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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삶과 종교수업 - 데부스 선생님 강연록 3 본문

인지학

내적 삶과 종교수업 - 데부스 선생님 강연록 3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1. 11. 8. 16:57

데부스 선생님 강연록 3 - 내적 삶과 종교수업

 

2009928일 월요일

 

 

오늘의 내용을 들어가기 전에 슈타이너의 시를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배웁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하기 위하여  배웁니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사람들의 모든 속에서 활기를 불어넣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인간 존재는 황량하고 공허합니다.

그리스도는 인간 사랑의 교사입니다.

 

우리는 금요일에 '배우고 일하고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았습니다. 배움이라는 것은 인간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이해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간파하는 것의 차이점을 알아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발전을 독려하는 것입니다. 간파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발전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지금 반복을 하고 있는데 뭔가가 빠졌다면 질문을 해주십니다. 그리고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일한다는 것은 돈을 번다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했습니다. 일한다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랑입니다. 집에 가셔서 남편이 나를 사랑하느냐 묻거든, 내가 배우기를 내가 너를 이해하기 위해서 같이 일하는 것이라고 대답해 보십시오. 이것이 사랑입니다. 다른 모임에서 칠판에 적었던 것을 다시 적어보겠습니다.

 

나는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가?

 

이 문장에서 진정으로를 빼고도 이해가 되지요. ‘진정으로라는 말이 있을 때와 없을 때 문장의 의미는 어떻게 다른가요?

 

- ‘진정으로라는 말이 없을 때는 여러 개를 고를 수 있을 것 같지만 진정으로라는 말이 있으면 하나만 골라야 할 것 같아요.

- ‘진정으로라는 말이 없을 때는 일상적인 것의 고민이 될 것이고, ‘진정으로라는 말이 있다면 영혼적인 고민이 될 것 같습니다.

 

나는 돈을 많이 벌고 싶다.” 다들 그러신가요?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가? 진정으로 저는 돈을 많이 벌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생활에 필요한 정도면 만족합니다. 저는 진정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어떤 내가 돈을 벌기를 원하고, 어떤 내가 의미 있는 일을 하기를 원하나요? 이 문장을 다시 바꿔 말해보겠습니다. 나는 진정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고, 진정으로 돈을 많이 벌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아닌 '진정한 나'. 한국말로 이것이 이해가 되시나요? '나'와 '진정한 나'. 나는 두 개입니다. 그리고 저는 진정한 나를 뜻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 사랑의 원천입니다. 다른 나는 항상 이기주의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사람이 자기를 교육시켜야 하는, 정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이 시를 여러분이 받은 이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맨 마지막 것이 빠졌습니다.

 

1919년 슈투트가르트에 처음 학교가 생겼을 때 종교 선생님, 그러니까 유대교, 기독교, 여기에 불교도 생각할 수 있겠지요. 모든 어린이는 부모님의 종교에 따른 종교수업을 받습니다. 슈타이너는 교육적인 개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곳곳에서 신부나 목사가 발도르프교사로 온 게 아닙니다. 한국에 있는 독일영사관의 사과나무는 독일의 것입니다. 그것을 한국인이 마음대로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독일의 한국영사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치외법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종교수업은 이와 같습니다. 치외 지역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제가 교실에 서 있는 한 그 교실은 더 이상 발도르프학교가 아닙니다. 도리어 천주교의 교회입니다. 모든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지요.

 

아스토리아 공장 노동자의 자녀들은 세례를 받지 않은 아이들이었습니다. 무교였습니다. 부모들은 슈타이너에 대한 큰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아이도 종교를 갖게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종교가 될까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 독일에서. 슈타이너가 말하기를, "우리가 종교수업을 하는데 그걸 자유종교 수업이라고 합시다". 그것이 바로 발도르프 종교입니다. 또는 인지학적 종교라고 할 수 있지요. 그것은 인지학협회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이 종교수업은 절대로 사제에 의해서 진행되지 않습니다. 어떤 다른 교회나 단체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바로 발도르프교사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여기 슈타이너가 앉아 있고 "누가 할 수 있을까요?" 하고 말한다면 (*** 선생님을 향해) 준비되셨나요? 그러면 저는 아무런 준비가 돼 있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겠지요. 괜찮습니다. 성경이나 기도에 대해서 몰라도 괜찮습니다. 어떤 것이 자격이 될까요? 오직 당신이 좋은 발도르프교사라면, 그는 자신의 내면적인 삶이 있습니다. 세 번째 천사와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인간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내면적인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수업을 하는 데의 유일한 자질입니다. 슈타이너는 해가 지날수록 컨퍼런스에서 조금씩 종교수업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이런 말들을 모아보면 종교수업에 대한 계획이 될 것입니다. 슈타이너의 설명은 정말 경이롭습니다. 정말 그것은 자유종교입니다. 발도르프교육과 마찬가지로.

 

3학년 때 무엇을 가르나요? 창세기를 가르치나요? 그리고 구약에 대해서도? 그렇다면 그것은 유대교식 종교입니다. 그것은 발도르프교가 아니고 유대교입니다. 만약에 학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을 유대교식으로 키우고 싶지 않다면 어쩌시겠습니까? 구약에 대해서 부모님들과 문제가 있었습니까? (질문이 있었죠. 왜 그걸 가르치는지.) 뭐라고 답하셨습니까? (종교로서가 아니라 다른 의미의 수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슈타이너가 3학년 때 구약을 종교시간에 하라고 말했습니다. (*** 선생님에게) 그건 종교가 아니고 종교수업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유대교 종교수업입니까? (유대교는 아닙니다.) 맞습니다. 유대교적인 게 아니고 종교적인 것이고 인간학적인 것입니다. 그 말은 둘 다를 의미합니다. 종교수업에서 인간학적으로 하고 주요수업에서 또 인간학적으로 하고. 종교수업에서에는 종교적으로 인간학적인 것이고 주요수업에서는 종교적이지 않게 인간학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얼마나 흥미진진한지 아실 겁니다. 독일에서 3학년에 종교수업과 주요수업에서 구약을 다룹니다. 종교수업에서 하는 설명은 주요수업의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구약은 매우 넓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간단한 해결책이긴 하지만 최선은 아닙니다. 가장 좋은 것은 주요수업과 바로 연결해서 하는 것입니다. 같은 것을 하지만 다르게. 이렇게 밀접하게 하는 것은 3학년일 때입니다. 그 후에는 갈라져서 나갑니다. 멀어지는 거죠. 그 다음에 신약이 나옵니다. 구약이 아주 적게 유대교적인 것이지만 신약은 아주 적게 기독교적입니다. 신약을 설명할 때 교사는 교파적인 견지에 하지 않고 인간학적으로 설명합니다. 이 종교수업은 굉장히 소중하고 경이롭습니다. 여러분도 발도르프교사로서 해볼만 합니다.

 

한 반 년이 지나서 학부모들이 다시 한번 슈타이너에게 물어봤습니다. 부모들은 일요일에도 아이들에게 뭔가 해주고 싶었지만 교회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첫 번째 종교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슈타이너에게 가서 학부모들의 바람을 전했습니다. "복음서에 대해서 읽을 수도 있고, 찬송을 할 수도 있고, 영혼달력을 읽을 수도 있고, 또한 오이리트미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이 하나의 일요일의 행사로 할 수 있습니다." "오이리트미는 적절하지 않네요", 슈타이너가 말했습니다. "오이리트미는 세속적 예술입니다. 사람들이 종교적인 오이리트미를 할 수 있겠지만 내가 먼저 해봐야겠습니다." 인식하시겠습니까? 많은 인지학자들이 오이리트미를 종교적으로 이용합니다. 그럼으로써 특별히 거룩해지기 위해서. 하지만 오이리트미는 세상을 위한 예술입니다.

 

일요일날 무언가를 할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의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가 정해지면 바뀌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1920229일 이 의식이 행해졌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예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작업, 무엇을 한 것이지요.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 즉 어린이를 위한 일요일의 작업이었습니다. 일요일날의 그 일은 굉장히 좋았는데요, 그것이 바로 두 번째 7년 주기의 아이들에게 적당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7년 주기에 다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교의 한 교실을 꾸며놓았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그 방을 알게 되었는데요, 그때까지도 일요일날 행해졌습니다. 첫 번째로 행해진 교실에서 저는 경험했습니다. 지금은 화학실험실이 되었습니다. 그때는 커텐을 굉장히 빨갛게 하고, 보통은 오이리트미를 위한 교실이었지요. 그런데 일요일날 와서 보니까 다 빨간색이었습니다. 앞에 조그만 탁자가 있었고요. 그리고 3명의 교사가 서 있었습니다. 까만 옷을 입었습니다. 지금 제가 앞으로 이야기할 것을 그분들이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에 일요일날 종교수업을 받지 않는 아이는 올 수 없습니다. 학부모, 동료교사 모두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주일에 두 번의 종교수업이 진행되었고, 이 의식이 3번째 종교수업이라고 슈타이너가 말했습니다. 교회가 아니라 학교에서 말이죠. 일요일날 하는 것도 교회가 아니라 학교에서입니다. 사제가 아닌 교사에 의해서. 성서를 잘 알거나 기도를 잘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발도르프학교의 좋은 교사냐가 문제입니다. 인지학적인 조직체가 슈투트가르트에 2개가 있습니다. 두 단체를 이끌어가는 수장이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이 거기에 들어갈 수 없었어요. 두 사람은 상당히 비중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공개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더 나가기 전에 질문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 내적 삶이 있는 좋은 발도르프 교사란 어떤 사람인가요?

 

제가 판단을 할 수 없고 스스로 그것을 돌아봐야 합니다.

 

- 종교수업을 위해서 내적 삶이 필요하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어떠한 교사가 종교수업을 할 수 있나요?

 

슈타이너 시대에는 이 부분을 직접 이야기를 하였지만 지금은 어느 누구도 상대방에게 이 부분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동료교사들이 그 사람이 종교수업을 할 수 있고 없음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후 양심적으로 예와 아니오를 말할 수 있을것입니다. 예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매우 뛰어난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노력하겠다는 뜻이지요. 우리는 그리고 상대방에게 이 이상을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 일요일 행사를 처음으로 듣다보니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세 번째의 종교수업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제한된 사람과 여러 가지 것들이 이것이 왜 종교수업인지, 왜 필요한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슈타이너가 말을 하기를, 작은 순간이라도 종교적인 것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이들이 가져야 하는 덕목입니다. 진실함과 경외심, 이 두 가지가 그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모든 수업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이 경외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진실함과 결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프로그램화된 배움이 있습니다. 배움의 방법, 즉 교육방법론에서 예와 아니오로 수업이 진행된다면 경외심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사자를 보더라도 그것에 대한 경외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4학년 담임교사가 사자를 아이들에게 설명할 때 경외심을 이끌어 냅니다. 이렇게도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 교사가 사자를 통해서 경외심을 이끌어 냅니다. 경외심을 위해서 항상 기도를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 수업에서는 학문적인 것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것까지 포함을 해야 합니다. 세 번째 종교수업에서는 학문적이면서도 종교적으로 아이들을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세상을 배우는 것은 학문적인 것입니다. 세 번째 종교수업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아이들이 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학부모들은 뒤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학부모들은 보기만 합니다. 이것은 아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교사들이나 학부모는 뒤에 앉아 있습니다.

 

- 종교수업을 받은 아이들만 참가를 하기 때문에 그것이 의미가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일요일에 종교수업을 받게 되어 있고(자신의 종교로), 종교가 없는 아이들을 위해 일요일에 이 의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요일 의식에 대해서 묘사를 할 텐데 하나씩이 아니라 전체적인 묘사를 해보겠습니다. 독일에는 저녁에 어머니가 아이에게 이제 우리 한번 치울까?’라는 말을 합니다. 어머니가 이런 말을 할 때에는 어떤 의미입니까? 독일에서는 니가 치워라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동등한 존재가 아닙니다. 일요일의 의식 역시 우리로 진행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다해 우리의 느낌과 생각을 당신에게 들어올립니다

그 정신을 향해서 우리는 살아가고 일을 합니다

그 정신은 우리의 삶과 생활 속에 작용을 하고 이 땅의 식물과 동물에게도 작용을 합니다

그 정신은 또 생생하게 인간의 생각과 행위에도 작용을 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행함과 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음으로 인도합니다, 새롭게 살도록. 

죽은 사람을 삶으로 인도합니다. 정신적인 것을 볼 수 있도록. 

 

두 번째 7년 주기의 아이들은 직선적인 사고가 아닌 원형적인 사고를 합니다. 주기(순환)적인 사고를 하는데 어린이들에게 자연은 순환적인 것입니다. 태어나서 죽는 직선적인 것은 아이들에게 아직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삶과 죽음의 직선적인 것이 아닌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거쳐 봄이 다시 오듯이 원형적인 것으로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계절축제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2번째 주기의 역사교육과 3번째 주기의 역사교육은 다릅니다상급과정의 역사교육은 담임과정의 역사교육과 전혀 다릅니다. 왜냐하면 그 시기의 아이들은 이미 직선적인 사고를 하기 때문입니다. 직선적인 사고와 원형적인 사고에 대해서 아시나요직전적인 사고와 원형적인 사고에 대해서 어제 했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서 반복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이 텍스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음으로 인도합니다, 새롭게 살도록.

죽은 사람을 삶으로 인도합니다, 거기에서 정신적인 것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살아 있는 사람을 새롭게 살도록 하고 죽은 사람을 살도록 해서 정신적인 것을 보는 주기적인 리듬을 보여줍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의 원형을 그리며 돌고 있습니다. 두 번째 7년 주기의 아이들이 이렇게 원형적인 삶을 살아왔다면 상급과정 아이들은 직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적인 것이 제안하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인류의 정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진정한 자아, 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스도가 오기 이전의 사람들은 하늘을 보면서 그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고대 페르시아인은 하늘을 보며 아후라 마즈다를 얘기했습니다.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이집트인은 오시리스에게서 그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가 오기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원형적이고 주기적으로 돌아가는 것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이전의 의식이나 상태는 실제로 아이들의 의식 상태(두번째 7년 주기)와 같습니다. 이렇게 삶과 죽음, 다시 죽음과 삶의 원형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갑자기 의식을 행하는 교사가 방향을 바꿉니다. 그리스도의 상을 가리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그리스도의 그림을 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정신은 (정신의 세계에서) 그의 안에서 몸이 되었습니다. 정신의 모든 것이 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육화가 되었다고 합니다. 성육신.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들이 오고요, 그 안에 그리스도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는 죽었습니다, 가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의 시점을 말합니다. 우주의 정신을 생각하면 이것은 역사적인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 몸이 죽었다면 그것은 역사적인 것이 됩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사건 연후에 우리는 오늘날 연도나 날짜를 세워나갔습니다. 그로부터 전혀 다른 의식 상태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과거의 현재,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의식상태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주적인 자아와는 또 다른 의식 상태입니다.

 

아까 얘기했듯이, 그리스도 이전의 의식은 두 번째 7년 주기의 아이들과 같다고 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원년을 기점으로 세 번째 7년 주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은 성인이 되겠지요. 사람들은 직선적인 의식 상태를 만들어 갑니다. 역사교육을 하기 위해서 판단해야 할 중요한 지점이 있는데요, 새로운 의식을 위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어떻게 되느냐를 배워야 합니다.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렀고, 현재가 미래를 기대하게끔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의 상태를 일요일의 의식의 내용에 담습니다. 삶과 죽음, 죽음과 삶이 주기적으로 교차하며 돌아갔던 것이 그리스도를 기점으로 끝이 납니다. 하지만 이러한 원형적인 것은 계속 돼야 합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는 죽었고 다시 부활했다고 말합니다. 어린이들과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말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아까처럼 살아서 죽고 죽어서 산 것처럼 그리스도는 죽었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말이 그는 다시 살았습니다. 부활했다고 말하지 않고 다시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우리의 가슴 속에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베들레햄의 이야기와 같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묵을 방을 찾고 있습니다. 문을 열어야 그 방에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마음의 문을 열어야 그리스도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다시, 그리스도는 죽었습니다. 그는 다시 살아서 사람의 마음 속에, 그 방을 채워주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출발점입니다. 항상 예배는 우리의 형태로 공유합니다. 이제는 강력한 어떤 것이 들어옵니다. 예를 들어, 두 줄 정도 아이들이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제는 각 아이 한 명씩과 악수를 하면서 (여기서는 더 이상 우리라고 하지 않고 너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의 정신이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네가 그 정신을 찾고자 한다면. 누구에게요? 이만한 아이들에게입니다. 하느님의 정신이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네가 그 정신을 찾고자 한다면. 이것이 무슨 뜻인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그리고 아이들은 뭐라고 대답하는지 아십니까? 나는 그 정신을 찾고 싶습니다, 찾겠습니다, 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존엄하게 생각할 것은 없구요. 아이 스스로가 라고 얘기해야 합니다. 아주 엄청난 요구입니다. 아이들에게 엄청남 무게로 다가오는 과제, 요청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나는 그 정신을 찾으려고 합니다. 만약에 내가 그 정신을 찾지 않는다면 찾을 수가 없겠지요.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겠지요. 상관없어요. 여기에 아주 큰 의미가 있습니다. 엄청난 자유의지가 작용하는 상황입니다.

 

이 전체적인 일요의식은 세 번째 7년 주기에 들어가는 아이들을 준비해 가는 단계입니다. 마찬가지로 전체 두 번째 7년 주기는 세 번째 7년 주기를 준비하는 과정이겠지요. 만약에 6살짜리 아이가 이런 대답을 해야 한다면, 교사가 아이에게 악수를 청해요. 어떤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작은 소리로 난 찾겠어요,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많이 걸려요. 손을 내미는 교사의 눈을 마주치며 나는 그 정신을 찾겠습니다, 라고 하는 건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7년 정도 시간이 있어요. 7년 정도의 기간이 있으므로 370회 정도의 기회가 있겠지요. 365번의 일요일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365번 동안 나는 그 정신을 찾겠어요라고 한다는 걸 생각해 보세요. 교사는 더 이상 우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에게 외칩니다. 만약 너희들이 찾기를 원한다면 신의 정신이 너희에게 임하기를. 우리라고 하지 않고 나와 너희라고 합니다. 1학년부터 8학년의 과정 동안 그렇게 합니다. 1~7학년까지 우리라고 한다면 8학년에 가서는 나와 너희라고 합니다. 발도르프학교의 종교성이란 이런 것입니다.

 

종교수업을 맡게 된 교사가 있다면 그가 주저하더라도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슈타이너는 하나의 경구를 주었습니다. 일요의식을 하기 위한 경구입니다. 일요의식을 위한 전체문구는 교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문구와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교실 안에서 이것을 행하고 있고 살고 있습니다. 단지 이런 의식으로서가 아니라 수업으로서겠지요. 이러한 일요의식을 위한 준비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하는 수업 준비와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준비를 위한 경구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신의 정신이여, 당신의 권능으로 저에게 맡겨진 영혼을 당신에게 보여드립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경구지요. 교사가 아이들의 영혼을 신에게 보여드립니다. 그리고 어린이들은 교사를 신뢰하겠지요. 당신의 능력, , 권능을 통해서 제가 여기 있는 나의 사랑하는 아이들의 영혼을 들어올려서 보여드립니다. 왜 교사가 이걸 보여주냐면 아이들의 생각과 느낌과 의지 안에 정신적인 것이 임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올바른 사고와 올바른 느낌과 올바른 행위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의 정신이여, 당신의 권능으로 저에게 맡겨진 영혼을 당신에게 보여드립니다

당신의 빛이 저의 사고와 그 주변을 환히 밝혀주시고,

당신의 생명과 온기가 느낌 가운데로 힘을 불어 넣어주시고

당신의 영혼, 그 힘이 의지로 빛나는 저의 몸으로 들어와 정신의 충만을 허락하소서.

제가 당신께 순종하며 경배하오니, 이 예배의 시간 우리에게 임하소서.

 

이제 제 이야기가 마무리되겠는데요, 원하신다면 이 경구를 매주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역시 수업을 준비하기 위한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지난번의 문구도 함께 하시길요. 그러면 여러분에게 좋은 수업을 위한 모티브가 떠오를 것입니다. 처음에는 동기를 부여받고요, 두 번째는 모티브를 찾아내겠지요. 이것이 바로 내적 삶의 의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작년까지 우리가 작업했던 내용들도 중요하고 계속할 수 있습니다. 점점 더 과제는 많아지고 쌓이게 됩니다. 좋습니다.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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