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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과 당나귀 - 미하엘 데부스 선생님 강연록 1 본문

인지학

배움과 당나귀 - 미하엘 데부스 선생님 강연록 1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1. 11. 1. 21:01

데부스 선생님 강연록 1 - 배움과 당나귀

2009. 9. 24. 목



데부스 선생님 : 사랑하는 과천학교의 동료 여러분. 제가 세 번째 온 것이 상당히 기쁩니다. 2년 전에는 아내와 같이 와서 이 학교와 인연을 맺은 걸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아내가 인사를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여러분 중 많은 분을 알지만 새로운 분도 계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럼에도 연결돼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기존 분들은 이전 이야기와 이어서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하려는 작업은 제 마음에 담아둔 어떤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교사회를 하나의 고유한 정체성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학교에는 그 정체성이 각 교실에 있다고 합니다. 각 교실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 사람들은 판단하지요. 그래서 각 교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본다면 교사 한 사람이 단독의 병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병사들이 조금씩 만나는 일이 있을 수 있지요. 발도르프학교에서는 그와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집니다. 발도르프학교의 실제 모습은 교사들이 함께 협력하고 있을 때 드러납니다. 그래서 각각의 교사는 그것을 항상 느껴야 할 것입니다.

두 가지의 특성을 가진 공동체가 있는데요. 다섯 분이 나와서 원형을 만들어 주세요. 안쪽을 봐 주세요. 모든 분들이 중심점을 바라봐 주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는 뒤돌아 주세요. (바깥을 보고 섰음.) 지금은 어디에 중심이 있습니까? 등쪽, 뒤쪽에 중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의 느낌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것을 판단할 때 여러 가지의 표현이 있습니다. 두 가지 독일어가 있는데요, 인지학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는 '공동체', 다른 하나는 '공동체성'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안을 바라보는 것을 공동체라 한다면, 뒤를 보는 상황을 공동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교사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교실에 들어가 계신다면 당연히 교실의 상황에 집중하겠지요. 그런데 뒤쪽에 보이지 않는 차원의 공동체성이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여러분들의 각 교실이 뒤의 공동체성에 대해 대표성을 갖는 실체가 됩니다. ‘아, 그렇구나’라고 아는 것보다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이 교실에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감춰져 있는, 드러나지 않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느낌, 생각은 오로지 발도르프학교에서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이미 이것을 전제로 하고 발도르프학교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이 교사회야말로 결정적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교사회는 그래서 하나의 큰 그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 같이 신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독일에서도 학교에 대한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교사의 문제입니다. 바깥의 교육에 관련된 사람들이 이야기하기를, “어떻게 한 교사가 8년 동안 한 반을 맡을 수 있겠는가. 어린이들은 아주 다양한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최대한으로 2년까지만 담임을 맡을 수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 담임교사가 8년간 한 반을 가르친다는 것을.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없으니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는 거죠. 외형적인 것만 보는 사람은 발도르프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이 방법이 훨씬 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만약 2년 만에 교사를 계속 바꿔야 한다면 8년 동안 네 명의 교사를 만나야 합니다. 하지만 발도르프학교에서는 아이들이 한 명의 교사를 통해 25명을 항상 마주하게 됩니다. 교사회가 25명이라면요. 이게 논리적이지 않은가요? 고차원에서는 아주 논리적입니다. 낮은 차원에서는 그렇지 않지만요.

문제가 될 때는 일반교육과 발도르프교육이 서로를 알지 못할 때 힘듭니다. 이것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기는 힘듭니다. 이것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교사회가 바르게 형성되어야만 합니다. 단순히 25명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조건은 각 교실에 서 있는 교사는 자기 스스로 항상 ‘나는 늘 단편적이고 한계가 있다’는 걸 의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교사는 자기 교실에서 일을 하면서 ‘나는 단편적인 존재이고 이 존재가 아이들을 만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내 뒤에 25명의 교사회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한 교사가 교실에서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면 지금 이러한 과정은 그 교사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계속 반추를 해 보세요. 아주 능력 있는 교사가 학급운영도 잘하고 수업도 잘해요. ‘나는 어떤 사람보다 일을 잘 할 수 있어’라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 자유의지에 의해 ‘나는 단편적이고 교사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제 말은 요구가 아니라 그냥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여러분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어떤 교사회가 진정한 발도르프교사회의 목표를 가질 수 있는가? 한 교사회가 능력상 잘한다가 아니라 정말 연합되어 잘 이루어질 때는 내면에 아주 밝은 빛이 피어나 좋은 교사회라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얘기는 지난 2년 동안 여러분과 나누었던 이야기입니다.

예전에 우리가 ‘세 단계의 천사’에 대해 다루었는데 그것부터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매주 교무회의를 할 때마다 읽으셨다니 놀라운데 내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 우리에게 과연 빛은 왔는가? 빛이 오려면 나는 과연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 간절함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러한 빛이 우리에게 들어오길 바라는 간절함.

- 그전에는 업무에 대해서만 생각했다면 시를 읽고 나서는 아이들에 대한 마음, 평온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어요.

- 명상록 자체가 상당히 그림에 가까운데, 일주일 동안 잊고 살다가 시를 읽고 그림이 그려지면 상당히 힘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여러분은 이것에서 긍정적인 느낌만 받으셨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미 특별하지 않은 것 같네요. 좀 어색하거나 좀 놀랍거나 불편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나요?

-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천사들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는 ‘거짓말하고 있네’ 하고 느껴지기도 하지요.

여러분들의 반응이 참 고마웠습니다. 우리는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그 말은 곧 우리가 15세기 이후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류를 이끌고 안내하는 영적인 존재가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 존재는 학교에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주 여러 단계의 존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도 여러 단계의 인류 발달과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민족에게는 조금 빨리 올 수도 있고 어떤 민족에게는 늦게 올 수도 있습니다. 통합적으로 생각한다면 현시대는 의식혼을 형성해야 할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의식혼에 대한 개념이야말로 발도르프학교의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각각의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의 이력을 위해 분투하고 그것을 위해 살고자 합니다. 이 의식혼이라는 것은 나와 타인을 먼저 구분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힘은 아주 어렵고 힘든 문제일 수 있는데요, 이 어렵고 힘든 것을 잡아끄는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의식혼을 다른 이름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낱말을 사용한다면 ‘관중 또는 청중의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자기 자신을 관중이 되어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나가 아니라 ‘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자기 자신에게 ‘야이, 당나귀(바보)야. 대체 뭘 한 거야.’ 이렇게 말한 적이 있나요? 여기서 바보는 누구고 말하는 나는 누구입니까? 이것들이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야이, 바보야. 너 지금 뭐했냐?’ 이럴 때는 자기 자신을 내가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때부터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바보가 할 수 있게 해야겠지요. 당나귀(바보)가 고집이 세고 말을 안 들을 수 있어요. 한쪽은 당나귀, 한쪽은 나. 당나귀처럼 잘못한 나를 내가 인정해야 하듯 다른 사람도 그렇게 인정해 줘야 합니다. 다른 사람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이죠. 나한테도 당나귀가 있고 동료한테도 당나귀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당나귀만 있는 게 아니라 ‘야이, 당나귀야’라고 말하는 나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나귀들의 교사회가 되면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의식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나귀들은 다 바깥에 나가 서 있고요, 나(자아)만 이 안에서 회의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동료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사실 그건 동료의 당나귀와 어려움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소화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교사회를 형성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자기의 당나귀를 너무 사랑하면 안 됩니다. 나와 당나귀를 분리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실제로 진정한 동료가 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것은 드문 경우이고, 대부분의 경우 당나귀로 만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아닌 다른 존재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아이들과 그렇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쉽게 일어날 것입니다. 교실 안에는 아주 많은 당나귀들이 있는데, 사실 잘 보면 거기에 실제 아이들이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렇게 교사회를 위한 공부와 연습을 한다면 그것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공동체를 형성한다면 날마다 이런 경험을 하게 되겠지요.

다시 한 번 말씀 드릴게요. 여러분이 교사회를 이루는 상황이 낮이 되면 교실은 밤이 되고, 여러분이 교실에 가게 되면 거기가 낮이 되고 교사회가 밤이 됩니다. 이것은 아주 아름다운 비유입니다. 각각의 교사 뒤에는 천사가 서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당나귀가 서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실은 거기에 천사가 서 있지요. 이 다음 단계에서는 이것들이 교사회에서 움직임으로 일어나 하나의 큰 움직임,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나는 모든 동료들에 대해 관심과 흥미를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냥 보면 동료들이 다 당나귀로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그 존재의 본질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심리적으로 그러라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집안의 어려움이나 개인적인 어려움을 보라는 것이 아니라 ‘나의 동료가 무엇에 천착해 있는가, 영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가’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슈타이너는 발도르프학교의 한 교사가 책을 출판했다면 모두 그것을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만약 이 사람(*** 선생님)이 무얼 출판했다면 모두 읽으시겠어요? 지금 피곤하니까 방학 때 읽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방학이 되니까 또 무슨 일이 있다고 다음으로 미루거나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테마라고 읽지 않을 수 있지요. 일본의 지빠귀에 대한 책이라면 읽을 수 있겠어요?

하나의 목적의식적인, 객관적인 관찰은 영적인 관심과 집중을 뜻합니다. 한 교사가 영적으로 추구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그 자체가 공동체의 과제이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 맞는 것이냐면 서로가 다 관심을 가질 때만 의미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각각은 개인적인 흥미에 따라서만 움직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사회란 형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시간이 주어지면 다른 동료가 정신적으로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교사회에서 줄 필요가 있습니다. 한 10분 정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실제적인 과제도 좋습니다. 6학년의 수업 내용에 대해서도요. 6학년에 물리학이 있는데 물리학을 하며 생겨난 관심을 이야기할 수 있지요. 또는 교육적인 과제. 예를 들어 사춘기 아이들에 대해 관심을 가진 선생님이 사춘기 소녀에 대한 주제를 갖고 얘기를 할 수 있지요. 우리 모두를 위해 주제가 넓어질 수 있어요. 오늘날의 사춘기와 가정에 대해 말할 수도 있어요. 모두가 관심이 없는 일본의 지빠귀에 대해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확정된 건 없습니다. 중요한 건 그 교사의 관심에 집중해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심리적으로 접근하는 차원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 점차적으로 여러분은 교사명상의 두 번째 단계로 가는 것입니다.

어떤 빛을 기다린다고 하신 분이 있는데요, 이럴 때 어떤 경우도 번개처럼 오지는 않습니다. 감각적인 자극으로 오지는 않습니다. 교사회가 어려움을 겪게 된다면 어느 순간에 이것이 풀릴 수 있는 실마리를 찾게 됩니다. “우리 이제 그 문제를 해결한 것 같아. 저 사람이 좋은 제안을 했으니까.” 그것은 맞지 않아요. 한 방울 빛이 떨어진 것입니다. 한 교사가 그것을 대신해 말한 것입니다. 여기까지 우리가 교사를 위한 명상록을 갖고 말해 봤습니다. 여기서 잠깐 휴식을 취하겠습니다.

*

- 당나귀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셨는데 교사회에서 현실적 어려움은 스스로 나의 당나귀를 보지 못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의 당나귀는 너무 잘 보이고, 다른 사람의 당나귀를 발견을 했을 때 그것을 바르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 영적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 반복해서 말씀을 해주셨는데 영적으로 교사를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지금으로는 그 사람에 대해서 꾸준히 생각하는 것 말고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 구체적인 방법을 설명해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아주 좋은 두 가지 질문을 받았습니다. 먼저 당나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대방을 당나귀로 본다면 당나귀는 자꾸 더 커집니다. 감각혼의 영역과 당나귀는 일치합니다. 감각혼은 항상 일체를 추구합니다. 여기서 만약 감각혼이 있다면 나와 일체가 되어서 하나가 됩니다. 이는 하나의 감정이 됩니다. 이와 반대의 상황이 의식혼의 상황입니다. 여기서 젊은이들이 말하는 ‘쿨’하다는 상황으로 옵니다. 여기에 당나귀가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너를 보겠다’라는 상황이 옵니다. 당나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당나귀는 또 다른 것이 있습니다. 자기 당나귀는 하루에 3번씩 관찰하고 상대방의 당나귀는 오랫동안 보지 말아야 합니다. 우선은 여기까지만 이야기를 하고 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에게는 3가지의 영역이 있는데 하나는 과거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통해서 이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분명하게 과거에 속한 것을 말하라고 한다면 우리의 신체일 것입니다. 가장 오래된 과거의 모습으로서 보여지는 것이(육화한 것이) 우리의 신체이고 과거의 결과물입니다. 2년 전에 중요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신체보다 더 오래된 과거는 우리 주변에 없습니다. 신체가 과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체가 성장한다는 것은 우리의 과거가 성장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희망, 절망 등 모든 것이 우리의 신체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또 우리는 영혼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영혼체 안에도 이전에 경험한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경우는 작업해 보지 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절망 상태에 있는 것을 해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신체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현재의 영역이 있습니다. 과거의 것들을 통해 현재 상황에서 경험하고 살아가는 것을 현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들은 더 이상 할 수 없는 것들도 있고, 지금 할 수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한 사람이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면 보통의 삶을 영위할 수는 있겠지만 피아노를 연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더 이상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다는 것이 현재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4번째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를 겪어 피아노는 칠 수 없다고 할지라고 바이올린은 연주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러한 경험이 있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재입니다. 자신의 과거를 통해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영역으로는 미래의 영역이 있습니다. 우리는 뭔가를 하고 싶어 합니다. 뭔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이상적인 주제를 가지고 책을 쓰고 싶다.’ 이러한 것이 한 예가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30년 전부터 소망이 하나 있었는데 티벳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뭔가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2년 전에 그 소망을 이루었고,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15년 전에는 이것이 미래였습니다.

신체는 과거를 통해 이루어졌고, 이상을 가지고 아직 되어지지 않은 미래가 있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관심을 가지고 봐야하는 것은 과거의 모습이 아닌 미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미 과거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 말은 곧 당나귀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영적인 추구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에는 미래가 들어있습니다. 모든 분들이 미래에 대해 관심이 있고 흥미를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이상적인 발도르프교사회는 미래를 사는 교사회입니다.

만약 한 사람이 책을 쓴다고 생각해봅시다. 3개월 정도 후에 주변의 한 사람이 작업이 어떻게 되어가는지를 묻는다면 그것은 책을 쓰는 사람에게 자극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흥미는 쓰는 사람에게 관심과 자극으로 돌아오고, 쓰는 사람은 자극을 받아서 더욱 열심히 작업을 할 것입니다. 흥미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창조의 힘입니다. 서로가 마주하고 있는 가운데 흥미와 관심이 서로를 발전시킵니다. 상대방의 관심에 우리는 고마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 미래를 살고자하고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휴식 전의 작업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배움이라는 주제로 가보겠습니다. 개가 배운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개는 배울 수 있나요? 말은 배울 수 있나요?

- 나름대로 학습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배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 훈련이 된 말과 배우지 않은 말은 차이가 있습니다. 훈련과 배움이라는 것에 차이는 있겠지만 그것도 배움의 일종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움과 훈련의 차이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동물적인 영향에 의해서 자신의 상태를 바꿀 수 있습니다. 또 사람은 동물에 대한 영향력으로 동물의 행동을 바꿀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동물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서커스에서 호랑이를 불타는 링 안으로 뛰어들게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동물들은 불에 대한 굉장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호랑이에게 정말 큰 것입니다. 이 일련의 일들은 누구로부터 온 것인가요? 그것이 호랑이 자체로부터 온 것인가요? 불타는 링 안으로 뛰어드는 것이 스스로의 일로서 만든 것인가요? 조련사가 그렇게 만든 것이지요. 동물이 아닙니다. 동물은 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반응을 한 것입니다. 동물을 훈련시킨다는 것은 인간의 일입니다. 그리고 굉장히 슬픈 일입니다. 동물들은 그것을 하지 않으면 벌을 받습니다. 그래서 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불에 뛰어드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벌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의 반응입니다. 그리고 다른 쪽으로는 상을 줍니다. 그래서 조련사가 원하는 것을 하면 상을 받습니다. 동물은 상과 벌 사이에서 자신의 행위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다른 체질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위를 변화시킵니다. 저는 이것을 배움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고 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아이들을 훈련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을 하고 싶습니다. 교사는 아이들의 행위가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아이들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아실 것입니다.

불타는 링 안으로 뛰어드는 것은 동물의 작업이지 조련사의 작업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야기하지요. 동물이 뭔가를 배웠다고. 수업시간에 아이들이 뭔가 행동의 변화가 있다면 이는 아이들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우는 것입니다. 교사들은 이 가능성을 열어 주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아이가 속으로 이를 거부하고 있다면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교사는 벌과 상을 번갈아 가면서 아이들의 행위를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동물들은 뭔가를 배울 수 없습니다. 밖의 영향으로 뭔가가 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이 두 가지가 모두 가능합니다.

사람은 배울 수 있고, 또한 훈련이 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일반학교들이 이러한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벌과 상을 통해서 밖으로부터 아이들을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1930년대에 미국에서는 행동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를 행동교정주의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는 배움의 이론의 있습니다. 어떤 것의 필요성이 행동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이 기간에는 프로그램화된 배움이 있었습니다. 한 질문을 던져서 옳게 답하면 상을 주고, 틀리면 벌을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몰고 가면서 아이가 뭔가를 배우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지금의 시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이것이 사지선다형 질문입니다. 발도르프교육에서는 이러한 것을 전혀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교육에서는 아이에게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다시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배움이란 무엇입니까? 배움은 훈련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배움의 긍정적인 부분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한 아이가 배웠다고 했을 때 어떠한 과정을 연관시킬 수 있나요? 우리가 우리 일생을 돌아보면서 뭔가를 배웠다고 할 때 어떤 것을 생각합니까? 어른들의 행동주의가 이 안에 포함되기도 합니다. 슈투트가르트에서 제가 운전할 때 일 년에 두 번 과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면허가 정지된 적이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한 번만 가능하거든요. 그러다가 일 년이 지나갈 때쯤 또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2년 뒤에 허가가 되었습니다. 4개월 동안 저 스스로 면허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9월 26일까지였죠. 그런데 21일날 한국에 왔습니다. 그래서 20일날 면허를 취득했습니다. 다시 돌아가면 면허를 받을 수 있지요. 차례차례 이 순서가 저에게 어떤 것을 가져다 줄까요? 일 년 동안 이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정확히 속도계를 봐야겠지요.

제 생각에는 제가 아주 좋은 운전자이고, 40년 동안 한 번도 사고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바로 전체적인 교통시스템에 관계된 것이니까요. 지속적인 강요가 있을 때 변하겠죠. 물론 제 스스로 하겠다고 의지를 내어야 합니다. 바깥에서 온 것을 자기화하는 것이 바로 배운다는 것입니다. 밖으로부터 온 의견이 아니라 내가 결정내린 내 의견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순간에 나는 새로운 능력을 펼치게 됩니다. 이것은 외부적인 능력, 스포츠, 예술, 사회, 도덕적인 능력도 있습니다. 가장 높은 것은 그것을 도덕적인 능력으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오로지 도덕적인 능력만 남게 합니다. 그래서 배운다는 것은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능력으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굉장히 좋은 질문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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