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선의 본질 - 미하엘 데부스 본문
선의 본질 Das Wesen des Guten
미하엘 데부스Michael Debus
선의 기원을 고차세계에 있다고 보는 종교인에게, 악이란 항상 거의 풀기 어려운 커다란 수수께끼였다. 신이 세계의 창조자로써 "선하다면", 도대체 어떻게 창조 안에서 악이라는 것이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되는가? 혹시 또 다른 신, 그 속에서 악이 생겨나는 것인가? 우리의 창조가 혹시나 단 하나의 영향력 있는 신만의 작품이 아니라 어둠의 신과 빛의 신의 이원성에서 생겨났을까? 만약 신 옆에 동등한 권능을 가진 어둠의 신이 지배한다면 신의 전능함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의 신이 선한 세계의 유일한 창조자라면 도대체 어디에서 악이 생겨나는가?
이러한 인식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한 쪽에서 결과적으로 이원적인 신을 상상하도록 이끌었다. 즉, 다시 말해서 이 쪽의 시도가 창조의 초기에 어둠의 신과 빛의 신이 독립적으로 작용을 했다는 가정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로아스터의 종교에서는 대략 가장 높은 신 아후라 마쯔다(Ahura Mazda, 지혜로운 주인, 중기 페르시아어로: 오르무쯔드 Ormuzd)가 쌍둥이 영인 스펜타 마이뉴Spenta Mainyu(선한 영)와 앙그라 마이뉴(Angra Mainyu, 파괴하는 영, 중기 페르시아어로: 아리만 Ahriman)를 생겨나게 했다. 이 영들은 그들의 본성에 따라 구별되지 않고 이미 처음부터 본인의 결정을 통해 구별된다. 하나는 선과 생명을, 다른 하나는 악과 죽음을 맡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스펜타 마이뉴는 명확하고 이원적인 상대적 위치에서 아리만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사고도 가르침도 영적인 힘도, 우리의 결정도 말도 행동도, 우리의 인식도 혼도 일치하지 않는다." 후기에 오르무쯔드(아후라 마쯔다)는 스펜타 마이뉴와 동일하게 간주되었고, 그럼으로써 종교적인 이원론은 결과적으로 하느님과 아리만 사이에서 형성되었다.
다른 쪽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를 했다. 이 시도는 이원적인 세계관으로 보이는 것을 단호하게 피하고, 그럼으로써 악이 자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게 했다. 신은 선만을 창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악을 “선의 부재성”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악을 이해하기 위한 이 양 극단의 관점(이원론)으로는 실제로 인식의 문제를 풀 수 없다. 그래서 선과 악이 대립된다는, 바탕에 놓여진 전제 자체를 검토해야만 한다.
선과 악의 대립성이 재발견되는, 두 가지의 짝이 되는 속성들을 근거로 우선 살펴보자.
인색한 --- 관대한
만용의 --- 신중한
조심성 없는 --- 단정한
독단적인(교조적인) --- 너그러운
오른쪽이 선을 대표한다면 왼쪽은 그것의 대립이 되는 악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자세히 관찰하면 알 수 있듯이, 여기에서 선과 악은 서로 절대 최종적 대립관계에 있지 않다. 인색함의 진정한 반대는 관대함이 아닌 심한 낭비성이다. 이같은 방법으로 만용은 비겁의 반대, 조심성 없음은 옹졸함의, 독단은 무관심(자기 본인의 의견에 관해)의 반대가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놀랍게도 악의 반대가 사실은 선이 아니라 또 다른 악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인색한 --- 낭비가 심한
만용의 --- 비겁한
조심성 없는 --- 옹졸한
독단적인(교조적인) --- 무관심한(아무래도 좋은)
여기에서 우리는 한번쯤 악의 특성을 내적으로,가령 연극적으로 형성해 볼 수 있다. 첫단의 의미에서 보면 이 사람은 인색하고 만용스러우며 조심성 없고 독단적이다. 이런 특성이 전혀 사실성이 없으며 연극적으로 연출불가능하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가령 인색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절대 만용스럽지 않다. 이 특성들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둘째 단의 특성을 가진 인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가 이 특성들을 적절하게 두 단에 정렬시키고 나서 악한 특성의 극단적인 두 전형을 발견하게 되면, 이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전형1 --- 전형2
인색한 --- 낭비가 심한
비겁한 --- 만용의
옹졸한 --- 조심성 없는
독단적인(교조적인) --- 무관심한(아무래도 좋은)
전형1은 분명 연극배우에게 매력적인 역할일 것이고, 완전히 대립적인 전형2도 마찬가지로 매력적일 것이다. 아주 자세히 우스울 정도까지의 유쾌한 질문들을 함으로써 이 역할들이 무대효과가 있도록 묘사할 수 있다. 두 전형 중 누가 나이가 많고, 누가 젊은가? 누가 외로우며 누구에게 친구가 많은가? 누가 열병에, 누가 관절염에 걸릴 가능성이 큰가? 누구의 머리색이 어둡고, 누가 금발일 것인가? 누가 직모를, 누가 곱슬머리를? 한 인물의 신발과 다른 인물의 신발은 도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둘 중 누구의 움직임이 가볍고, 누가 경직되기 쉬워 무대에서 휠체어에 실려 다닐 것인가? 감독은 이 모든 질문에 대해 대체로 분명하게 답할 수 있다. 전형1은 인간적으로 사귀기 어렵고 외로우며 경직되기 쉬운 인물이다. 그는 교조주의에 빠지기 쉽고 외적인 하루일과에 옹졸할 정도로 꼼꼼하며 자기의 회계장부를 빈틈없이 꿰뚫어본다. 세계를 향해 거리감이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에 단단히 의존한다. 미리 계산하면서, 아무것도 우연에 내맡기지 않고 상황에 대한 전권을 잃지 않고자 노력한다.
전형2는 이 모든 것에 반대되어, 첫 대면에서는 조금이라도 반감이 간다거나 나쁘다고 보여지지 않는다. 그는 친구가 많고, 어디서 생긴 돈이건 언제나 무분별하게 써대며 자기 운을 위험에 내걸고 신체적으로나 내면적으로도 언제나 활동적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영감을 얻어 그걸 바로 행동에 옮기고 싶어한다. 본인 스스로와 관련해서는 이 행동들을 내적인 귀결로 끌어내기 힘들다. 언제나 들떠 있고 신체적으로도 자주 고열을 동반하기도 하고...
전형1과 전형2의 차이는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두 전형은 완전히 대립되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둘 다 자신에게 주어진 틀에 고정되어 있어, 이들이 그때 그때 특수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 가능하다. 따라서 이들은 특수한 성격을 표현하는 역으로 무대효과를 낸다. 어떤 특성이 전체 프로필에서 지배적인지에 따라 전형1 또는 전형2에서 수많은 인물군상이 형성된다. 대립되는 짝인 인색함-낭비병에 대해 실제로 한 프랑스인과 오스트리아인에 의해 연극작품이 쓰여졌다. 몰리에르(Moliere)는 1668년 작품 “인색한 사람(Der Geizige)”을, 페르디난드 라이문트(Ferdinand Raimund)는 1833년 동화작품 “낭비하는 사람(Der Verschwender)”을 썼다.
그 중간인 실제의 선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관대함, 신중함, 꼼꼼함과 만용스러움의 특성을 자세히 바라보면 실제로는 위에 보여지는 극단적인 특성들의 중간이 아니다. 관대함은 인색함보다는 낭비병에 더 가깝다. 신중함은 만용보다는 오히려 비겁과 어울려 연관이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중간을 위해 하나가 아닌 두 가지의 특성들을 발견하고, 이 특성들은 각자 한 쪽의 극단성과 유사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온전한 목록¹은 다음과 같다.
인색한 --- 검소한 --- 관대한 --- 낭비가 심한
비겁한 --- 신중한 --- 용감한 --- 만용의
옹졸한 --- 단정한 --- 도량이 넓은(배포가큰) --- 조심성 없는
독단적인(교조적인) --- 신념이 강한 --- 너그러운(관용적인) --- 무관심한(아무래도 좋은)
극단적인 것이 서로 배타적(인색함 또는 낭비병 등)이고, 그 중간에선 서로 “내포”한다는 것이 바로 눈에 띈다. 검소한 사람이 또한 동시에 관대하지 않다면 결국엔 인색하다고 할 수 있다. 용기 있는 사람이 또한 동시에 신중하지 않다면 정말 만용스런 사람이다. 그래서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의미에서의 배타적인 “악”에 대해 '이것도-저것도'(검소하기도 하고 또한 관대하기도 한)라는 의미가 항상 열려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새로이 결정하는 “선”은 악과 비교된다. 그 중간은 단순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맥박 뛰듯 살아 있으며 우리의 호흡 및 심장박동과 같은 리듬이다. 이 중간으로부터 행동하는 사람의 태도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혹시 한번은 “검소”할 수 있으나, 그 이후에는 (보기에 비슷한 어떤 상황에서는) 관대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나 새로이 고려하고 아무런 고정된 행동양식에도 따르지 않는다.
선은 살아 있는 흐름이고, “악”은 흐름으로부터 오른쪽과 왼쪽으로 떨어져 나오며 고정적으로 도식화된 형태를 받아들인다. 계속 흐르는 것에 비교되어 이 악은 “뒤에 처져” 있다. 생명력 없이 타산적인 상황과 경직을 일으키는 이 경화하는 힘은 인지학에서 아리만(Ahriman)의 힘이라 불려진다. 그 반대되는 힘은 분열과 혼란을 가져오고 사람이 만용스럽도록 커진 자기인지를 하게 하며(자아의 팽창), 이 힘은 루시퍼Luzifer의 힘이라 불려진다.
십자가의 사건을 보면 오른쪽과 왼쪽에 실제 죄를 지은 범죄자들이(누가복음 23장 41절) 십자가에 못 박히고(요한복음 19장18절), 그 가운데에 그리스도가 인간의 원형으로서 등장하여 외적 무력함 속에서 처형당하지만 내면의 자유와 창조력을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 스스로의 법칙을 추구하는 자는 항상 유념하여 행하고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정한 선한 법칙에 일치시킨다. 그렇게 자율적인 사람은 개인의 고유한 선을 악에게 내어주지 않고, 이 선이 양극단의 악으로 “치우치지도 않는” 영적인 중앙에 있게 한다.
“Die Christengemeinschaft“, 2002년 11월 발간본에서
번역 이은경(liebelaura@hotmail.com)
¹ 사람의 행동에 대한 이 네 단의 서열은 이미 로다 비저(Roda Wieser, „Grundriss der Graphologie 필적감정학의 요강“, 뮌헨, 1969, 191쪽)와 하인쯔 클로스(Heinz Kloss, „Die Christengemeinschaft“, 1972년 8월)가 언급했다.
[출처 : http://www.cgfreeschool.kr/xe/index.php?mid=pds_referencepublic&page=12&document_srl=16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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