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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그리스도적 관점에서 본 인지학 - 크리스토프 비히허트 본문

인지학/2013 AWTC 강연록

그리스도적 관점에서 본 인지학 - 크리스토프 비히허트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6. 5. 25. 13:34

그리스도적 관점에서 본 인지학

 

크리스토프 비히허트

 

 

 

아침 시

 

내면에서 빛을 찾아라

그러면 너는 세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 의미 있는 것을 찾아라

그러면 너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영혼달력

 

나는 내 존재의 본성을 느끼네

그리하여 감각이 말하기를

찬란한 세상 속에서

빛의 물결과 하나 되리라

감각은 사고의 냉철함에 온기를 선사하고

인간과 세상을 견고하게 하나로 이어주네

 

*

 

존경하는 여러분, 좋은 아침입니다. 우리는 어느덧 인지학 강연의 마무리에 도달했습니다. 어제 오전에 아게마스 선생님의 강연과 연결해 도입을 시작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아게마스 선생님이 보여 주신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동양철학의 역사적인 흐름 속에서 인지학과 많은 부분이 공통적이라는 걸 말씀해주셨어요. 인간의 덕목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요, 인의예지신에 대해 다루셨습니다. 사랑과 정의, 예절과 지혜, 신뢰였습니다. 이 덕목들은 동양에만 머무른 게 아니라 인류 모두에게 중요한 타당성을 지닙니다. 슈타이너는 인지학에서 보편적인 인류를 강조했습니다. 보편타당하게 인류에게 해당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질문해 봅니다.

 

그동안 들은 것을 모두 통합한다면 이것들에 대해 지금 시대에 어떻게 질문해야 할까요? 현시점의 우리 세상, 유럽과 동양 모두 어떤 시점에 놓여 있는 것일까요? 동양에서 얘기한 정신적인 흐름은 지금 시점에서 우리 몸에 스며들고 있나요? 그러면 저를 포함해 여러분들 모두 질문이 제기될 것입니다. 앞의 좋은 덕목들이 좋긴 한데 지금 우리에게는 어떠한가요? 이 거대한 질문에서 내 스스로가 선함에 대해서 어떻게 서있는가? 이런 질문을 제기하게 되겠지요. 인지학에서 선함이란 추상적인 게 아니라 선한 행동을 어떻게 하는가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선하지 않은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선하지 않은 것, 다시 말해 악한 것의 징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악이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인간 안에 있는 것인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면 악에 대해 객관적인 힘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는가 성찰해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객관적인 힘이란 어떤 존재를 뜻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 인지학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저도 첫 강연에서 암시를 했고 아게마스 선생님도 어제 무언가를 제시했습니다. 엊그제 강연에서 단테의 신곡을 언급했지요. 거기에서 지옥은 불타는 지옥이거나 차디찬 지옥이라는 양극을 얘기했습니다. 어제 아게마스 선생님은 불교의 맥락에서 15cm의 좁다란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양쪽 어디든 잘못 디디면 죽게 되는 길입니다. 강조는 안 하셨지만 살짝 아리만과 루시퍼에 대해 언급하신 겁니다.

 

아리만과 루시퍼는 어쩌면 음과 양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날아가는 힘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공중에 그냥 사라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상주의를 향해 현실에서 머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른 힘이라면 경직되고 응축되는 힘입니다. 나를 굉장히 힘들게 응축시킵니다. 물질에 매여 그것이 마치 신인 양 쫓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병들어서 위축되어 있는 내적인 자세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눈치 채셨듯이 사람 안에는 이 두 개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사람 안에는 분명 열광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 굉장히 힘들어 하는 모습도 있지요. 다른 말로 요약한다면 증기처럼 위로 발산하고 아래로 응축하는 양극의 힘이 우리에게 작용합니다.

 

우리가 전체적인 것을 바라봤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는 또한 어떠한지 살펴봐야 합니다. 유럽이건 아시아이건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이 두 형상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다가오는지 살펴봅시다. 그러면 우리는 이 시대에서 루시퍼와 아리만의 특성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이것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구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스스로 이 질문을 잘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유럽이건 아시아건 현대이건 탈현대이건 증기처럼 위로 발산하고 아래로 응축되어 경직되는 힘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지금부터는 다른 얘기를 할 텐데 결국은 앞의 얘기로 귀결될 것입니다. 지난 세기, 1960년대에 세상에 새로운 현상이 등장했습니다. 1960년대 이후에 많은 것들이 발표되었습니다. 인간이 죽음 직전에 갔다오는 임사체험자들이 많은 보고를 밖으로 내기 시작합니다. NDE(Near Death Experience), 임사체험입니다. 여기에 문헌이 굉장히 많습니다. 1943년에 심각한 폐렴에 시달렸던 한 군인이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페니실린이 없었습니다. 심각한 질병이었습니다. ‘, 이제 죽게 되었다해서 군의관이 사망이라고 한쪽으로 치워놨습니다. 거의 시체나 마찬가지인데 간호사 한 명이 가다가 그의 손이 움직이는 걸 보고 의사를 불렀습니다. 의사가 와서 심장에 물을 뿌렸더니 벌떡 일어나는 것입니다. 30년이 지난 이후에 그는 자신이 체험한 것을 써서 발표했습니다. 조지 리치라는 사람인데요, 책 제목이 내일을 향해 돌아왔음입니다. 이 책이 발간되고 나서 비슷한 사례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는 심리학자들을 대상으로 강연회를 했습니다. 항상 질문을 던졌습니다. “내가 체험한 것을 여러분 중 누군가도 경험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자 , 나도 그랬어요하는 사람이 여기저기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께 이 비슷한 사례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느 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이 뇌종양 수술을 받는 과정에서 자기 신체를 떠나는 체험을 했는데 그에 관해서 글을 썼습니다. 윌리엄 워드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쓴 책에 의하면 자신이 수술을 받는데 자신의 영적(정신적) 존재가 밖으로 나와 자신을 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자기 몸은 수술을 하고 있는데 정신세계에 올라가서 신비한 체험을 합니다. 정신세계의 마지막 단계에서 영적 존재들이 육화를 준비하기 위해 하고 있는 일들을 봤다고 증언합니다. 지상과 가장 닿아 있는 정신세계에 수많은 영적 존재들이 있는데 상당히 과민한 상태로 움직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영적 존재들이 불안에 떨고 있는 이유는 자신이 지구에 내려와서 태어날 육체적 만남을 자기 카르마에 맞게 적절하게 찾아야 하는데 그걸 찾기가 어려워서라는 것입니다. 지상의 여건이 아직 마련되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카르마,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적절한 조건이 맞지 않기 때문에 불안한 것입니다. 단지 부모를 선택하는 것 이상으로 교육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적절한 교육이 이뤄지고 자기 연마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교육이라는 것이 그 영적인 존재를 꽉 조인다고 생각한다면 안착이 되지 못하고 날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고 느끼고 지구로 돌아왔습니다. 한 가지 사례였습니다.

 

두 번째 체험사례입니다. 대니얼 브링클리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빛을 공유하다라는 책입니다. 1994년 뉴욕에서 발간된 책입니다. 이 사람은 사고를 당했습니다. 벼락을 맞았습니다. 여러분은 벼락 맞았다니까 웃는데 이건 기분 좋은 체험이 아니지요. 이것은 정말 놀랍고 아픈 일입니다. 거의 죽을 뻔한 벼락이었어요. 그래서 역시 임사체험을 한 것입니다. 미래의 삶에서 아시아에서 사는 삶을 자기가 체험했노라, 증언합니다. 상상의 얘기지만, 왼쪽 귀와 오른쪽 귀에 칩을 끼고 있었다고 합니다. 왼쪽 귀의 칩은 삶의 과정을 조정하는 것이고요, 오른쪽 귀의 칩은 소멸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쓸모없는 사람의 경우 칩에 독극물을 집어넣으면 사망하는 것입니다. 이 칩이란 컴퓨터 칩이 아니라 생물학적 지식에 의한 칩입니다. 이 사람이 벼락을 맞았다가 살아났어요. 바로 이것을 글로 쓴 것입니다. 이 사람도 너무 이상한 걸 체험했기 때문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단 썼고 발간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사례에서 사람이 날아가거나 없어지는 게 아니라 경직되고 응축되어서 정체성이 사라지는 모습입니다. 용해되는 겁니다. 두 사례를 잘 기억하시고요, 이제 세 번째 사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문헌에 나오는 것입니다. 스키너와 파블로프는 행동주의 사상을 발전시켰습니다. 행동주의에서는 사람이 됐건 짐승이 됐건 무엇인가 본능에 의해 학습되는 존재라고 합니다. 여기에서는 보상 또는 벌을 통해 학습이 된다고 합니다. 벌을 내리니까 무서워서 배우게 된다, 보상을 하니까 그게 좋아서 배우게 된다고 도식화합니다. 파블로프는 개를 훈련시켜 종을 치니까 개가 침을 흘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키너(1905~1990)는 인생말기에 책을 써낸 게 있습니다. (월든 투 Walden Two, 1982년에 쓴 공상소설로 행동주의적 심리 통제술로 실현되는 이상향 월든을 그리고 있다. 태어난 아이들이 공동으로 양육되고 교육받으며, 구성원은 고도의 효율적 행동을 위해 심리학자들의 행동공학에 의해 통제되고 개조된 새로운 인간들이다.) 행동주의의 수정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요. 유토피아에서의 인간 자유와 존엄에 대해서 쓰면서 자기 이론을 수정하는 것입니다. 이 안에서는 사람들이 항상 안정과 번영을 추구하고, 늘 행복을 추구하고 항상 평화로운 것을 추구하고요, 항상 건강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요소를 얘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에서는 우리의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 사회가 늘 행복하려고만 하고 안정과 번영을 추구한다면 자유와 존엄은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행동주의에서 얘기하는 벌과 칭찬을 통해 학습한다는 건 자기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자유와 개별성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동주의는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 이제 처음의 테마로 돌아옵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우리 시대의 어떤 증상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탈근대의 시기의 특성은 이상을 향해 날아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안으로 응축되어 너무 경직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경직되고 응축되어 딱딱한 것은 모두 교육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스로의 자유, 자기를 펼쳐나갈 수 있는 개별적인 힘이 전세계적으로 코너로 몰리며 억압당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기운들이 세계의 어느 곳이나, 아시 러시아 아메리카 등등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예전에는 교육이 다 종교적인 차원에서 이뤄졌지요. 교육이 옛날에는 신비적인 비교(秘敎)에서 일어나는 게 많았습니다. 전체를 향한 게 아니라 정해진 소수를 위한 것입니다. 그 이후에 사실 교육은 국가의 과제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교육이 넓게 퍼져나간 것은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민주적인 토대로 교육이 전체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교육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진정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제 한 학부모가 우리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얘기했습니다. 아이 하나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정말 어마어마한 돈이 든다는 것입니다. 국가가 책임을 지고 교육을 한다는 게 이미 지나간 것입니다. 그러면 교육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일어나는 걸까요? 교육이란 이제 자유로운 시민이 이니셔티브를 들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육이 결국은 민간의 영역으로 다시 이동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국가 차원을 잘 들여다보면 교육이 이뤄지는 것이 대단히 경직되는 차원으로 점점 조여져서 더 이상 가치가 없는 상태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의 특징이라 한다면 굉장히 인간을 경직되게 조이고 있는 것이지요. 사람을 자유롭게 개별성을 펼쳐나갈 수 있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은 현대의 기술 속에서 비슷한 것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기술문명이란 사실 어떤 가치에 매여있는 것이 아니라 박애를 통해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일 수 있습니다. 아무도 핸드폰이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냥 기계일 뿐입니다. 가치에서 자유로운 사물일 뿐입니다. 이 핸드폰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지적 산물일 뿐입니다. 이것은 죄가 없습니다. 그런데 핸드폰이 무슨 일을 하지요? 이미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데요, 아이들이 자기 조절을 하지 못하면 그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입니다. 미디어를 보세요. 사람이 망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술문명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여기에 사람이 빠져들어 그것의 희생물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적 능력이 들어간 대상물이 우리를 또 다른 차원으로 몰고 나가는 것입니다.

 

저는 국적이 네덜란드지만 자신 있게 독일 얘기를 하겠습니다. 독일의 대문호인 괴테가 있습니다. 괴테가 쓴 작품 속에 사람이 인간존재로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다룬 희곡이 있습니다. 사람이 선함으로 가고자 노력하는 것을 대단히 잘 묘사한 작품이 있습니다. 이 희곡(파우스트)에서는 선함을 찾던 사람이 악마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악마를 만났을 때는 자기가 누군지 밝히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악마가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해줍니다. 악마가 자기를 소개합니다. “나는 어떤 한 부분인데, 내가 악도 저질를 수 있지만 선함도 행할 수 있어.” 다시 말해, 핸드폰은 나쁜 애가 아니에요. 그런데 나쁘게 될 수 있는 거죠.

 

악마가 그렇게 얘기하자 이 사람이 말하길, “너는 부분이라고 했는데 나한테는 악마 전체로 와 있다.” 그러자 악마가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진실을 얘기해 줄게. 인간이 이 자그마한 바보 세상을 보통 전체로 생각하는데 그게 바보짓이야. 나는 부분의 부분이야. 정말 태초에는 모든 게 있었거든. 그런데 이 부분 속에는 어둠이 들어있어. 그리고 그것이 선함도 만들어낼 수 있는 거야.” 우리가 엊그제 이런 얘기를 했죠. 지혜는 빛 속에 살고 있다. 여러분이 아셔야 하는 게, 진실의 빛이라는 건 어둠의 빛 속에 공존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또한 느낍니다. 이게 똑같은 것 같지만 똑같은 게 아닙니다. 이것도 어둠의 빛이에요. 빛이긴 빛인데 다른 결을 가진 빛이지요. 그리고 이것 역시 지적으로 굉장히 깨어있는 빛입니다. 정말 이것은 엄청난 지적인 활동 속에서 만들어냈지요.

 

그러면 한 번 생각해봅시다. 이거는 정말 지혜를 담고 있는 빛인지, 아니면 정말 다른 결을 가진 빛인지. 그래서 우리에게 이런 표현이 있지요. 차가운 빛. 그리고 굉장히 파고드는, 투시하는 빛. 여기에는 어마어마한 지적인 힘을 담고 있는 빛도 있어요. 그래서 이 지적인 머리로 기술문명을 끝까지 발전시킬 수 있는 고도의 힘이 있지요. 그러나 엊그제 지혜가 담겨 있는 빛은 완전히 다른 빛이에요. 이 빛 역시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차원의 빛이지만 세상을 밝히고 세워나갈 수 있는 특별한 힘을 담고 있는 빛입니다. 이 빛의 특징이라면 세상에 대해서 겸허하게 섬기고 시중들고 세상을 만들고 이해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께 빛의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결, 차가운 빛과 따스한 다른 차원의 빛을 정리하기 위해 단테의 다른 설명을 연결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께 힌두교의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힌두교 경전에 아바타라는 말이 나옵니다. 얼마 전에 이걸 모티브로 해서 헐리웃에서 상업 영화를 만들었지요. 이 아바타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영화입니다. 저는 비행기 타고 오면서 봤습니다. 돈 주고 보기 싫으니까요. (웃음) 저는 힌두교의 아바타를 말하려 합니다. 거기에는 어떤 선행을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성의 어떤 존재가 지상에서 선한 행위를 하기 위해 내려옵니다. 비슈누가 10개의 아바타를 데리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지상이 너무 나빠져서 광명을 베풀기 위해 내려옵니다. 10번째 아바타를 칼키라고 하는데요. 칼키는 백마를 타고 황금의 칼을 들고 내려옵니다. 이제 칼키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황금의 검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정화시킵니다. 혼돈의 정신을 황금의 칼로 정화시켜서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게 갈고 닦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사고가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합니다.

 

기독교 전통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있습니다. 대천사 미카엘 이야기가 성경에도 있는데요. 미카엘이 어마어마한 싸움으로 용을 쳐부수는 이야기입니다. 용이라는 게 동양권에서는 대단히 성스러운 가상의 동물이잖아요. 저도 잘 모르기 때문에 깊이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서양과 반대라고 어제 아게마스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서양문화권에서는 용 그러면 악의 상징입니다. 미카엘이 어마어마하게 큰 창을 가지고 용을 죽이지는 않고 누르는 겁니다. (지배하는 겁니다) 우주적인 차원의 기운이 미카엘을 통해 내려오면서 지상을 정화한다는 걸 반영하는 겁니다. 게오르그 성인 역시 용을 못 움직이게 하면서 결국 공주를 억압에서 풀어줍니다. 이것 역시 같은 맥락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들을 함께 비춰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용이라는 존재는 어쩌면 지구상에 점점 스며들고 있는, 지적으로 작용하는 것에 계속 움직이는 힘입니다. 물론 이것도 우리는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죽이는 게 아니라 못 움직이게 통제해야 하는 겁니다. 이 차가운 빛이 끝까지 죽이는 건 아니지만 묶어놓은 상태에서 마음에 새로운 상태가 열리는 연결고리가 됩니다. 죽여버리면 거기에서 끝나잖아요. 기독교적인 뿌리에 대해 우리가 얘기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기독교적인 요소들과 다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은 기독교적인 맥락에서 얘기했지만 현대적인 우리 삶에서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어떤 것이 변화했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 의견을 감히 말씀드리지만, 그리스도를 교회 안에서는 못 찾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힘이라는 것은 우주적인 차원의 힘으로서 교회 안에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가슴 안에, 마음 안에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기독교 맥락에서는 굉장히 허약한 것이지만 앞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임하는 것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쿠르드족의 한 무슬림 소년에 대한 일생에 대해 다룬 걸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라크의 독재자 후세인이 통치했던 시대를 살았던 소년이었습니다. 이라크 북부 지방에 살던 소년의 다음과 같은 체험이었습니다. 상상해보세요. 이라크 북부는 쿠르드족이 많이 살았습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약국을 운영했습니다. 이라크 병사가 와서 전화를 다 내려놓으라고 갑자기 명령했습니다. 그것은 생계를 위협하는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말을 안 들으니 병사가 화가 나서 칼을 휘두르며 약국을 초토화시켰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화를 입고 있는 것을 소년은 다 보았습니다.

 

이틀 후 후세인이 몰락하자 소년은 총을 들고 그 병사에게 복수를 하러 갔습니다. 찾아보니 그 병사가 있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 하니까 병사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네가 그 놈이야. 얼마 전에 와서 우리 아버지 약국을 전화 문제로 다 망가트린 놈이야. 이제 나는 널 죽여야 해. 네가 우리 아버지를 망쳐놨으니까.” 그러자 병사가 말했습니다. “마음대로 해! 꼬맹아, 나를 죽이는 건 좋은데 결혼하자마자 떠나온 내 부인에게 전화해야 해. 사담 후세인의 명령 때문에 우리가 그런 일을 한 거야. 날 좀 봐줘라. 우린 형제잖아. 전화 좀 하게 해줘.” 그러자 소년이 어떻게 했을까요? 죽이려고 했던 총을 내려놓고, 이리 오라고 했습니다. 소년은 그 병사를 데리고 와서 저녁을 잘 먹이고 자기 아버지에게 일어났던 일을 다 얘기하고 부인이 있는 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 병사의 아픔을 수용하고 용서한 것입니다.

 

이 장면은 전통도 아니고 체계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서 가장 보편적인 지고의 사랑으로서 소년과 병사의 내적 만남에 따른 행위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지학에서 우리가 말하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이 지점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힌두교의 경전을 다시 쓴다면 우리 모두는 아바타의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존재로서 우리의 생각을 우리 스스로 정화를 해서 행위로 옮길 수 있는 빛의 존재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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