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인지학은 종교인가 - 엘마르 슈뢰더 (8) 본문
말하자면 빛의 세계, 그리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이른바 원상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라고 하는 그 세계 말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이런 것들을 노력에 의해서 다 인식할 수 있다, 그 원상들을 다 인식할 수 있다, 라고 한 뒤로 사실 이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된 건요. 굉장히 시간이 흘러서예요. 유럽에서 나중에 계몽이 이루어지고 난 뒤입니다. 그게 바로 1650년경 무렵부터 전후해서 1800년대까지 이루어진, 이른바 유럽의 계몽시대입니다. 이때야 비로소 또 이제 이 얘기를 다시 하게 되는데요. 어떤 걸 통해서냐면 인간이 자신의 지성으로 사물이 가지고 있는 본성을 꿰뚫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지성으로 그 본질을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게 바로 이 시대입니다.
우리 삶에 또는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과의 관계가, 활동이, 과정이 어떤가, 변화가 어떤가, 라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우리가 이런 식으로 우리의 지성을 활용해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그런 노력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있어. 저기 다른 종교나 신학이 우리에게 주는 그런 법칙이 아니라 직접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한 것의 근간은 바로 자유의 관념이에요. 자유가 있어야, 자유를 기본으로 해야 세계에 대한 또는 세계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무언가 다른 관념 혹은 이해 같은 것들을 갖습니다. 나 자신이 거기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혹은 내가 그것을 잘 의식하는, 스스로가, 누가 가르쳐줘서가 아니라, 던져주는 대로가 아니라 나 스스로가 의식하는 나와 세계와의 관계를 내가 가져올 수 있는 자유가 있어요.
그리고 이러한 자기 자신이 스스로 나서서 나와 세계와의 관계를 파악해낼 수 있다고 하는 이 자유와 관련된 의식은 바로 사회적인 의식 같은 것들로 바뀝니다. 말하자면 이런 거죠.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까 내가 그런 사고방식의 근간이 자유에 관한 관념이었어요. 그런데 자유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세상을 다시 보게 되는 거예요. ‘내 옆에 있는 그 누군가는 왜 노예처럼 구별해야 되지?’ ‘나는 영주가 시키는 대로 내 밥벌이하기도 바쁜데 왜 영주의 밭을 갈아야 되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이런 것도 있습니다. ‘재판관이 나에 대해서 왜 그런 판결을 내리지?’ ‘내가 그 원인을 좀 따져봐야 되겠어’ 이렇고 나서게 된 겁니다. 이때 비로소 그런 식으로 해서 바로 인권이라든지, 인간의 자유라든지, 선천적인 혹은 근본적인 자유라든지, 사회적인 자유에 대해서 생각하는 첫 번째 씨앗 같은 것들이 그때 발아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리고 알렉산더 포프라는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요. 이게 굉장히 유명한 말이에요. 한번 들어보시죠.
“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속에 숨겨져 있었다. 신이 ‘뉴턴이여 있으라!’라고 하자 모든 것이 밝아졌다.”
“Nature and Nature's laws lay hid in night:
God said, Let Newton be! and all was light.”
― Alexander Pope
옛날에 그리스도 교회 성경에는 이렇게 써 있잖아요. “빛이 있으라”라고 돼 있잖아요. 그런데 이제 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저 깜깜한 암흑 속에 있는데 신이 드디어 말합니다. 뉴턴이 있으라. 그랬더니 빛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 얘기하고 다르잖아요. 거기서는 빛이 있으라, 그렇게 말씀하시니 빛이 생겼다, 라고 얘기하잖아요. 근데 여기서는 뉴턴이 있으라, 그러자 빛이 생겼다, 이렇게 얘기한 거예요. 굉장히 재미있는 그런 표현이죠. 이게 바로 그런 사고방식의 변화 같은 걸 보여주는 거죠. 그러니까 그 어떤 빛이 심적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비추거나 주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자신의 지적인 능력으로 뭔가를 관찰하고 초자연적인 것을 발견하는 그것, 그걸 통해서 내가 뭔가 정신적인 빛 같은 것이 우리 안에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자유를 기반으로 해서 말입니다.
인식의 삶이라는 것 혹은 인식의 활동이라는 것은 빛의 활동, 빛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아까 말씀드린 그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나오는 것처럼 이제 드디어 빛을 발견하고 그것을 내가 들여다 똑바로 볼 수 있느냐, 인정할 수 있느냐 아니냐, 그 문제처럼 이제 계몽시대에, 그 이후에 비로소 자기 자신이 이렇게 확인할 수 있는 그 정신적인 빛 같은 것들에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이런 계몽시대의 자유를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인식 능력 같은 것들, 그게 사회적으로까지 가잖아요. 근데 그것에 대해서 반발 혹은 반대의 운동 혹은 정신적인 움직임 같은 것들이 일어나는데 그게 독일의 관념론이에요.
어떤 철학자들에 의해서 우리가 관념론 또는 관념 철학이라고 하는 독일의 이러한 계몽과 반대되는 이런 사조가 생겼냐 하면, 대표적으로 피히테라는 철학자가 있죠. 우리나라에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도덕 윤리 체계 등장하기는 하는데요. ‘독일 국민에게 고함’ 이런 것들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사실은 슈타이너에게 영향을 많이 미쳤어요. 괴테처럼 그만큼은 아니지만 슈타이너는 이 피히테를 많이 인용합니다. 그런데 피히테는 거꾸로 이렇게 얘기를 해요. 계몽시대의 그런 자유를 기반으로 하는 인식 같은 것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이제 접근하게 된 인간의 그러한 경향, 즉 계몽시대의 철학 혹은 인간 정신의 사조, 사고방식 같은 것들이 놓친 게 있다. 그게 뭐냐 하면 정신, 즉 자연 안에 있는 정신적인 것을 꿰뚫어보는 능력 혹은 거기에 물을 주는 능력 같은 것들이다, 라고 거꾸로 얘기를 해요.
물론 이 독일 관념론 또는 관념 철학에는 어두운 면도 있습니다. 그것과 관련돼서 수많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드리운 그림자가 있어요. 그리고 이러한 어두운 부분 때문에, 관념론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측면 때문에 또다시 관념론을 반대하는, 관념 철학에 반대되는 사조 같은 게 생겼거든요. 그게 물질주의 또는 유물론입니다. 이런 계몽주의 시대의 자유를 근간으로 하는 인간 인식의 능력 같은 것들에 대한 신뢰에 반대하는, 그것과 다른 정반대 이야기를 하는 독일의 관념 철학이 있고, 또 그 관념 철학의 어두운 부분 때문에 다시 그것에 반대하는 사조가 생긴 게 물질주의거든요.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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