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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현대 사회와 삶에 대한 인지학적 고찰 - 크리스토프 비히허트 본문

인지학/2013 AWTC 강연록

현대 사회와 삶에 대한 인지학적 고찰 - 크리스토프 비히허트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6. 5. 25. 13:29

현대 사회와 삶에 대한 인지학적 고찰

 

크리스토프 비히허트

 

 

존경하는 참석자 여러분, 저녁인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며칠 간 여러분과 함께 교육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인지학에 대해 이런 행사가 있다는 것이 대단히 기쁩니다. 발도르프교육이란 인지학을 통해 인간에 대해 상당히 유익하고 새로운 관점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관점이란 어떻게 보면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과제는 교육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오늘의 과제는 인간의 발달, 자기 자신의 계발에서 어떻게 인지학을 통해 그것을 할 수 있는가입니다. 그래서 이 컨퍼런스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다루는 그리스도의 자극이 슈타이너가 말한 부분과 연결이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다루는 내용과 마지막 다루는 내용은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지금 슈타이너의 잠언에 대해 하나 말씀을 드리는데요, 1924년 발표한 시입니다. 6줄 밖에 안 되는 시입니다.

 

물질에 팔려 쏠린다는 것은

영혼을 갈아 부순다는 것이다

정신 속에서 스스로를 찾는다는 것은

사람과 연결하는 것이다

사람 속에서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은

세상을 세우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물질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육이라는 것은 잘 세우고 만들어나갈 수도 있지만 또한 사람을 파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성찰, 자기 깨달음, 자기 인식을 통해서 물질을 통해 자신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어있는 정신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첫 두 줄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두 줄의 표현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회성에 대해 표현한 것입니다. 이전 시대에는 인간관계가 민족이나 씨족 등을 통해 저절로 형성되어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 시대에서는 저절로 인간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고려하는가에 따라 인간관계가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발도르프학교에서도 다른 어떤 별이 있다’,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지각해야 건강해집니다. 정신적인 연결고리를 함께 생각할 때 공동의 작업이 가능한 것입니다.

 

, 마지막의 두 줄은 인간에 관해 표현한 것인데요, 사람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인식한다면(깨닫는다면) 우리는 세상을 세워나갈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세상을 세운다는 것이 곧 자기를 위해서이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사람 속에서 자신을 바라본다는 표현은 우리 인간이 주력해야할 부분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핵심적인 질문은 늘 이렇게 다가왔습니다.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가?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이라는 것은 교육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두 세대 이후에 철학에서 다시 다른 시도를 하게 됩니다. 선함이라는 것을 철학에서 분리해 윤리라는 개념으로 가져옵니다. 여기에서 아주 특별한 것이 일어납니다. 선함이란 진정한 이성적 성찰, 적절한 것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을 합니다. 여기에서 진정한 성찰이라는 표현은 양극을 가르고 중간을 가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500년 전에 이미 호메루스가 서사시에서 표현한 게 있습니다.

 

오딧세이의 이야기를 보면 주인공이 항해를 하는데 양쪽을 잘 갈라서 앞으로 나가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가운데를 가야 하는데 스켈라라고 하는 사람을 집어삼키는 악마가 있습니다. 물속에 엄청나게 괴기스런 동물이 있어서 떨어지면 잡혀먹게 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잘 성찰하여 이성의 힘으로 잘 가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붓다의 길과 연결이 되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붓다의 가르침 중 팔정도가 일맥상통합니다. 붓다 스스로 길의 가운데, 중도라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중도라는 말은 양극단을 피하고 중간지점을 잘 따라가는 것입니다. 노자의 도교에서도 음양을 얘기하는데, 여기서도 양극의 균형에 대해 얘기합니다.

 

, 그러면 고대의 페르시아 문화도 살펴봅시다. 여기에서 새로운 요소가 나옵니다. 페르시아에서의 관점은 음양에서 얘기하는 것, 즉 선악을 얘기하긴 하는데 아직 노자가 말하는 중용, 중도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선악은 매우 강하게 얘기합니다. 여기에서는 양극으로 빛과 어둠을 듭니다. 아후라 마즈다라는 선한 신과 앙그라 마이뉴라는 어둠의 신이 있습니다. 페르시아 사람인 마니가 세운 마니교에서도 선악을 말합니다. 마니교는 지금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마니교가 세계종교가 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니교에서는 이원설로 선과 악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악이라는 것을 아주 명확하고 세밀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사실 선을 통해 악을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어렵게 그려놨습니다. 악이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어떻게 선함을 찾아갈 수 있을까요?

 

기독교에서는 이 마니교에 대해 온힘을 다해 반대 입장을 표합니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출발합니다. 이때부터 커다란 반대세력이 있습니다. 왜 마니교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를 할까요? 여기에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흥미로운 시각이 들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부터 인류에게 악이라는 것은 사람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결함이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사람에게 들어있는 악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저절로 들어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요.) 기독교 입장에서는 악이 선이 없는 부분이라고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선악의 공존이 아니라 선이 없는 상태가 악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악이라는 것을 개인이 씨름하고 이겨내야 하는 것으로 보고 싶지 않았던 거죠. 이러한 시각에서 마니교는 커다란 세력을 얻지 못하고 배척당하게 됩니다.

 

사실은 여러분이 직접 기이한 것을 느끼셔야 하는데요, 성경에는 분명히 사탄이라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태리의 유명 시인 단테가 있었습니다. 단테의 신곡에 다음과 같은 것이 쓰여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지옥이라는 것이 굉장히 입체적으로, 아주 선명하게 묘사됩니다. 신곡에 나오는 부분 중 로마의 어떤 시인 그룹이 지옥에 들어있는 것을 묘사합니다. 여기에 굉장히 심각한 것이 튀어나오는데요, 우리가 호메로스에서 본 것과 같이 악이라는 게 두 개의 얼굴, 두 개의 특성을 갖는다는 게 단테의 신곡에서도 묘사됩니다. 사람이 욕정과 욕망에 이끌리면 불타는 지옥에 시달린다고 묘사돼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를 들어내고 찌르고 남을 나쁘게 한다면 차가운 지옥, 사람이 냉각되는 지옥에 간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이것은 교회에서 말하는 믿음을 통해서 모든 게 사해지고 없어진다고 하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정신적인 세계와 연결됐다는 것에 대해 어떤 것을 보게 됐다는 것입니다. 교화되는 것을 그 동안에는 기독교에서 시작했습니다. 뭐를 알리면 그걸 받게 되었잖아요. 이제 여기에서 인류에게 새로운 것이 시작하는데요, 다시 말해 외적인 세계에서 무언가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 사람의 내적인 세계에서 일어난다는 것으로 완전히 시야가 넓어졌습니다. 15,16세기에 와서는 세상과 사람이 분리된다는 인식에 도달합니다. 15,16세기 이전만 해도 인간은 자연과 대단히 밀접해서 자연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면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그것이 정지되고 다른 시각이 들어갑니다. 사람 스스로가 혼자 살고자 합니다. 더 이상 연결되고 접합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모든 것에 답변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세상을 객관화된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해 나는 여기 있고 세상은 밖에 있으며 내가 세상을 필요로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자연관, 세상에 대한 관이 바뀌어서 나는 필요로 해서 세상을 이용하고 다룬다는 관점이 생긴 것입니다.

 

바코 콘티에굴람이라는 영국의 철학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나는 세상을 실험하는데 나와 관계없이 나는 세상을 실험할 뿐이다.” (나는 세상을 실험하지만 나는 거기에 시달리거나 힘들어지지 않고 단지 세상을 실험할 뿐이다. 세상을 착취할 수 있음.) 바로 이것이 합리주의의 탄생입니다. 그래서 합리주의에서 경험주의로 넘어가게 되지요. 이제 합리주의에서 경험주의로, 경험주의에서 물질주의로 서양사는 흘러갑니다. 물질주의라는 것은,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데 여기에 나의 도덕적인 관점 없이 세상을 바라볼 뿐입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은 인류 전체에서 굉장히 필요했던 부분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그러한 관점을 통해 세상을 대상적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겁니다. 이것을 토대로 우리는 자연과학을 발달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연과학은 이제 기술(테크닉)과 접합되어 연구되고 있습니다. 물질주의가 이제 물질주의적인 기술주의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같이 연구되고 있어요.

 

이 시점에서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세상을 객관화해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겁니다. 이것도 또한 필요한 부분인데요, 사람이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독립된 존재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이 생긴 겁니다. 독립된 존재는 스스로 책임을 지는 존재입니다. 바로 이것이 합리주의와 물질주의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시대를 잘 보면 여전히 합리주의, 물질주의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이미 지나간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시대에 진입했습니다. 다시 말해 물질주의 시대는 지났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유를 정복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 스스로가 규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러면 이것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바로 물질주의가 우리를 병들게 하는 부분에 대해서 살펴야 하는 시대에 온 것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놔두는 게 아니라 다른 관점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러면 인류는 어느 지점에 와 있는 걸까요? 합리주의와 물질주의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 삶의 영역에서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고가 이제는 변화됐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이제 정신적인 차원을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이 정신적인 차원을 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하여 가치를 두지 않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노력을 한다면 이제 정신적인 차원을 다시 체험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여기까지에는 굉장히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바로 이것을 슈타이너는 <자유의 철학>에서 근원적으로 제시합니다. 슈타이너의 표현은 사람이 의지적으로 많은 노력을 하면 정신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의지에서 정신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슈타이너가 괴테에 대해서 그렇게 몰두했을까요? 괴테는 사실 이 자연을 객관적으로 잘 관찰하고 바라보면서 여기에 사람의 정신성을 담은 쪽으로 연결할 수 있는 다리를 놓은 사람입니다. 자연을 관찰하여 정신성을 담은 사고로 나아갔습니다. , 그러면 어떻게 선이란 것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 과정을 말씀드리면, 합리주의에서는 객관과 대상을 중시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아주 철저하게 밖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리고 사고한다는 것이 얼마나 생동감 있게 가능한지는 놓쳤습니다. 동시에 사람은 아주 특별하고 비범한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깥의 세상에 일어나는 것을 잘 관찰하면서 자기 자신과 연결할 수 있는 고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합리주의와 반대되는 것이라고 분리해서 볼 수 있습니다. 합리주의에서는 바깥만 바라보니까요.

 

그러면 우리가 이것을 통해 생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연결고리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대해 무엇인가를 행위하는 것은 결국 나에게 돌아오고 나와 연결된다는 것을 우리는 생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똑같이 발도르프교육에 적용을 시켜보면, 교사로서 발도르프교육을 교실에 적용한다면 나와 아이들은 교실에서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교육자가 됩니다. 그리고 현대의 은행이 왜 윤리성을 담고 활동해야 하는지가 여기에 답이 있는 것입니다. 내 돈을 은행에 넣었는데 그 돈이 어떻게 흘러가는가는 나와 연결된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관점입니다. ‘내 돈을 은행에 넣는데 그 돈이 화학물질을 만드는데 쓰이는지, 원자력발전을 쓰이는지 알게 뭐야가 아니라 내 돈이 자연을 구하는 데 쓰이는지 살펴보고 그것과 연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와 세상은 연결되어서 이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책임감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입니다. 내면을 바라본다는 것은 곧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이 선함이라는 것을 찾아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면(아래가 둥근 반원) 인류가 이렇게 출발하여 15세기가 가장 밑의 곡점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16세기 이후에 우리는 이러한 곡선으로 위로 올라가는데요, 바로 우리 인간이 정신성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정신성과의 재결합에 대해 배워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루돌프 슈타이너가 전달하려고 한 굉장히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사실 인류는 정점을 찍고 나서 올라가지 못하고 나락으로 빠질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구렁텅이로 빠지는 게 아니라 이렇게 다시 재기할 수 있는 것도 인류가 사고할 수 있는 힘으로 획득한 것입니다.

 

여러분들께 선동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학은 에테르를 선택하지 않고 아톰(원자)을 선택했습니다. 바로 그 결과 사람이 사람 안에 들어 있는 생명의 힘을 새롭게 쇄신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굉장히 흥미로운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지학이라는 것을 알고 인지학적으로 사유를 한다면 그 생각 속에서 우리의 생명의 힘을 어떻게 활성화시킬 수 있는가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반대를 하는 사람들은 그러면 에테르를 어떻게 증명하는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생동하는 사고를 할 때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원자력 발전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바로 이것도 같은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원자론이라는 것도 사실 아직까지 가설입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지만 지금 현재 적용하고 있습니다. 에테르의 법칙도 현재 적용하고 있습니다. 원자론이 하나의 가설이듯 에테르 이론도 하나의 가설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본을 보면 원자력 발전이 결국은 하나의 가설을 적용한 것인데 현실적으로 파괴를 통해 적용이 되었습니다. 그것에 비해서 다른 한편으로 에테르 이론이 얼마나 긍정적으로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가, 우리는 교육이나 농업을 통해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삶의 실천 속에서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삶의 실천에서는 인지학의 길이라고 우리는 표현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자기 연마, 자기 교육의 길이라고 인지학을 표현할 수 있어요. 인지학이라는 것은 사유 속에서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생각이라는 게 내 속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게 인지학입니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지혜는 빛 속에서 살아 있다.’ 여러분들 한번 실천해보세요. 열흘 동안 겨우 5, 날마다 잘 생각해보세요. 우선 여러분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5분이 얼마나 긴 지입니다. (웃음) 5분이 몇 시간 같은 기분이 들 수 있어요. 그러나 이 반대도 생깁니다. 1분이 지났는데 엄청 많은 것을 생각해서 한 30분 지났겠다, 했는데 겨우 1분 지났습니다. 다시 말해 시간이란 탄력적이어서 같은 시간이라 해도 다 다르게 느껴집니다.

 

지혜는 빛 속에서 살고 있다, 우선 5. 지혜, 그리고 빛을 연결해서 계속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빛이란 무엇일까요? 빛을 내가 볼 수 있을까요? ‘(독일어로) 아니오에요. (웃음) 빛이라는 것은 다른 것을 보게 하죠. 빛이란 세상을 비추는 것입니다. 또 질문을 던집니다. 지혜를 내가 볼 수 있는가? 지혜를 볼 수는 없지요. 그러나 지혜는 무엇인가를 밖으로 나타낼 수가 있어요. 이 두 개를 연결해 생각하면 굉장히 기이합니다. 굉장히 미래지향적인 겁니다. 이렇게 생각해도 1분밖에 안 갔어요. (웃음) 계속 이렇게 진행해요. 그리고 각 나라의 언어죠, 여러분은 한국어를 하니까 한국어에서 빛과 관련된 말을 찾는 겁니다. , 빛이 지나갔어, 섬광이 지나갔어. (번쩍 했어.) 사고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빛과 같은 것이지요. 여기서 지혜라는 것이 빛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압니다. 지혜가 어둠 속에 있지는 않습니다. 이 지혜라는 것이 보이지는 않지만 빛과 연결되어 간다면 이것이 선함과 연결되지 않을까,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계를 보며) 그러면 30초 더 진척을 합니다. 지혜라는 건 어둠 속에 살지 않아. 지혜는 빛의 한 부분임에 틀림이 없어. 그래서 사고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야. 이런 생각을 해요.

 

이 지혜가 사고 속에서 빛을 발해 보인다면 나는 이제 행동을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바로 이 사고의 지점에서, 내 스스로에서 어떤 힘이 솟아나는 걸 느끼게 됩니다. 바로 내가 여기 머물면서 올라오는 힘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제 자유라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생각 속에서 내가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힘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5분 정도 지나서 생각을 접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5분 동안 몰두를 하다보면 저녁에 그 생각이 다시 올라옵니다. 그래서 다시 생각이 올라오면 오래 찾을 필요가 없고 그 생각이 훈련이 됩니다. 이 생각 속으로 잠기면 또 새로운 생각이 연결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지혜와 빛이 고정되어서 박혀 있는 게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지혜라는 것은 빛 속에서 연결되어 그 안에서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내적인 움직임을 갖고 생동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자꾸 연습을 하다보면 이 생각 속에서 평온과 함께 마무리됩니다. 그래서 생각이라는 게 참 기이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100년 전에 슈타이너의 제자가 와서 말했습니다. “연습을 하고 연습을 하고 또 연습을 해도 일어나는 게 없네요.” 그래서 슈타이너는 계속 연습을 하고 계속 계속 자기 연마를 하세요. 그러면 다음 생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웃음) 사랑하는 여러분, 100년 전과 지금은 굉장히 다릅니다. 우리는 100년 전 사람들과 굉장히 달라요. 우리의 몸은 이렇게 고정되어 있는 실체가 더 이상 아닙니다. 여러분이 2주간 그것을 관찰하신다면, 첫 번째 어떤 작용을 여러분 스스로 감지하게 됩니다. 슈타이너는 이렇게 표현했어요. “내적인 힘의 강화.” 그것이 무슨 뜻이냐면, 내가 하루의 삶을 사는데 거기에 내 스스로가 더 많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가 더 깨어있고 주의력을 기울이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꼭 필요한 것에 자신이 더 깨어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내적인 깨어남인 것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어찌 보면 잠자고 있던 부분이 다시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더 가다보면 여러분들 스스로 새로운 작용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이 이런 것도 체험하실 수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어떤 정신적인 것이 나의 어깨를 살짝 치는 것 같은 내적인 느낌도 느끼실 겁니다. 또 다른 작용이라 하면, 바로 이러한 생각이 내 안으로 스며드는 것 같으면서도 다시 세상으로 발산하는 느낌을 받으실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 내면 깊이에서 우러나오면서 나의 강한 부분은 무엇이고 약한 부분은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삶의 위기에 빠지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인가 나를 조종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내 삶을 공치듯이 치면서 사는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삶이 자기의 주도력에 의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자기의 건강함을 유지하며 끌고 나갑니다. 그리고 세상과의 새로운 관계가, 새로운 시야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주 깊은 내면에서 선행을 베풀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옵니다.

 

소크라테스부터 인류는 빛에서 어둠으로, 다시 어둠에서 빛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슈타이너에 의한 인지학을 통해 우리 내면에 있는 빛을 다시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지학의 특성이라 하면 인식에서 머무르는 게 아니라 세상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자기 연마, 자기 교육을 실천해나갈 수 있습니다. 의학에서도 인지학이 적용되고 있고요, 농업과 법적인 면, 사람과의 관계인 사회적인 부분, 교육학에서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삶의 기준이 나의 내면에서 새롭게 발견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까 말씀드렸던 잠언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물질에 팔려 쏠린다는 것은

영혼을 갈아 부순다는 것이다

정신 속에서 스스로를 찾는다는 것은

사람과 연결하는 것이다

사람 속에서 자신을 쳐다본다는 것은

세상을 세우는 것이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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