상도 잃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관계도 잃어버립니다.

 

한교수의 이 말은 유럽에서 널리 알려졌는데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괴테아눔의 교육 분과는 한교수의 말에 타당성을 느끼고 숙고했으며 동시에 발도르프 교육은 이 시대적 흐름의 요구에 어떤 것을 내어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결론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시간! 청년들에게 시간적 공간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발도르프교육의 역사가 곧 100년이 되니 세상 곳곳에는 어느 덧 발도르프 학교 졸업생들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이 학창시절을 보내며 시간에 대한 경험을 기록한 자료들도 쌓였있을 것입니다.

 

지금 소개해 드릴 글은 한 발도르프 학교 남학생이 8학년 때 쓴 것입니다. 이 친구는 지금은 큰 회사의 매니저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학창시절에 이미 시간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시간을 매우 특별하게 생각했으며, 시간을 미래 지향적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매니저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친구는 ‘방법 You’라는 책도 냈습니다. 그 책에 자신이 발도르프 학교에 다니면서 ‘시간’이라는 것을 완전히 특별하게 경험했던 순간에 대한 글이 쓰여져 있습니다. 어떤 한 순간에 8학년인 14살의 학생이 느꼈던 그 ‘순간적인 시간’을 기록했습니다. 8학년이 되면 발도르프학교에서는 ‘8학년 연극’을 합니다. 이 친구는 한 달 동안 셰익스피어의 대본을 완벽히 외우느라 큰 노력을 했습니다. 마침내 8학년 연극발표가 시작되는 순간, 서막에 등장하는 그 친구가 무대에 서자 커튼이 열립니다. 그의 앞에는 수백명의 학부모들이 앉아 있고, 이제 대사를 시작할 순간이 왔습니다. 8학년 아이는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커튼이 열리자 지구가 자전을 멈췄다. 도망가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내가 외우고 연습한 것들은 이미 다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커튼이 미처 다 열리기 전에 한 짧은 순간의 생각이었습니다.

이제 커튼이 거의 다 열렸습니다.

“나는 돌아갈 순 없어, 앞으로 나아가야 해!’

커튼이 활짝 열리고 이 친구는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관객들이 완전히 조용해진 순간! 그 순간 시간은 멈추었다.’

이렇게 8학년 학생은 기록했습니다.

 

이 친구가 관객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에 자기 ‘자신’으로서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시간이 정말로 멈추지는 않았겠지만) 멈춘 시간 속에 그 곳에 온전히 존재했던 것입니다. 발도르프 교육에서 한 가지 특징적인 것은 이렇게 아이들이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상대와 타인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제공하는 것입니다.

 

‘연극이 시작되니 그 전 상황과 다르게 (-그전엔 거의 죽기 일보직전이었다.) 나는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솟아나는 끊임없는 어떤 힘을 느꼈다.‘

 

자신안의 힘과 그리고 자신만의 공간을 학생에게 만들어 줌으로써, 그렇게 얻은 힘으로 성인이 되어서는 세상을 향해 힘차게 나갈 수 있도록 발도르프 교육이 이루어 지기를 바랍니다..

 

몇 달 전쯤에 받아 본 신문에 아주 큰 제목으로 쓰여진 “디지털화 된 최신 교육”이라는 문구가 보였습니다. 그 밑에는 광고가 있었는데, 미국의 어떤 교육기관에서 교육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그것을 팔기 위한 광고였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비싸지만 아주 유용합니다. 아이를 관찰하는데 특히나 탁월한 프로그램입니다.’

 

이 프로그램의 기능은 이렇습니다. 선생님 앞에 여러 버튼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학생이 질문을 하면, 교사는 그 학생번호가 입력되어 있는 번호의 버튼을 누릅니다. 그러면 프로그램의 모니터에는 그 학생에게 어떤 방식의 도움이 적절하다는 세가지 정도의 예시를 제공합니다. 예를들면 1번. 그 학생과 대화를 시도한다, 2번. 어떤 문장울 제공한다, 3번 어떤 화면을 보여준다. 이런 프로그램은 아주 표면적인 교육방식입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그 프로그램을 교육에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적용시키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슈타이너는 교사로서 교사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개별성이란 사람 개개인에 있는 고유한 것이고, 교육이란 그 개인의 개별성을 발견하고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것이 진정한 교육이다.’ 슈타이너가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힘과 개별성을 통해 배운다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발도르프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균형잡힌 건강한 신체’를 키울 수 있도록 많은 애를 씁니다. 그 이유는 신체 건강한 사람이 훗날 그 힘으로 자신의 개별적 미래를 개척해 나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개별성입니다.

 

훗날 학교는 시대의 흐름을 읽기 위해 노력하는 곳이자 그 흐름을 관찰하는 곳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8학년 연극에서 ‘시간’을 경험한 아이가 훗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있는가에 아주 많은 관심을 가지는 곳이 될 것입니다. 저는 긴 시간동안 한 발도르프 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습니다. 근무했던 학교의 동네가 작아서 졸업생이 서른 다섯 살이 되어서도 마주치게 됩니다. 다 성장한 아이들의 부모들이 이야기로 전해주는 아아의 학교졸업 후 성장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또 없습니다.

 

사람이 얼마만큼 큰 폭의 발달적 변화를 하는지에 대한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스위스의 가을 어느 학교 풍경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낙옆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는 가을 경치입니다.

 

아주 옛날의 일인데요, 스위스에서 부모들이 모여서 돈을 모으고 학교를 세우고 교사들을 초빙해서 시작되는 학교 개교 첫 해의 일입니다. 학교를 세우고 교사들을 초빙한 후에는 모든 교육적 권한과 책임을 교사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선구자들이었죠. 그런데 부모들이 보니 아이들의 활동량이 적어보였나 봅니다. 그래서 학교까지 들어오는 길, 길게 뻗어있는 가로수길을 등교할 때 걸어갈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노력으로 인해 학교와 유치원이 시작할 때 아이들은 많이 움직인 상태로 등원, 등교를 하게 되었고, 깨어있는 상태로 등교했습니다. 건조한 가을 등교길에 수북히 낙엽이 쌓여있는 것을 상상해보세요. 학교까지 길게 나 있는 그 길 앞에 부모들은 아이들을 차에서 내려줍니다. 3,4학년 아이들은 아주 날쌔고 빠릅니다. 아이들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빨리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서 뛰어가기 시작합니다. 반면 1학년과 유치원 아이들은 서두르지 않고 여유롭습니다. 그 아이들이 길을 가다가 수북히 쌓여있는 낙엽을 발견합니다. 조금 큰 아이들은 생각에 잠겨 그냥 쓱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더 어린 아이들은 낙엽더미를 그냥 지나가지 않고 놀이를 합니다. 자석에 이끌리듯이 낙엽더미에 이끌립니다. 놀이가 시작됩니다. 독일어로 “낙엽들을 헤집어라!” 소리치며 가운데를 쑥 지나갑니다. 계속해서 “헤집어라! 헤집어라!”하면서 다니고 있습니다. 하도 신나게 노니까 앞서 생각에 잠겨 지나갔던 아이들도 뒤를 보고 같이 놀이에 들어왔습니다. 어떤 아이는 “헤집어라!”, 또 다른 아이는 “넘겨라!”하며 낙엽속을 다닙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아이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이오는 어디갔지? 하이오! 하이오!”하며 하이오를 찾습니다. 하이오는 아주 바닥까지 들어가 있었습니다. 밑에 있던 하이오가 얼굴이 빨개져서 올라와서는 환하게 웃고는 친구들과 손을 잡고 학교와 유치원에 갔던 에피소드입니다.

 

어린이들은 아주 기뻤을 거에요. 아주 신나고 행복해하는 표정들이 보이시지요?(웃음)

 

이제 장면을 전환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대학교에 있는 대학생들이고, 강의가 끝났습니다. 교수가 학생들에게 서적을 읽어오는 과제를 줍니다. 독일어로 ‘헤집다’(durchblättern)라는 말로써, 장을 훑어 넘기며 통독을 하고, 넘기다(umblättern)는 말로 정독하기를 요구합니다. 그 후에는 주요한 사항들에 있어서 ‘바닥까지 들어가라(Auf den Grund gehen)’는 말로 주제의 본질을 깊이 살피라는 과제를 줍니다.

 

독일어에는 이렇듯 이중적으로 쓰이는 단어들이 많습니다. 아이들의 놀이에 사용될 때는 활동적 의미였던 단어가 대학교 과제의 경우에서는 사고적으로 쓰였습니다.

 

아동기에 몸과 자신의 사지로 경험한 것들은 실제로 훗날 의식 속에 분명하게 담긴 사고력으로 변화합니다. 그것은 학교에서 온몸으로 배운 것들이 나중에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존재하는 힘으로 변형된다는 것입니다.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어디에서든 열심히 놀다보면 아이들에게 기억에 남을 만한 아주 행복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경험합니다. 그런 순간들을 우리는 훗날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기회라고 여깁니다.

 

우리는 2016년도 여름 발도르프교사연합 연수에서 ‘일반 인간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인간학을 배우며 아동에 대해서도 공부합니다. 여기에 있는 빨간색은 ‘의지’이고, 파란색은 ‘사고’ 입니다.

사고와 의지가 몇 살 때 어떻게 서로 연계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학년쯤으로 한번 정해보겠습니다. 1학년 아이들이 에너지가 넘칩니다. 교사들은 아이들의 힘으로 여러 가지 활동적인 것을 이끕니다. 어떤 아이가 학교에 유리병 하나를 가지고 왔는데 유리병 안에 무엇이 들어있었을까요? 병 안에는 못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못을 굉장히 좋아하는 아이였습니다. 수공업자, 목수의 일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1학년 아이였습니다. 집 근처에 목공소가 있었는데, 보고 모방하고 일을 구경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강한 기질을 갖고 있어서 쉽게 불처럼 분노할 수 있는 성향의 아이였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 아이가 6학년이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이 친구는 여자 형제가 셋이나 있었습니다. 네 명 다 학교를 열심히 다니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이 남자 아이가 6학년 이 시기에 아주 활기찬 아이었고, 에너지가 넘치고 또 기질이 강하다보니 여러 일들이 있었겠지요? 그래서 여자형제들로부터 훈계와 잔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누나 셋에 엄마까지, 이 많은 교육자들로부터의 끊임없는 잔소리에 이 친구는 자유를 선언합니다. “됐어, 나는 이제 더 이상 누나들과 엄마로부터 교육을 받고 싶지 않아!”

 

이 친구는 물론 학업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6학년에 하는 물리수업, 기하학을 너무 잘했습니다. 이 친구의 기질상 아주 잘 했을 것입니다. 공부도 아주 열심히 하고 멋진 공책을 자랑하려고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들어오면 칭찬대신 여러 잔소리들이 쏟아졌습니다. 식사 중에 이어지는 잔소리에 너무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나니 의자가 뒤로 넘어갔고, 이제 제발 그만좀 하라고 문을 세게 닫기 직전, 누나들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이 남자인건 정말 고마운 일이야!”(웃음)

12세, 나는 나를 위해 서 있다. 스스로 서있다’ 라는 느낌과 아주 잘 어울립니다.

 

이 친구가 12학년이 되는 장면으로 한번 가보겠습니다. 이 친구는 이렇게 분노조절하이 어려웠던 친구였는데 이제는 12학년이 되어서 사람들 앞에 서 곧고 힘차게 자기 ‘자신’으로서 자신의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어떤 일을 겪으면서 이 아이가 여기까지 왔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12학년. 낮고 분명한 목소리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어릴적 가지고 있던 분노들이 사라지고 성장하며 아주 멋진 청년으로 자랐습니다. 32살이 된 지금. 이 친구는 엔지니어가 되었습니다. 가끔 기차안에서 만나게 되는데, 자신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 해줍니다. 저는 이 사람의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과정 전체를 보아왔습니다. 이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느껴지는 점은, 어린 시절에 무엇을 했는가가 나중과 깊은 관련이 있고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였습니다. 개별성이라는 것은 발전되어야 합니다. 부모와 교사가 진심어린 관계를 맺고 아이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아이를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아무 문제 없이 잘 자다온 8학년 여학생입니다. 그런데 8학년이 되면서 이 시기에 자기 자신과도, 친구들과 부모님과도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 왔습니다. 교사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그 아이의 부모님과 만나서 이야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도울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사는 그 아이의 어머니와 면담을 하기로 했고, 어머니는 ‘안그래도 선생님을 뵈려고 했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만남이 잘 이루어지면 이 아이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사는 학교에서 이 아이가 겪는 여러 학우들과의 문제나 교사들과의 어려움에 대해 어머니께 상세히 알려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집에서도 아이가 도통 입을 열지 않아 어려움이 많다고 교사에게 말합니다. 담임 교사는 “아이가 자신을 닫고 외부의 모든 것에 대해 반감을 표시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친구들과 선생님이 마음을 닫고 나의 딸을 외면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사람은 감정과 의지로 가득 찬 존재입니다. 이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혀서는 좋은 해답을 내기 어려운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사는 발도르프는 교육예술이기 때문에 어떻게 예술적으로 이 문제를 잘 풀어나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아이가 긍정적으로 내면을 키워 나갈 수 있을까...?라는 고민으로 예술적인 방법으로 학생을 도와야겠다는 생각했습니다. 교사는 슈타이너가 일반인간학에서 8학년 아이들에 대해 묘사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8학년 아이들은 ‘풍부한 상상력을 통해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세상에 표현하고자 하며 그것을 필요로한다.’는 문장이었습니다. 발도르프 학교에는 아이들마다 생일이나 학년말에 받는 개별적 시가 있습니다. 교사가 그 아이에게 개별시 하나를 써주었습니다. 교사는 이 친구가 아프리카에 큰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어려움이 때로는 좋게 작용하기도 한다는 내용을 담은 그 아이만을 위한 개별 시를 써줍니다.

그 학생이 받은 시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저 북소리를 한번 들어보라

저녁이 된 사막을 끌어 당기는.

사막은 비를 담은 구름을 끌어당기고 있다.

아주 뜨겁게 달궈진 사막을 비 한 방울이 적실 때,

땅 속에 있던 씨앗은 새싹이 되어 올라온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다.

풀들은 다시 무럭무럭 자라며,

사자는 포효로 자신의 영역을 되찾는다.』

 

이 학생은 어려움을 극복한 긍정적인 내용을 담은 시를 선생님께 받았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한 후 동창회를 할 때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그 학생이 선생님께 “선생님 제가 누군지 기억하세요?” 라고 묻자 교사는 “당연히 알지!” 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학생이 “제게 8학년 때 주셨던 그 개별시 기억하세요? 그 시가 저를 살려냈어요.”라고 말합니다. 예술적 노력이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어려움과 공경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미래지향적인 긍정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이제 상급과정인 12학년으로 장면을 옮겨보겠습니다.

아이들이 12학년이 되면 가정해서 겪을 수 있는 어떤 위기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학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나 예비 학부모들을 초대해서 학교를 소개하고 공개하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 손님들을 위해 특별히 11학년, 12학년이 나섰습니다. 11학년의 2학기 말에 있는 한 여학생이 단상에 서서 그 날의 마지막 질문을 받았습니다. 학교생활이 정말 행복한지, 좋은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사실 2년 동안 일반학교를 다니다 왔어요. 9학년이 되었을 때 우리 오빠가 일반학교에 갔고, 가서 잘 지내니까 엄마가 저도 가라고 해서 갔다 왔어요. 그런데 어쨌든 저는 다시 여기에 있어요.” 부모들은 이어서 질문합니다. “왜 발도르프 학교로 다시 돌아왔니?” 동료들과 학부모들은 그 질문을 하는 방문객과 언쟁하지 않고도 학교를 지켜내기 위해 앞에 서서 질문에 차분히 답하는 그 학생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일반학교에 갔던 이유와 다시 돌아온 이유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받을 때 이 친구가 담담하게 답합니다. “일단 오빠가 전학을 갔고, 학교 방향이 달라지다보니 같은 학교에 다니면 편할 것 같았고, 일반학교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기 때문에 갔어요. 그 학교에는 교과서가 있었는데 아주 멋졌고 내용도 많더라구요. 그 책을 보니까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순간 생겼어요. 하루는 생물학 수업을 하는 날이었어요. 빔 프로젝터를 통해 많은 그림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갑자기 문장이 여러 개 나오면 열심히 쓰기도 했어요.” 그 아이는 한동안 그렇게 지내다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저 많은 정보들의 연계점은 어디이며, 그 상호적 연관성이 도대체 사람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배우는 것들이 사람과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 거죠?” 선생님은,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일단 생물학이 무엇인지 이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적 질문을 다루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학생은 “그때 나는 예전 발도르프 학교 시절 생각이 떠올랐어요. 예전에 발도르프 학교에서 배울 때는 한 명의 사람으로써 세상에 있는 일들을, 사람의 변화와 역사 혹은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항상 연계 되어있다는 느낌으로 공부를 했었는데, 그게 참 좋았던 것 같았어요. 그 느낌이 그리워서 일반학교 생활이 길어질수록 제 향수병은 짙어졌어요.”는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이제 곧 ‘태아기’에 대해 공부하는데, 발도르프 학교에서 다시 배우니까 ‘이 주제가 나와 얼만큼 어떻게 연결이 되어 있고, 지금 내가 이것을 왜 배우는 가를 알아서 좋아요.”

 

의구심을 가지고 학교를 방문한 손님들은 그 아이를 매우 인상 깊게 봤습니다. 11학년이 당당히 서서 자유롭게 거침없이 자기의 생각을 연설하는 모습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때 한 용기 있는 어떤 아버지가 질문을 던집니다. “도대체 어떻게 배우길래 학생이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대본도 없이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학생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다년간 선생님들과의 시간 속에서 이런 자유로운 토론과 대화를 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를 종이에 적지 않고서도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고, 이것이 익숙합니다.” 그리고 이 질의응답의 시간이 다 지나자 손님들은 앞에 선 다섯명의 학생들에게 감사하는 의미의 큰 박수를 쳐 주었다고 합니다.

 

어떤 실험 하나를 해보겠습니다.

 

많은 교육연구자들과 과학자들은 입을 모아 ‘배움은 즐거워야한다’고 말합니다. 배운다는 것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흥미와 의지로 자신과 주제의 연관성을 느끼며 이루어지는 것으로써,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볼까?‘라는 주도성을 통해 이루어질 때 큰 힘으로 발휘됩니다. 발도르프에 큰 관심이 없고 잘 알지 못하는 과학자들 또한 발도르프 교육을 지지하는 글과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기쁨으로 배우는 온전한 삶’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의미를 모른 채 배우는 것은 의미가 없다’라는 장이 그 책 안에 있습니다. 삶 속에서, 내가 왜 배우는지를 의미를 모르고 배우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 교육 현장에서 발도르프 교육의 좋은 점들을 교육에 접목시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학교의 미래에 대해서 우리가 바라보는 관점 중에 하나는 시간의 질적인 부분을 볼 수 있고, 두 번째는 유아기의 활동이 성인이 된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학창시절에 의미있고 가치있는 것들을 배운다면, 그 힘은 훗날 사람을 아주 훌륭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발도르프 교육에서 시도하는 것은 하나에 정체되는 것이 아닌, 의지와 사고를 넘나들면서 역동적인, 생동감있는 교육이 사람안에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때론 아주 집중적인 의지적 활동이 일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매우 정적인 사고만을 통한 수업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의지와 사고가 적절히 혼합된 혼합적 형식의 수업을 하는 날도 있습니다.

 

 

 

 

 

 

 

 

 

 

이렇게 네가지 단계가 있다고 보겠습니다. (칠판 가운데 혼합되는 영역 - 아래에서부터 빨간색, 빨간색과 파란색 조금, 파란색과 빨간색 조금, 파란색의 네 단계) ‘매우 의지적’, ‘의지가 많지만 사고도 들어있는 것’,‘사고가 더 많지만 의지도 들어있는 것’, 그리고 ‘온전한 사고’의 네 영역. 미래의 학교는 의지에서부터 사고, 그리고 다시 의지로 내려와 활동한 후 다시 사고의 영역에서 돌아보고, 다시 의지의 영역을 경험하는 순환적인 움직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발도르프에서 추구하는 교육 예술입니다.

 

이 네가지 단계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으실텐데요, 경험할 수 있는 실험을 하나 해보겠습니다.

 

예를들어 지금 7학년 역사수업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고, 지금 현재 우리 시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탈리아 피렌체 시청에 거대하고 멋진 그림을 그리라는 명령이 다빈치에게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다빈치는 그 명령을 따르기 어려울 정도로 바빴습니다. 새 발명품도 만들어야 되고, 새로운 도안도 짜야 됐지만 명력을 거역할 수는 없었기에 빨리 해치우고자 합니다. 벽화로 그릴 그림을 종이에 스케치했스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7학년 아이들은 자기들도 다빈치가 했던 것처럼 많은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잘 공감합니다.) 벽에 밑그림을 가지고 조수들을 모으고 그림을 그리고 색깔을 입히는 작업이 시작됩니다. 전투에서 멋지게 승리하는 그림을 그려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문제 없이 아주 잘 됐습니다. 말이 앞발을 들고 말 위에서 멋지게 지휘하고 있는 장군의 전투장면이 완성했습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난 후에도 물감이 다 마르지 않았습니다. 다빈치는 생각했습니다. ‘석탄을 모아 불을 때서 뜨거운 열기로 물감을 다 말려버리자!’ 석탄이 타면서 그 열기는 모조리 그림을 향했습니다. 처음에는 물감이 잘 마르는 것 같아 보였지만, 이내 벽을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광경은 아주 끔찍했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그렸는데 한순간의 실수로 인해 정말 끔찍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7학년 아이들이 내적으로 느끼고 있을 법한 감정이 외부현상적으로 나타난 사건입니다. 15세에는 한 순간 큰 희열을 느끼다가도, 예상치 못한 일로 인해 금방 큰 좌절을 겪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지금 막 진행되고 있는 현재진행적 일이 바로 의지의 영역입니다. 의지가 가득 찬 경험. 우리는 다빈치의 이야기를 통해 조금 전에 그 장소에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생동감 있게 받았습니다. 시간이 지나 어떤 역사학자는 이 사건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 삶의 발자취와 역사를 읽을 수 있다.

한 달 동안 열심히 그린 승리의 그림을 인내심 부족, 그리고 완벽주의 때문에 통째로 날려버린 그 사건. 자신 삶에 있어 가장 최고의 작품이 될 만한 것이 그의 삶 속에 파괴되고 사라져버렸다.‘

이 기록에는 생동감있는 의지도 있지만 사고가 곁들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부록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더 짧고 간단하게 적혀있는데요.

 

‘안기아비의 전투 그림이 1440년 파괴되다.’

 

우리가 점점 파란색(사고)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파래지면 어떻게 될까요? 그곳에 살아 있는 생동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고적인 것만 있는 완전한 새파란.. 위키피디아(구글백과사전)를 검색해 보면 나와있습니다. 위키페디아는 이 거대한 사건을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사실만을 적어놓았습니다.

 

‘안기아비의 전투. 1440년 6월 29일 손실. 레오나르도 다빈치‘

 

12학년에서 의지를 통한 사고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주 위키피디아처럼 간결한 정보를 통해 배운 후 살아있는 의지적 영역으로 내려올 수 있도록 합니다.

 

예술과 연결되어 있는 발도르프 교육은 어떨 때는 온전히 느끼고 생각하고, 그리고 생각하고 다시 온몸으로 경험하며, 자신의 삶과 배움이 긴밀히 연결될 수 있도록 합니다.

 

다양한 교육들이 세상에 있습니다. 수많은 대학이 있습니다. 대학들은 이제 이 시대에서 이런 정보를 주는 것만이 교육의 전부가 아님을 느끼고 있습니다. 배움에 있어서 정보가 다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함부르크 공립대학교의 총장은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지금 우리가 시행하는 모든 시험과 가르치는 과정들 중에 바람직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일반교육에서는 객관적인 사실과 정보를 학생에게 제공하고, 학생들은 이를 충실히 배웁니다. 그런데 학생 내면에서부터 올라오는 무언가는 하나도 없다는 것에 화가 난 상태로 그 글을 적은 것입니다.

 

‘파란색 영역(사고)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우리는 다 시도해 보았다. 결론은 ’옳지 않다‘ 였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주고 있는 것들 중에 인간적인 것이나 혹은 자유로운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우리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서 이상적인 것, 인간적이었던 것들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너무 파란색 영역에만 주로 머무른다는 것을 총장은 느꼈던 것 같습니다.

 

학교가 다시 인간적인 교육을 하는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돌아가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고, 그것이 발도르프 학교가 매일 하루에 하나씩 생길 수 없는 이유입니다. 교사 양성이 원활할 때 새로운 학교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아시아에도 많은 발도르프 학교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1학년과 12학년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을 여러분들에게 들려드리며, 오늘 시간을 마무리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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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1학년 아이들은 아주 깨어있습니다. 그리고 아는 것도 많습니다. 게다가 용감합니다.(웃음) 아이가 1학년일 때는 모두에게 희망찬 황금시대입니다. 아이도 기쁘고 부모와 교사도 기쁩니다. 하지만 학교생활을 하다보면 학교에서의 규칙을 배워야하는 순간들이 오죠. 음식을 먹을 때 식사예절에 어긋나는 행동을 어떤 아이가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교사는 올바른 예절을 알려주었고, 그 아이는 진지하게 배웠습니다. 선생님이 가르칠 때 그 아이 옆에는 그 아이의 가장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진정한 친구라면 친구를 위해 큰 일도 마다하지 않겠지요. 그 친구가 이 상황을 다 지켜보곤 수업시간이 끝난 뒤 선생님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진짜 선생님이 우리랑 8년을 같이해요?”(웃음)

 

1학년, 우리 현대의 아이들입니다.

 

12학년의 예도 있습니다.

12학년의 어떤 학생이 하루는 굉장히 진지한 상태로 하교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그 아이를 보고 “혹시 친구들이랑 문제가 있니? 아니면 학교에 무슨 문제가 있어?”하고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의 부모는 모두 그 발도르프 학교의 교사였습니다. 그러니까 아이에 대해 고민이 더 컸던거죠. 아이가 진지하게 말합니다.

 

“나 오늘 큰 충격을 받았어.”

 

부모님은 직감으로 ‘아.. 큰 일이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내가 지질학 수업중에 대륙이동설을 배우고 큰 충격을 받았어. ‘아, 나는 발도르프 교사가 되야되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야” (웃음)

 

아이에게 그런 결심이 순간 든 것인데요. 그런데 부모님이 두 분 다 발도르프 교사이면 보통 아이는 ‘나는 절대 발도르프 학교 선생님은 안 될거야’라고 생각하며 성장하기 쉽습니다.(웃음) 그런데 정작 12학년이 돼서 스스로 그런 말을 하게 된 자신의 모습에 그 학생은 큰 충격을 받은 것이었습니다.(웃음)

 

발도르프 학교의 저학년 수업과 유치원에서 하는 일은 아동의 내면에 어떤 씨앗을 심어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차차 개별성을 담은 힘찬 자신의 고유성으로 발달하게 됩니다.

 

처음에 들려드렸던 시입니다.

 

『 과거의, 그리고 현재의 풍경과 함께

새로운 그리고 오래된 언어

 

잃어버리고 그리고 다시 찾게 된

친구들과 함께 사는 것

 

순간을 이해하는 것

 

절벽 앞에서 눈을 감지 않기를,

오래된 것과 함께 사는 것에 만족하는 것.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것.

 

그리고 끝없이 새로운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

 

슈타이너의 말로 오늘 시간을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내면의 힘을 통해 외부로 향할 수 있는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일은, 그 사람이 훗날 생동감있는 내면으로서 삶을 살아갈 때, 매 순간의 새로운 환경을 잘 헤쳐나갈 수 있는 있는 근간을 제공할 것이다.』

 

오랜 시간 집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질의응답 >

 

질문 1.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1학년 아이의 에피소드요,

사실 그런 아이를 둔 엄마로서는 ‘우리 아이가 생각이 깊구나~’하면서 좋아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제 아이는 사실 오히려 반대라서 항상 ‘아 내 아이는 여느 아이들과는 다르다.’라고 생각이 들어요. 그런 면을 다르다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엄마들에게 용기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답.

 

전혀 잘못 된 것이 아닙니다. 용기를 가지세요!

그 학생은 위로 형제가 많습니다. 형제들과의 관계속에서 아주 많은 대화를 하며 성장하는 친구예요. 요즘의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에 비해 되려 예민하고 민감한 편이에요. 그리고 주변을 더 잘 느끼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요즘에는 반에서 어떤 아이가 울고 있다면 오히려 남학생들이 선생님께 쪼르르가서 말입니다. 원래 여자아이들이 그런 역할을 많이 해왔었죠. 당신의 자녀는 관찰력이 좋거나 혹은 많은 것을 인지하는 아이를 가지셨을 수 있습니다. 그런 능력은 훗날 물리수업 중, 혹은 여러 가지 관찰수업에 많은 의견을 내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얘기함으로써 학급을 도울 수 있는 가능성이 큰 아이입니다. 아이마다 다 다릅니다. 그리고 그 개별성은 커가면서 계속 강해됩니다. 훗날 지금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어요.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용기를 조금 얻으셨나요? (웃음)

 

 

질문 2

우리학교는 상급을 시작한지 오래되지 않았고, 여러 가지 과제들이 있지만 상급의 아이들에게 무엇보다도 종교학이나 철학수업들이 학교에 필요하다는 내면의 요구, 질문들이 생기고 있는 시점인 것 같아요. 어떻게 정착시킬 것인가에 대한 상들이 구체적으로 없는 것, 이것에 대한 어떤 조언을 주시면 저희들도 방향을 찾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내 발도르프 학교들은 아직 젊습니다. 모든 과목이 다 있는 학교는 적습니다.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봐도 각 문화적, 상황적 민족성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독일의 방식을 표준으로 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교육에 종교나 철학교육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으면, 부모들이 함께 모여서 선생님과 함께 인간적으로 열린 대화를 해볼 수 있겠죠. 그런 요구가 우리에게 있다고 전달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상황 속에서 저의 학교에서는 어떻게 풀어나갔는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있던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로 부모들의 요청으로 인해 종교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양한 종교 수업이 1주일에 한번 시행됐습니다. 사람은 종교적인 어떤 활동, 행위가 필요하다라고 슈타이너는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서 그룹별로 외부에서 카톨릭 교육 해줄 수 있는 분이 일주일에 한번 방문해서 수업했고, 기독교, 불교 그리고 타 종교도 그렇게 했습니다.

저도 25년간 직접 종교수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상급의 아이들에게 세상에 있는 다양한 종교를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종교라는 주제를 다루는 일이 독일 상급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방향성을 가진 종교들이 요즘 많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발도르프 학교에서는 종교수업을 교파/교리적인 관점으로 유일한 진리를 찾게 하는 방식의 수업이나 예배를 하지 않습니다. 대신 인문학적, 역사적 관점으로 종교의 탄생과 특징을 이해하고 경험함으로써 결국 이타심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요즘 시대에 그런 것들을 경험하기가 쉽지 않죠. 인류 역사와 인문한적인 관점에서 종교를 바라본다면 그것이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종교 수업이나 철학수업으로서 적합할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갈라지고 대립될 수 있는 분위기의 경향을 띄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한가지만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 내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아도 열린 마음으로 종교에 대한 건강한 흥미, 인간적인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오히려 발도르프 학교에서 바랍니다. 대답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청계자유발도르프학교 초청강연 http://www.cgfreeschool.kr/xe/pds_referencepublic/16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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