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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고유성의 도덕 - 데부스 선생님 강연록 2 본문

인지학

개인 고유성의 도덕 - 데부스 선생님 강연록 2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1. 11. 2. 21:15

데부스 선생님 강연록 2 - 개인 고유성의 도덕

2009. 9. 25. 금



사랑하는 동료 여러분 오늘 오후에도 이야기를 풀어내기에 좋은 컨디션이시기를 바랍니다. 긴장되는 일주일이 마무리되는 금요일입니다.

질문 - 배움이란 외부적인 능력을 도덕적인 능력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라 하셨는데 도덕이란 무엇일까요?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예전의 도덕이라는 것과 지금의 도덕은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작년에 이미 이 부분에 대해서 언급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성질의 것에 대해서 칠판에 써서 비교를 해본 적이 있는 것을 기억하시나요? 사실상 그것은 오늘날의 도덕성에 대해서 다루었던 것입니다. 이 부분을 반복해야 할까요?

옛 도덕성의 특징은 두 번째 7년 주기의 아이들의 상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과 악이라는 것은 아이들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스스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여기 학교의 아이들은 도덕성을 배워나갑니다. 그것은 인류의 도덕성을 배운다기보다는 한국 사람들의 도덕성을 배우는 것이겠지요. 독일의 아이들은 당연히 독일의 것을 배울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7년 주기의 아이들은 양심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는데, 이 시기에는 한국 사람으로서의 양심(도덕)을 배우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세 번째 7년 주기로 넘어가는데, 개인적 특성을 가지는 도덕성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시대에만 적용된다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약 500년 전에는 청소년과 어른들 모두 개인에 입각한 도덕성은 인정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옛 도덕성에 관한 것은 여기까지만 언급을 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개인 고유성에 입각한 도덕성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봅시다. 어떻게 우리가 개인의 입장에서 이것이 좋은지 아닌지 알 수 있을까요? 경험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만약에 책을 보게 되더라도 개인의 고유성에 입각한 도덕성을 찾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나의 고유한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책의 내용을 보면서 여기서 나의 도덕성에 입각한 것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도덕성에 입각한 책이 있습니다. 개인 고유성에 입각한 도덕성으로 쓰여진 책이 실제 있다, 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말 개인의 고유성에 입각한 도덕입니까? '내가 생각하는 기준으로 도덕이다'라고 말할 때 이것은 개인의 고유성에 입각한 도덕에 맞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도덕에 입각한 도덕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욱 정확할지도 모릅니다. 한국의 도덕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두 번째 7년 주기의 아이들과 비슷한 것입니다. 개인의 도덕성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의 도덕성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조금 더 나아간 것이지만 아직 만족할 만큼 발전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 다음 진짜로 개인의 고유성에 입각한 도덕성이 나옵니다. 이 개념은 한 마디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개인의 고유성’이라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입니다. 설명을 한다 하더라도 '나의 기준에 입각한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여기에는 표준(기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여기서 말하는 표준이라는 것을 말하게 된다면 또 다른 규칙을 가지는 것입니다. 한국의 도덕이라는 것을 규칙으로 한다면 하나의 책으로 될 수 있겠지만 개인적 기준의 도덕을 기준으로 책을 만든다고 하면 여러 권의 다른 내용이 담긴 일정한 규칙을 가진 책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자기 멋대로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인 고유성의 도덕은) 다른 사람과 상관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보편적인 규칙이나 법칙이 있다면 내가 알기 이전에 이미 법칙에 의해서 정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분명하게 그 법칙에 입각해서 결정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매 순간마다 새롭게 판단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전의 경험과 매우 유사한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새로운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맘대로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필요에 의해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슈타이너는 '도덕적 직관'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는 도덕적 법칙을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적 직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추구하고 따르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내면이 자유로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첫 번째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기 안에 있는 당나귀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나귀가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체로는 자기가 좋아하는 쪽으로 판단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판단을 하고 결정할 때 호감과 반감에 기초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교사 입장에서 당연히 아시겠지만, 한 아이에게 어떤 상황은 좋을 수도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호감과 반감을 가지겠지만 이것에 매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것이 첫 번째의 조건이 됩니다. 이 조건은 스스로의 자기 인식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기의 당나귀를 알고 자유로워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내적 자유'라고 말할 수 있고, 이것이 곧 도덕적 직관을 위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년에 이 부분에 대해서 언급을 했었습니다. 당시 세 영역으로 나누어서 그림과 함께 작업을 했었습니다. 양 끝에 각 영역이 있고 중간 영역 역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며 양쪽 극으로부터 더욱 가까운 두 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다시 배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제 배움과 훈련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교사인가, 조련사인가? 우선은 조련사로서의 것을 잊어버리고 언제부터 배움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아이들을 훈련시키고자 한다면 그것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과 벌, 이 두 가지 요소만 있다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배움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교실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실은 교사를 위한 하나의 조건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작업하는 데에서, 의식에서 하나의 내용을 가지기 위한 하나의 공간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을 듣습니다.

6학년이 물리를 배운다면 선생님을 통해서 처음 그 내용을 듣게 되겠지요. 선생님은 설명을 하고 아이들은 이를 듣습니다. 이 상태는 아직 배웠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우선 의식이 이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의지의 영역으로 그것이 들어가게 됩니다. 머릿속으로 들어와서 의지의 영역으로 들어간 뒤 그 시간의 마지막에는 그림이나 필기를 통해서 정리를 하게 됩니다. 주요수업의 가장 중요한 것은 머리로 들어와서 손으로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재료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확대를 해나가기 위해서 재료를 특별하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오이리트미, 수공예 시간에는 아이들에게 조금 더 깊이 들어갑니다. 주요수업에서는 특별하게 강화시킨다고 하는 것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술수업 시간에 일어나지요. 주요수업의 그림은 자기가 들은 것을 들어서 받아들이는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주요수업이 끝나고 수공예를 하게 된다면 주요수업의 내용과 떠나 있지만 사실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더 깊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전문과목, 예술과목을 마치고 나면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더욱 깊게 들어가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발도르프학교의 상황과 일반학교의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선은 자기의 의식으로 세상에서 전달해주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발도르프학교의 행위들이 배움의 영역으로 강화되는 것입니다. 점차적으로 자기의 의지 영역으로 들어가서 의지를 발동시키는 교육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에포크 노트, 오이리트미는 발도르프학교에만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완성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수업이 끝나고 밤이 오면 아이들은 수면을 취합니다. 이 밤이 와서야 아이들은 진짜로 배우는 과정이 시작된다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식으로 받아들인 것들을 잠을 통해서 진짜로 의지의 영역으로 소화를 시키는 것입니다.

음식은 입에서부터 소화가 시작이 됩니다. 소화가 되고 나면 의식은 사라집니다. 음식이라는 것이 사라져야 영양분이 발휘되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음식이 입에서만 머물러 있다면 음식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마치 껌과 같은 것이지요. 일반학교에서의 배움은 마치 껌을 씹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소화의 과정이 잘 진행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에 밤의 과정을 아이들이 잘 겪고 다음 날에 다시 교실로 모이게 된다면 세 번째 단계의 천사의 영역을 접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전체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모든 것들은 우리 안에서 다시 잊혀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소화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처음에 배운 것을 잠을 거친 후 일어나면 전혀 다른 상황이 되어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이제 새로운 능력이 시작된다’라고 말합니다. 우선은 첫 번째 시작은 - 가르치는 목표라고 말하는 것은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아이들은 언젠가 갑자기 신발끈 매는 것을 배우고 그 다음부터는 이것이 매우 자연스러워집니다. 신발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써보라고 한다면 어려운 일입니다. 거의 아무도 이를 쓸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지혜는 머리로부터 손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그것을 할 수 있음 - 능력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할 수 있음은 사고할 수 있는 의식의 영역, 행동할 수 있는 의지의 영역, 도덕적 행함의 능력이 있습니다. 발도르프학교에서 일차적 배움의 과정의 끝은 듣고 잠을 자고난 후 다음날 반복을 했을 때입니다.

월요일에 의식의 차원에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노트에 적었습니다. 그리고 오이리트미 시간과 수공예를 거쳤습니다. 밤을 지나 아침이 되어서 의식으로 다시 꺼내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제의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많은 선생님들이 이를 많이 느끼실 텐데 특히 수학선생님께서 이를 더욱 많이 느끼실 것입니다. 어제는 이해를 하지 못하던 것을 다음날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반복의 과정에서 새로운 질문이 들어옵니다. 여기까지 되면서 배움의 일차적 과정은 종결을 하게 됩니다. 새로운 할 수 있는 능력이 개발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규칙적인 리듬이 있습니다. 낮-밤-낮 이렇게 낮과 밤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은 밤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시험이라는 것은 아이들에게 항상 낮의 영역에 있게 합니다. 시험의 방식으로는 진정한 시험을 치를 수 없습니다 당연히 시험이라는 것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엉터리 방식으로 이를 행해서는 안됩니다. 시험이라는 것은 의식의 내용을 떠올리는 순간입니다. 의식의 내용은 항상 바뀌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능력은 항상 거기에 있습니다. 여기까지 배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 나눠보았습니다. 다음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질문이 있으신가요?


- 이 과정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이 되는 건가요? 아니면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인가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이 되겠지만 특별히 아이들에게는 작용이 클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분명하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밤에 잠을 자면서 3번째 단계의 천사(수호천사)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낮에 어떤 생활을 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항상 밤이 되었다고 해서 3번째 단계의 천사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 어려운 상황은 대천사를 만나는 상황입니다. 그것보다 어려운 것은 시대의 영을 만나는 경험입니다. 인류 또는 모든 민족과 집단에게 밤에 세 가지 단계의 천사를 만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이에 관심이 있다면 우리 안의 세미나에서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공부를 해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다릅니다. 아이들에게는 조력자가 있습니다. 이 조력자는 항상 이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 조력자는 학급의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발도르프 과외공부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다른 보충수업은 다 할 수 있지만 발도르프학교에서는 학급의 정신이 같이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 역설적인 것을 하나 말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개인의 고유성을 가지는 한 명의 교육자입니다. 그러면서 당연히 아이들을 개인의 고유성이 입각한 배움으로 안내를 하겠지요. 하지만 항상 학급의 정신이 아이들을 가르치게 됩니다.

개인의 고유성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개인의 과제를 얻게 되는데, 수학교사는 각각의 아이를 위한 과제를 나누어주어야 하는데 그런가요? 그렇다면 어떻게 개인의 고유성을 성취할까요? 바로 이 과정은 밤에 이루어 집니다. 밤에는 학급의 정신(영)이 아이들에게 가서 아이들을 개인적으로 가르칩니다. 이것은 아주 비밀스러운 수수께끼인데 어디에서도 이를 이해하는 곳은 없습니다. 아직 35명의 아이들이 교실에 있습니다. 일반학교는 아이들의 수가 더욱 적습니다. 하지만 발도르프학교에서는 개인 고유성에 입각한다고 합니다. 정말로 좋은 발도르프교사는 학급에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학급의 정신이 일을 잘해서 개인의 고유성을 가지도록 하고 교실 안에서는 아이들이 서로를 도와서 다양성을 가지게 합니다.

저는 한 반에 54명이 다니는 발도르프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담임선생님은 여선생님이셨는데 정말 잘하셨습니다. 여기서 이야기를 해보면 개인의 고유성에 입각한 교육을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훨씬 더 어려움을 가진 아이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요즘은 54명을 한 반에 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 수는 줄여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발도르프학교에서도 인원을 줄여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수를 점점 줄여야 했던 것이 교육적인 방안 때문에 줄여야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치유의 차원에서 그 이유가 있습니다. 발도르프학교의 선생님들은 부분적으로 치유의 과정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만약에 어떤 날이 오면 25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있어야 할 시기가 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육적인 이유가 아닌 치유적인 이유입니다.

잠시 휴식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

이해하기

배우기

일하기

칠판에 세 가지 개념이 적혀 있습니다. 이것은 배움이라는 과정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종의 기도문 형태인 의식적인 문구가 하나 있습니다.

배움과 일

우리는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배웁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하기 위하여 배웁니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사람들의 모든 일 속에서 활기를 불어넣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인간 존재는 황량하고 공허합니다.

이 문구를 통해 발도르프교사는 도덕적인 자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서 계십니다.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아이들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배움이라는 것을 아이들이 커서 자기 업적으로 삼기 위해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첫째 목표는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이해란 독일어로 아주 멋진 단어입니다. 다른 것을 이해하기 위해 더 이상 좋은 것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남이 자기를 이해해 주기를 소망합니다. 독일말에 이해와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대의 개념입니다. 통찰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긍정적인가요, 부정적인가요? 긍정적이라면 통역이 잘못된 것입니다. (간파, 꿰뚫어보기)

예를 들겠습니다. 두 남녀가 있었습니다. 한 4년을 사귀었어요. 나 이제 너를 꿰뚫어볼 수 있어(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라고 한 사람이 표현했어요. 어떤 뜻인지 이해를 하셨어요? 그건 상대방한테 더 이상 기대가 없다는 겁니다. 볼 거 다 봤다는 거죠. 이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다 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친한 사이에서 한 사람이 세 마디를 하면 그 뒤에 어떤 말이 나올지 다 압니다. 둘이 레스토랑을 가도 할 얘기가 서로 없습니다. 단지 할 수 있는 일은 레스토랑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들이 어떤 사람인지 얘기하는 정도죠. 이건 우스운 상황이 아닙니다. 처량한 상황인 거죠. 그래서 그 뒤로는 상대방이 나를 꿰뚫어보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그러지 못하게 자신을 가립니다. (팔짱을 끼고)

다른 사람이 알아채지 못하게 큰 소리로 얘기합니다. 취업을 할 때 자신을 소개하는 연습을 하게 됩니다. 연습을 해서 배워야 하는데요, 스스로 자의식을 다르는 법을 배워야 하구요. 독일에서는 겸손한 것을 덕목으로 삼지 않습니다. 자의식이 강한 사람을 뽑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자신감 있게 보일지 연습을 하지요. 모든 것을 분명하게 확실히 해야 합니다. 능력을 과시해야 합니다. 이 자리에 내가 취직하면 이건 완전 내 자리고 나의 능력은 출중하다는 걸 보여 줘야 합니다. 내 개인적인 성향도 여기에 딱 맞다! 한국에서도 요즘 그럽니까? (예) 세계적이네요.

이런 훈련을 하는데, 옆을 보지 않고 눈을 딱 보고 말합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걸 눈치 채지 못하게 합니다. 빤히 보이는 것을 절대 보지 않습니다. 인사권자도 그런 훈련을 하지요. 그래서 그 사람은 압니다. 인사권자는 누군가가 자기 앞에서 큰 소리로 얘기하면 공포감을 감추려 하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자기 훈련을 하는 직업훈련소에서는 너무 크게 하면 들키니까 좀더 세련되게 하는 훈련을 발달시켰습니다. 인사권자는 되도록 빨리 취업자를 보려 하고, 취업자는 되도록 자신을 안 보이게 방어합니다. 그러면 인사권자는 더 강한 도구를 씁니다. 취업자는 더 큰 장벽을 두르죠. 모두가 서로를 간파하길 원합니다. 모두가 빨리 간파하려는 것이 여기서도 일어납니다. 약간 불쾌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일어납니다. 아무도 자기가 간파되는 것을 원치 않아요. 그렇지만 모두 다른 사람을 간파하길 원해요. (웃음)

모든 사람이 자기가 간파되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이해되는 것은 원하지요. 부부들의 모습을 보세요. 항상 불평을 하죠. 당신은 나를 정말 이해 못해. 누가 더 많이 하나요? 여자들이요? 여자는 찡그리며 자기가 얼마나 불행한지 쫙 펼쳐요. 여자는 이해받길 원해요. 그렇지만 남자도 이해받길 원합니다. 여보, 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같이 사는데 지금에서야 비로소 당신을 조금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아. 지금 이야기한 게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다는 것. 거기에 항상 겸손함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해한다는 게 얼마나 끝이 없는지를 압니다. 누군가를 간파한다는 것은 이미 끝났다는 것이지만 이해는 과정 위에 있습니다. 거기에서 다른 사람의 존재를 만나는 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간파하는 것에서는 절대 존재에 다가가지 못합니다. 이게 아주 원형적인 과정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배웁니다

우리가 배우는 것이 이 세상을 간파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대에는 과학이 발달했는데 자연과학은 간파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파괴하는 것이죠. 그래서 요즘 환경문제는 이러한 사회적인 관계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발도르프학교에서는 세상을 간파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것을 배웁니다. 아주 새로운 학문입니다. 이게 발도르프교육학의 첫 번째 목표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하기 위하여 배웁니다

일한다는 것이 뭔가요? 돈을 벌고 성공하고 권력을 행사하고, 그런 건가요? 일한다는 것은 권력의 문제인가요? 그리고 나는 나중에 어떤 직업을 갖고 싶어할 것인지 배워야 합니까? 우리는 한 직업을 가지려고 하는데 사실 뭘 하려고 배웁니까? 여기에 아주 유명한 잠언이 있습니다. 유럽에 가면 뾰족하게 내려오는 고딕 성당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 밑의 초석에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얼 하고 있습니까?" "저는 돌을 깎고 있습니다." "밥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대성당 짓는 일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뭐가 답입니까? 세 번째죠. 발도르프교사가 된다는 건 많은 돈을 벌 수 없어요. 하지만 성당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들은 대성당을 갖고 있습니다. 교사는 아이들에게 성당을 지어주는 거죠. 그러면 우리 일에 고귀함을 느낍니다. 일을 한다는 것은 세상을 바꾼다는 겁니다. 대성당이란 것은 세상을 바꿨다는 것입니다. 자연은 대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마감이 된 건 아니에요. 자연을 거쳐 어떤 일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많아요. 그래서 아리만쪽에 더 가서 보면, 우리가 말하는 유전자 조작의 위험성. 그래서 긍정적으로 우리가 자연을 이용한다는 것은 대성당을 짓는 것이고 부정적인 것은 유전자 조작. 자신이 대성당을 짓는 것은 아니에요. 정말 진정한 사랑으로 짓는 게 이 세상에 남을 수 있습니다. 진정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일을 한다는 겁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이죠.

아리만은 그래서 항상 세상을 지배하라고 하지요. 아리만은 물질적인 지상과 깊은 관계에 있습니다. 아리만 말고 세상과 연관짓는 또 다른 정신적 존재가 있어요. 그 존재도 세상에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다른 존재는 당신에게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합니다. 당연히 세상을 지배함으로써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예술인도 뭘 새롭게 만들려면 자기가 손으로 하는 것을 지배해야죠. 예술인의 그런 행위는 봉사적인 겁니다. 현 경제를 보면 이기주의가 판을 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말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한다면 무아의 상태가 되어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배운다는 것은 하나의 새싹과 같습니다. 세상을 이해하고 일을 하는 것. 이해는 우리의 의식을 깨우치는 것이고 일은 행해서 완결시키는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존재는 많은 이름이 있지만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인간의 대표 정신이라고 한다면 인류의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존재는 세상에 일을 해서 변화를 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사랑이 어디에서 온 걸까요? 사실 우리는 사랑에 대해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난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한다면 사실 이 사람은 사랑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긍정적인 마음을 뜻하지만 사실 사랑과 연관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이기주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에는 이기주의가 없습니다. 사랑은 하나의 큰 신비로움, 비밀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배웁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하기 위하여 배웁니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사람들의 모든 일 속에서 활기를 불어넣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인간 존재는 황량하고 공허합니다.

인간의 사랑에 모든 게 존재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본질적인 사랑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 사람은 많은 사랑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어. 그 사람에게는 항상 사랑이 나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건 오직 이 세상에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사랑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배울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 학교가 외부와 현실적인 연관성을 맺을 수 있는을까요? 그래서 슈타이너가 14살 정도 되는 아이들에게 주기 위한 하나의 의식적인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가는 텍스트가, '너는 이제까지 학교를 통해 인도를 받았다. 그렇지만 이제는 네 자신이 네 갈 길을 찾아야 한다. 이 삶의 큰 학교를 통해 네 갈 길을 찾아야 한다. 이 작은 곳에서 일어나는 것은 네 전체 삶을 좌우하는 큰 길을 연결하는 것이다.' 그러면 삶의 학교에서 큰 걸 배워야 하지 않느냐 할 수 있고, 그에 관한 교육과정과 교사가 있지 않겠느냐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삶이라는 관점에서 이 학교를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우리가 살다보면 어느 시점에서 너는 무언가 배워야 한다는 것을 맞닥뜨립니다. 위기일 때입니다. 더 이상 뚫고 나갈 수 없어요.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운명에 대해 원망합니다. 운명이 나를 내동댕이쳤다는 슬픔도 있지요. 그래서 3학년 아이가 바깥이, 굉장히 자연이 아름다운데 교실에 앉아 어려운 시험을 봐야 하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이 학교는 아직 졸업생이 없어서 뒤에 올 것 같은데 발도르프교사들은 가끔 오래전 가르친 학생에게 편지를 받습니다. "선생님, 저는 굉장히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교실에서 아주 엄하게 대해 주신 것을요." 그 아이가 어렸을 때는 저항을 했지요. 15년이 지나서는 그 선생님이 훌륭하셨음을 알고 감사해 합니다. 만일 이 학생이 철학적으로 문장을 만들어 낸다면, '선생님은 그 당시 나에게 내가 가야할 길에 대해 요구를 했는데 내가 반항을 했다. 하지만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것은 내가 가야할 길이었다. 나는 지금 이걸 하고 싶은데 사실은 나는 저 길을 가야 한다. 사실 나는 저것을 하고 싶었다. 이것을 하고 싶어 한 것은 당나귀였지.'

교사는 아이들이 하기 싫어하는 것을 하게끔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당나귀가 항의를 하더라도. 그 후에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위기에 처하면 내 운명에 대해서 항의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다른 의식이 깨이기 시작합니다. 사실 내가 운명에 항의를 하는 것은 나의 당나귀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걸 확실히 인식한다면 내가 진정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위기를 통해서 자기 자신에게 깊이 들어온다는 것은 사실 사랑의 행위입니다. 호감, 반감에 의하지 않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자기의 운명을 갖고 있고 업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운명과 업은 사실 발도르프학교의 교육과정입니다.

어린 학생은 연령에 맞는 교육과정을 갖고 있어요. 어른들은 개인의 개별성에 맞는 교육과정을 갖고 있습니다. 열두살 아이에게는 기하가 들어가야 하고, 35세 되는 사람에게 깨어나기 위해 교통사고가 나야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연령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운명적으로 교통사고를 당할 수 있고 그래서 병원에 입원해 있다면, 그 사람은 교통사고가 났어야 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인식하기 위해서 교통사고가 났다고 말입니다. 선생님들이 살아온 인생을 본다면 어려운 위기가 사실 정확한 시기에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런 위기가 온다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에게 큰 교사가 있습니다. 그는 교통사고를 통해 무섭게 벌을 주려고 한 게 아니라 안내하고 발전시키려 한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을 갖는 것은 우리가 마음을 열고 사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큰 삶에 학교가 있는 것을 느꼈고, 나는 이 삶의 학교의 학생입니다. 나의 업은 내게 주어진 고유한 교육과정입니다. 반면에 보이지 않지만 나에게 사랑을 주는 선생님이 있습니다. 중요한 과목들, 이 삶의 학교에서 배워야 할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면 과연 보이지 않는 교사는 누구일까요? 그것은 인류의 영, 원형 등 많은 이름을 찾을 수 있어요. 그래서 아까 시를 끝까지 읽어보죠.

우리는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배웁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하기 위하여 배웁니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사람들의 모든 일 속에서 활기를 불어넣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인간 존재는 황량하고 공허합니다.
그리스도는 인간 사랑의 스승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라는 이름에 대해 종교적이거나 종파적으로 이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이름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원하신다면 이 주제가 어디서 나왔는지 설명하고 좀더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의 큰 학교와 이 발도르프학교의 연관성에 대해 다음에 얘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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