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인지학은 종교인가 - 엘마르 슈뢰더 (7) 본문
자연 안에는 수많은 활동들이 있습니다. 그런 활동들은 우리가 귀나 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각 기관으로 얼마든지 관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하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그런 눈, 귀 같은 것들이 있잖아요. 우리는 그런 것들을 지각하고 난 뒤에, 인식하고 난 뒤에 이른바 형성의 법칙 같은 것들을 정립해서 말합니다. 여기에 인간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종류의 동물들, 거기에 작용하는 뭔가 보편적인 형성의 법칙 같은 것들이 있지 않을까, 하고 한번 살펴보죠.
보편적인 형성의 법칙이라는 것은 개체나 종은 다 다른데 거기에 공통되게 작용하는 형성의 힘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 보편적인 법칙들, 즉 형성의 힘들이 그것만 작용해서 이런 여러 가지 다양한 동물들이 성장하고 어떤 형태들이 만들어지느냐 하면 그건 아니고요. 그것을 조정하고 거기에 다른 모습, 변화 혹은 변경 같은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다른 외적인 힘들이 있습니다.
인간을 비롯해서 많은 포유류 혹은 동물의 두개골 모양을 봐도 그렇습니다. 실제로 포유류들이 가지고 있는 그 두개골은 각각의 뼈의 숫자를 세 보면 다 똑같아요. 그런데 뭔가 거기에 숫자라든지 구조 같은 데서 어긋나는 것, 특별한 게 하나 있으면 즉시 그게 뭔지 살펴봐야 할 거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기본적으로 어떤 형성의 법칙들이 있다, 라고 생각하고 거기서 튀는 것들은 그게 뭐에 의한 것이지, 라고 고민하게 된 건 괴테가 처음이에요. 그것이 괴테의 업적이에요.
그런 형성의 법칙과 관련된 사례들을 한번 이렇게 나열해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자연을 관찰하는 사람으로서 그 자연에 존재하는 법칙성 같은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걸 들여다보고 판단하고 잘 알게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례들이에요. 이런 자연 관찰 방법 혹은 자연과학적인 방법에서 법칙성을 끌어내는 선구자는 의외로 문학가인 괴테였어요. 그리고 이러한 괴테의 방법론은 사실 루돌프 슈타이너에게 굉장히 큰 영향을 미쳤어요. 루돌프 슈타이너는 괴테에 처음부터 많이 의존했죠.
그런데 이렇게 감각적이고 지상적인, 물질적인, 우리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이 세상이 사실은 영원한 것, 정신적인 것 혹은 볼 수 없는 것, 초자연적인 것들의 어떤 발현이다, 그러니까 그것 자체가 그냥 처음부터 있는 게 아니라 그 뒤에는 다른 어떤 정신적인 것 혹은 초자연적인 것인 것이 있다, 라는 이 사고 방식은 굉장히 오래된 생각이에요. 사실 우리는 이렇게 가시적이고 자연적인 세계와 초자연적이고 비가시적인 세계, 그 두 세계를 모두 경험하고 가지고 살아온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 안에서 철학자의 관심 혹은 과제는요. 언제든지 이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이고 정신적인, 고차적인 세계, 이 둘을 어떻게 조화롭게 연결시킬까, 즉 이걸 어떻게 하면 인간이 두 개를 다 이해하게 만들까, 그게 바로 철학자들의 과제였죠. 그걸 잘 보여주는 게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플라톤입니다. 2500년 전에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이야기한 동굴의 비유였습니다. 플라톤이 그의 책에서 이야기한 동굴의 비유를 그림으로 그리면 바로 이거예요.
사람은 일상생활을 하면서 많은 현실적인 일상적인 경험들을 합니다. 자기 일상적인 경험에만 묶여 있는 사람들, 그게 바로 저 그림의 왼쪽 아래에 있는 저기 커다란 평행봉 같은 것 사람들이 꽁꽁 묶여 있어요. 그리고 그 앞에 있는 뭔가를 봅니다. 그 벽에 비친 그림자 같은 것만 보는 거예요. 그런데 한쪽에는, 예를 들어서 말도 있고 그 옆에는 개나 여우처럼 보이는 그런 동물들이 있어요. 그래서 그걸 손으로 가리킵니다. 그걸 보면서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무엇이다, 라고 판단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판단으로 만족해요.
그런데 실제로 동굴 안에서 묶여 있는 상태로 있는 그 사람들이 현실이라고 보는 것은 실질적인 것의 그림자에 불과해요. 그림자가 벽에 투영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거기 앞에 저런 인형들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왜 그림자극 같은 거 하잖아요. 그 인형들이 사람들이 모르는 벽에 위에 서 있고 거기에 빛이 비춰서 그 모습들이 벽에 투영된 거죠. 동굴 안에 저 커다란 횃불 화로 같은 게 있어서 불이 붙어 있습니다. 그 빛이 동굴 벽에 저런 그림자들을 만들어냅니다.
플라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저 동굴 안쪽에 묶여 있는 사람들처럼 이른바 실재가 벽에 그림자로 투영됐을 뿐인데 그것을 보고 만족한다. 하지만 저것이 실재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중에 좀 별종들이 있죠. 어느 날 그중에 몇 사람이 동굴 바깥으로 뛰쳐나갔어요. 꼭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그것을 실재라고 믿어오던 그 사실에 만족하지 않고요.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라고 뛰쳐나갑니다.
저 두 사람은요. 그림에서 보다시피 저 몸짓 같은 데서 우리가 느끼다시피 밖으로 나왔어요. 그런데 나가 보니까 그 빛에 압도당합니다. 그러니까 저기 빛의 원인이 되는 그것이 얼마나 밝은 것인지 깜짝 놀라요. 그것이 바로 인식의 빛인데, 무엇인가를 우리가 정말로 올바르게 알게 되도록 만드는 빛인데, 그 빛은 너무 강해서 그리고 너무 놀라워서 그것을 감당하기가 좀 힘들어요. 똑바로 잘 못 쳐다보고 눈을 감게 됩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요.
플라톤은 훌륭한 사람들은 다 철학자라고 얘기한 사람인데요, 그렇게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는 그 인식의 빛을 견디는 사람이 누구냐? 바로 철학자들이라고 얘기했어요. 그래서 플라톤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인식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우리가 아주 관념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 지상에 있는 이런 사물들의 원형 같은 것들이 관념적으로 어딘가에 있다, 라고 생각했어요. 그 이데아, 다시 말해 그 관념은 사물 안에 들어 있다, 거기에 되비추어있다, 라고 이야기했어요.
우리가 그것을 알려면 나의 시선을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그 현실적인 사물에다가 고정시키지 말고, 거기에서 빠져나와서 그 사물의 원형이 무엇인가, 라고 고민을 해야 돼요. 그렇게 해주는 힘이 바로 사고의 힘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뭔가 훈련도 필요하고 수련도 필요하고요. 그리고 플라톤은 인간에게 그러한, 그게 수련이 필요하든 훈련이 필요하든 간에 어쨌든 간에, 그런 만물 각각의 원형 혹은 원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고차적 비물질적 원상(이데아)은 우리가 알 수 있다, 라고 얘기했어요.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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