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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령기 아이들과 만나는 방법 본문

발도르프교육학

학령기 아이들과 만나는 방법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6. 5. 25. 13:31

학령기 아이들과 만나는 방법

- 클라우스 페터 뢰


 

안녕하세요, 동료 여러분. 클라라 선생님에 이어 학령기 아이들을 만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클라라 선생님은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양극성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요, 발도르프교육에서 양극성을 만난다는 것은 곧 삶을 어떻게 만나느냐와 같은 문제입니다. 발도르프교육 밖에서는 양극성을 만나느라 비와 추위를 맞으셨겠지만 발도르프교육 안에서는 따뜻함과 햇볕이 있습니다. 슈타이너가 처음에 발도르프학교를 만들 때는 첫 선생님들과 짧은 세미나만을 가졌습니다. 짧은 코스였지만 미래의 교육을 위한 아주 본질적인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본질적인 것 중의 하나인 양극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특별하고 개별적인 개인고유성을 가지고 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우리가 잠에서 깨면 내적인 힘이 같이 깨어나게 되고 그 의식으로 하루를 생활하게 됩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 아이들은 어떤 도전과제를 만나고,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만나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있다면 1시간 정도 우리 개별의 인간이 어떠한 의식을 가지고 잠에서 깨어나는지 다루고 싶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아침 5시에 일어나 그냥 바로 자신이 되어서 하루를 시작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같은 형제자매라고 해도 다른 아이는 자기 자신이 되는데 더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학교에 와서도 아직 꿈꾸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정신적인 힘이 어떻게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는지가 인지학에서 아주 중요한 주제인데요. 중간에 도움을 주는 중간역할의 존재가 바로 영혼입니다. 정신과 육체를 통합시켜주는 영혼의 상태는 개별마다 아주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그래서 영혼영역의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을 오늘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아주 어림에도 불구하고 영혼적인 부분이 빨리 깨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인생에 대해 아주 깊은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어떤 아이들은 자기 육체 아주 깊은 곳에 머물면서 물질적인 세상과 바로 만나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클라라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내면에는 균형을 잘 맞추고 싶은 열망이 있습니다. 내면과 외부가 잘 만나 균형을 맞추는 것이요. 오늘은 인간의 두 가지 수수께끼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 수수께끼는 우리 몸 속에 있는 자아입니다. 또 다른 것은 나이에 맞게 한 걸음씩 어떻게 인간을 발달시킬 수 있는지입니다. 세 가지(삼지적 관점)와 관련해서 온전함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요, 오늘날에도 그런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중부유럽의 경우와 관련해 말씀드리고 싶은데, 여기에도 온전함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공통된 지점이 있습니다.

 

전자제품을 많이 쓰는 요즘 세상에는 경제적인 것, 정보 등에서 한쪽 방향으로만 계속 압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해서 훨씬 더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이 양상들이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지식을 넣으려고 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중부유럽, 혹은 전유럽에 다 해당하는데요, 이제는 시간도 줄이고 싶어서 9년간의 교육과정을 압축해서 8년으로 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어떤 부모님들은 그걸 잘 받아들여서 4살짜리 아이에게 아주 집중적인 교육프로그램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4살짜리 아이에게 기초적인 수업을 통해 생각하는 것, 사회적인 훈련 등을 하여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그분들은 이것이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름길인 것 같지만 실수이며 짧은 길 같지만 느린 길이다, 라는 독일어 속담이 있습니다. 아까 나온 풀을 당긴다고 해서 빨리 자라는 게 아니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그것에 대한 아이들의 반응이 나오고 있습니다. 독일의 최신 주간지의 특집 주제는 이제는 그만둬. 더 이상 할 수 없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명백하게 다룬 적이 없습니다. 제목은 지금 세대의 스트레스라고 해서 어떻게 학교가 아이들을 병들게 하는지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게 힘든 일이지만 사실입니다. 이제는 모두가, 부모 교사 의사 치유자 등 한 목소리로 멈춰야 한다고 합니다. 기사 중의 몇 줄을 말씀드리면, “이제는 학교의 스트레스가 영구적인 것이 되었다. 시험에 성공적으로 도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육체와 생명의 위험 하에 가능하다. 독일의 교육은 이제 살아남기의 교육이 되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많은 아이들이 심리적인 것에서 오는 육체적인 증상을 보여주고 있다. 밖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몸안 깊이 들어와서 드러나는데 민감하고 초조해지고, 불명증, 무기력해지면서 동기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인간의 온전함이 생길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각해야 합니다.

 

슈타이너가 1919년에 이야기했습니다. 아이들 각각의 발달단계에 초점을 맞추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교육자로서 아이들의 발달단계를 제대로 알 수 있다면 우리가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것에 더욱 잘 도달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부모로서 교육자로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것, 때로는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잡지의 한 구절인데, 사춘기의 한 아이가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우리에게 지식을 밀어넣고 있는데 우리는 품위와 위엄을 가진 인간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양극성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계속 들어오는 압박과 밀어넣음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해석하고 어떻게 자신을 세울 것인가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가 잘 발달하기 위해서 교사로서 부모로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래서 아이의 발달에 대하여 괴테와 슈타이너 두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괴테는 인간을 잘 살펴보면 늘 두 가지를 볼 수 있는데, 바깥의 것과 내면의 것, 그리고 이것을 연결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1차원의 존재가 아니며, 늘 두 가지의 차원이 연결되고 혼합되어 있는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괴테가 어느 날 은행잎(동양에서 온)을 바라보며 외부의 어떤 것과 내면의 나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시를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이 나무의 나뭇잎을 바라보건데

아주 먼 동방에서 온 이 나뭇잎

아주 비밀스런 의미가 담겨있다

그것을 보는 자만이 알 수 있는.

이것은 살아있는 하나인가

하나인데 둘로 나눠져 있는가

아니면 둘인데 선택하여 하나가 된 건가

이 질문을 잘 생각하면

올바른 대답을 발견할 수 있다

나의 노래가 당신이 그것을 느낄 수 있게 하는가?

나는 둘이다

하나이면서 둘

둘이면서 하나

 

슈타이너는 괴테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괴테의 자연과학적인 부분에 대해 영감을 많이 받아서 자기 생각을 발전시켜 갔습니다. 아이가 어리든 나이가 들었든 아이의 발달단계를 잘 이해하고 다가서는 게 세상을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방법입니다. 슈타이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1921그러므로 우리는 발도르프교육에 이러한 강조점을 둬야 합니다. 교사는 아이를 자기 앞에 서 있는 하나의 수수께끼를 보는 것처럼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교사는 발견해야 합니다. 아이가 무엇을 가지고 왔는지. 교사는 독단성을 갖고 아이를 대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가 교사입니다.” 이것은 계속해서 아이와 만나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밖으로는 아이를 가르치고 만나는 외적인 행위를 하면서 동시에 계속해서 내적으로 질문을 하고 찾아야 합니다.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 발달단계나 특성에 대한 것.

 

클라라 선생님이 유치원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이제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그 아이들이 무엇을 가지고 왔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교육을 해야 할지 이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상상해보세요. 지금처럼 조용히 앉아 있는 아이들 말고 전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4살짜리 아이들을 상상해보세요. 그냥 느껴보세요. (온몸으로 보여주심) 두 아이가 있었는데, 벤자민 빨리 와봐! 저기 있는 사과가 굉장히 맛있을 것 같아! 과수원 주인이 막아놓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이 그 사과를 원합니다. 4살짜리 아이를 상상해보세요. 그 아이들에게는 나의 움직임이 나입니다. ‘나는 환경 속에 살고 있어. 저기 있는 맛있는 사과를 먹어야지.’ 사과를 얻기 위해 뛰어갑니다. 나는 4살이기 때문에, 내 머릿속에 있는 나가 아니고 환경(움직임) 속에 있는 나이기 때문에 그래서 모방력이 뛰어납니다. 환경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모방하며 삽니다. 헌신과 모방, 의지, 움직임. 그리고 아이라는 존재로 있는 것. 그 다음 단계로 가기에는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 움직임 속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꼈던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가보겠습니다. 이제 18살입니다. 저희 학교에서 아주 힘든 운명에 처한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16살 때 어머니가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너무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몸이 아팠고요. 그리고 12학년 프로젝트 발표회가 있었습니다. 그 여학생이 무대로 오를 때 관중은 아주 조용했습니다. 그 여학생은 별다른 움직임 없이 아주 결단력 있는 모습으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준비한 문장을 명확하게 전달했고 모두가 그 말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을 보면 아주 솔직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아이들이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용기를 가지고 정직하게 말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 여학생은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저는 아팠습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세상으로 나왔는데요, 동네에 있는 길에서 별 할 일 없이 있는 아이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저는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2년 동안 길거리 아이들과 연극 준비를 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 당시 홀에 있던 사람들은 엄청나게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그 여학생이 얼마나 의지를 가지고 작업을 해왔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 여학생 발표의 말미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제 이것을 읽어드릴 텐데요, 4살 때 움직임 속에 있던 그 아이의 움직임은 어디로 갔을까요? “다시 또 다시. 여러 번 저는 깊이 놀라움을 가졌습니다. 얼마나 이 아이들이 변할 수 있는지. 아이들과 작업 속에서 배웠습니다. 아이들이 어떻게 스피치와 드라마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결심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러면 4살 아이의 움직임은 18살에 와서 어디로 갔나요? 그 움직임은 이제 내면에 있습니다. 내면의 사고로 그 움직임이 이어졌고 그 사고를 이끄는 위치에 있습니다. 바깥의 움직임이 안으로 들어왔고 이것이 사고가 되어 사고를 이끕니다. 이제는 더 이상 공감에만 머물면서 의지를 내는 것과는 다른 시기에 왔습니다. 사고를 합니다. 더 이상 환경이 아니라 어떤 지점에 왔습니다. 이제 논리가 중요하며 명백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때가 되면 내 속에 있는 나와 자유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4살 아이의 단계에서 18살 아이의 단계로 진행되기 위해 어떤 과정이 있었을까요? 슈타이너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움직임 속에 있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그것을 멈추고 내적인 움직임으로 가게 됐을까? 중간단계는 어떻게 되는가?

 

요즘은 사고라는 것이 점점 더 어린 나이에 강요되고 있지요. 여기에도 양극성이 보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앞에 오고 일찍 깨우게 되면 아이는 이렇게 요구합니다. 나는 계속 어린 상태로 있고 싶어. 한 아이가 있습니다. 아주 일찍 깨어나게 하였습니다. 6살 아이임에도 형제들과 뭔가를 논쟁하는 걸 즐겼습니다. 어린데도 마치 학교에 다니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1학년 때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는 놀이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그 반에 있던 한 아이의 엄마가 왔는데 그 아이는 놀이에서 뛰쳐나가 근처에 있던 어머니에게 가서 질문했습니다. 마치 기자처럼, “입양한 아이를 키운다는 게 어떨 것 같으세요?” 라고 질문했습니다. 선생님은 그걸 보고 기뻤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가 깜짝 놀라서 아이를 똑바로 보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지적인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사회적 문제를 봐라, 이런 식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이를 제대로 응시하면서 때로는 좋을 때도 있고 좋지 않을 때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는 잘 마무리할 거야.” 그러자 그 어린 기자는 그렇죠!” 하고 돌아갔습니다. 어린 아이도 갑자기 깨어나서 어른처럼 생각하고 다시 어린 아이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찍 깨어나는 지적인 성향의 아이조차도 어린 아이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슈타이너의 질문으로 다시 가보겠습니다. 상상력 단계에 있는 아이에서 명확한 사고의 단계로 가기 위해서 발도르프학교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보겠습니다. 슈타이너가 말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어린 시절 자유놀이에 있는 아이에게 삶이라는 거대한 짐 속으로 가는 인간으로 중간단계의 다리를 만들 수 있을까요? 아이의 발달단계를 잘 보고 학교에서 예술적인 작업 속에서 이 다리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술적인 작업은 진지함과 즐거움이 함께 연결될 수 있으니까요. 모든 예술적인 작업은 의지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아이들의 의지력을 생생하고 활발하게 함으로 해서 순수한 육체를 치유하는 것입니다.

 

저학년 어린 아이들을 보면 얼마나 예술적인 작업 속에서 진지하고 즐겁게 활동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인지학적인 관점에서 학교에 들어온 아이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클라라 선생님의 강연에서 우리는 어린 나이의 아이들에게는 유기적인 활동, 놀고 뛰어다니는 일이 건강한 신체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 몸을 만드는 생명력이 이제 학령기가 되면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그 힘으로 인해 한 면은 배우고 기억하기, 다른 한 면은 상상이라는 좀더 생기있는 성격의 힘이 됩니다.

 

어떤 아이들의 성향을 보면 사고하는 게 너무 발달되어서 어제의 일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잘 말할 수 있습니다. 기억의 아이들과 반대되는 상상의 아이들은 그림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고 대신에 기억이라는 말을 쓰겠습니다. 개별적인 아이들이 어떻게 내면생활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아주 흥미롭습니다. 1학년 교실에 두 아이를 상상해보세요. 둘은 어제 들었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한 여자 아이가 서서 부끄러움이 있지만 이야기합니다. “왕의 아들이 있었고 계단을 내려갔고 말이 있었고 그리고 그 왕자가 말을 봤지요. 엄청 멋진 말이었어요. 은색 고리가 있었고 엄청 멋진 장식이 있었어요. 그 장식에 은색으로 된 것들이 있었어요.”

 

그러면 교사와 다른 아이들은 , 어제 그런 이야기를 했었나?’ 합니다. 그 아이는 자기 상상 속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8분쯤 지나서 , 잘했어, 이제 스테판이 말해봐.” 그러면 , 그 왕자가 용 만났고 싸웠고 이겨서 왕 됐죠! !” 두 아이는 모두 다른 부분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교실에서 가정에서 다른 한 쪽을 어떻게 가져올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양쪽의 것을 다 도와주기 위한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상상으로 가득한 아이는 관심이 있는 일은 더 잘 기억합니다. 아주 기억을 잘하는 아이에게도 좀더 상상적인 것을 발달시켜서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관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중간단계인 가슴영역에서 리듬적인 작업이 필요한 것입니다. 슈타이너는 이런 리듬적인 영역은 결코 지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실 안에 있는 리듬적인 것을 발달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이 리듬영역 속에서 관심, 관계, 행위 들이 잘 발달되면 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나이에는 교사 부모 모든 사람이 리듬적인 영역으로 진취적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부모로서 교사로서 우리가 하는 모습을 열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교육연구자들은 말하길, 요즘의 교육이라는 것은 개별화된 아이를 관찰하고 그 아이와 어떻게 관계를 가지느냐에 따라 더 좋은 교육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두뇌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발도르프교육에 큰 관심을 기울입니다. 물론 주류 경제를 다루는 사람들은 관심이 없지만요.

 

1923년에 슈타이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탄생과 변화, 이갈이 시기에 있는 아이는 아이 전체가 감각기관입니다. 생리학적으로 정교하게 불 수 있다면 우리는 아이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얼마나 정확히 모방하고 감지할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100여 년 전에 슈타이너가 한 말과 최근 연구결과는 상당히 비슷합니다. 다음은 2007년에 나온 연구결과입니다. 우리는 연구를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초기학령기의 아이들은 어른들과 교사들이 행동하는 모든 것을 내적으로 모방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부모로서 교사로서 아이들 앞에 서서 얼마나 멋진 책임감을 갖고 있는지를요. 슈타이너가 말한 교육이란 자기를 교육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아를 세우고 아이와 좋은 관계를 만들어간다면 아이들은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클라라 선생님이 언급한 자료에 따르면 주된 배움의 과정이란 다른 인간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교육이라는 트랙 위에 모두 서 있습니다. 아이의 내면에 있는 것을 보면서 작업해나가는 게 필요합니다. 아이의 세 발달단계를 보면, 유치원시절의 단계가 있고요, 담임과정 선생님과 함께 하는 단계가 있고요, 그 이후가 되면 판단이나 사고와 연결되는 상급과정의 단계가 있겠습니다. , 그러면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이런 발달단계에서 특별한 지점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교사로서 다음 블록 때 내가 어떤 수업을 하지?’ 할 때요, 그럴 때 교사는 이 시기의 아이들에게, 아이들 내적인 상태가 어떠해서 수업을 할 것인지, 내적인 레이더를 사용해야 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아주 솔직하기 때문에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도 될까? 변화가 필요할까?

 

발달과정의 지점을 말씀드리면, 우리가 수업을 하고 있는 것이 아이들의 내적인 지점과 하나가 되는 작업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 발달단계와 맞지 않는 작업을 하게 되면 물론 다정한 아이들은 교사와 부모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도 있겠지요. 시냇물 앞에서 머리를 빗는 것처럼요. 아이들의 발달단계와 아주 어울리는 작업을 하게 되면 교사로서 바로 감이 옵니다. 아이들의 내적인 것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는 것을요. 그러면 아이들이 작업을 하게 되고 , 이 시기에 필요한 일이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죠. 그래서 30분 쭉 작업을 하더라도 중간에 밖에 안 나가고 집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학교에서 커피를 마시고 그러지는 않겠지만 제때 제대로 된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저학년에서 고학년까지 발달단계의 시기시기별로 필요한 것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발달단계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의지입니다. 아이의 의지를 북돋아주고 도와주면 아이는 계속 잘 발달해갈 것입니다. 발도르프학교에서는 4학년에 수공예, 농업을 할 수 있겠는데 예전에 했던 것, 지금 하는 것, 앞으로 할 것들에 대해 다룰 것입니다. 아이들은 이런 일을 아주 좋아합니다. 하나를 읽어드릴 텐데요, 아이가 쓴 글입니다. 이 시기 이 아이에게 어떤 게 필요해서 이런 일을 하는지 아시게 될 겁니다. 4학년이라는 시기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서 어른에게 질문을 합니다. 이제는 세상을 정확히 바라보고자 합니다. 4학년 아이가 쓴 일지입니다.

 

우리는 먼저 밭을 갈고 허수아비를 세웠습니다. 씨앗을 뿌리고 가꿔 여름에 우리는 곡식을 거두고 마른 땅에 잘 저장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곡식들을 탈곡할 겁니다. 그걸 깨끗하게 한 다음 빻을 거예요. 그리고 빵을 구울 겁니다.

 

발도르프교육이라는 것은 아이의 의지를 잘 발달시켜서 성장하고 의문을 가지고 세상을 만나고 스스로의 생각을 하도록 합니다. 위의 글을 쓴 여자아이는 농사과정을 아주 즐겼고 스스로의 생각으로 뭔가를 만들어갈 것입니다. 이 아이는 아직 시제를 배우지 않았는데도 자기 일지 속에 쓰고 있습니다. 옛날에 우리가 밭을 갈았지. 그리고 우리는 빵을 구울 거야. 발도르프교육은 아이 내면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깨어나도록 도와줍니다. 그냥 지식을 주는 게 아니라 경험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생각으로 뭔가를 이끌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시제에 대해 자연스럽게 쓴 것이 아이들이 시제에 대해 공부해야 할 것으로 가는 데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쟁기를 갈고 농사를 지은 것이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4학년에서 6학년으로 가보겠습니다. 2살 차이지만 아주 새로운 시기입니다. 여러분이 6학년 부모들에게 6학년이 되면 아이가 어떻게 변하는지 물어보면 아주 재미있는 대답을 들을 것입니다. 집에서 엄마가 설거지 하는 것 좀 도와줘, 그러면 아이는 왜 그래야 하는데?” 하고 말합니다. 6학년 정도가 되면 조금 작은 정도의 이른 시기의 판단, ‘?’라는 생각을 하는 시기입니다. 물리시간이나 수업시간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잘 마련해준다면 그 아이는 계속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좋아할 수 있겠지요. 중요한 건 그럴 수 있는 여유 공간을 줘야 합니다.

 

어느 반모임 때 한 학부모가 말했습니다. “이 아이에게 여유 공간을 줘야겠다는 걸 깨달았어요.” 집에 나비가 되는 번데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말했습니다. “이 누에고치 속에 번데기가 있는데 네가 잘 보면 뭔가가 진행되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아이는 절대로 잊어먹지 않았어요. 그리고 아이는 고치 속의 번데기가 움직이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고치 안에서 나비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 남자아이 엄마는 과학자였습니다. 그 과정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이 아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둬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혀를 깨물고 참았다고 합니다. 그때 그 반모임에서 그 엄마가 그걸 이야기하자 모두가 공감했습니다.

 

아이는 창문을 열고 나비가 나가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스스로 질문을 했습니다. ‘이 나비는 어떻게 자기가 해야 할 것을 알 수 있지?’ 물론 6학년이 되면 가르칠 것도 많고 할 것도 많지만 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여유 공간도 줘야 합니다. 아이에 따라 반응하는 것은 다를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기에 같이 있는 엄마는 아이의 상태에 대해 보면서 알 수 있겠지요. 그리고 같은 반에 있는 아이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주 슬픈 모습으로요. 그때 엄마는 마음속에 경고등이 울렸어요. 우리 아이가 왜 이럴까? 그래서 물었어요. 내가 도와줄 게 있니? 그러자 아이는, 아니야, 도와줄 거 없어. 줄리어스 시저가 죽었어. 그랬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시저가 죽었다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왜 그래야 했을까, 하는 질문이 내면에서 생긴 것입니다.

 

발도르프교육에서 6학년 시기의 물리수업은 그래서 아이 스스로 관찰하고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그리고 상급이 되어 어떤 시기가 되면 교사들이 느낍니다. 이제 아이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발달되어야 할 시기구나. 11학년이 되어 종교 철학시간이 되면 세상의 많은 종교와 철학에 대해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시간에 불교신자와 대화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의 독특한 생각과 만나는 것이 아이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운명, 카르마에 대해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11학년 아이들은 스스로의 생각을 이끌어내야 했고 그렇게 대화를 해야 했습니다. 한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과학적인 특성이 있는 아이였습니다. 이 아이가 영향을 받고 있던 과학적인 부분과 불교가 충돌을 하였습니다. 나름대로 판단하고 생각하여 이후에 글을 썼습니다.

 

나는 모르겠어. 운명이라는 거, 카르마가 있는지 없는지. 과학은 아직 그걸 증명 못했어. 반면에 자연과학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중에 하나야. 왜냐면 그것은 우리가 볼 수 있고 측정할 수 있는 물질들만 다루니까. 과학은 다른 차원의 존재에 대해서는 연구할 수 없는 거잖아. 내가 그걸 깊이 연구해봐야겠어.’

 

처음 시작한 걸로 돌아온다면, 어린 아이에게 지적인 것으로 압박하는 현대의 모습과 달리 1919년 첫 발도르프학교의 목적 중 하나는 아이의 발달단계를 제대로 보자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실에서 교육에서 어린 시절의 모습들, 이뤄져 가야 할 모습들을 제대로 보고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로 몇 가지 든 것처럼, 4학년에 시제에 대해 스스로 느낀 것, 6학년에서 초기의 판단, 11학년에서 깊이 있게 자기 사고로 이끄는 것들이요. 이러한 지점들을 잘 바라보면서 아이들이 성장해 나가는 데에 발도르프교육에서 말하는 의지력을 중요하게 여기고 의지력, 감정, 사고를 잘 발달시킨다면 우리는 미래를 위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발도르프교육은 언제나 새로운 것과 더 나은 것에 대한 탐험이자 노력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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