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인지학은 종교인가 - 엘마르 슈뢰더 (5) 본문
인지학과 관련하여 활동을 하거나 인지학을 깊이 연구한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루돌프 슈타이너에 기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슈타이너를 불러들이지 않습니다. 슈타이너가 얘기한 그런 방법들을 끌어들이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인지학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내용들은 그 뒤를 캐물을 수 없는 것이니 믿어야 한다는 식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그런 내용이 무엇인지, 그 근거가 무엇인지를 증거를 대고 확인하고 그럴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인지학입니다.
이와는 달리 극명하게 차이가 있는 것은 바로 그 점이죠. 모든 종교에는 뭔가 전달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전달자도 있고요. 그것을 계시라고 하기도 하고요. 그 계시의 내용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합니다. 믿거나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더 이상 요구되지 않습니다. 그 외의 방법들은 요구되지 않고 금지됩니다. 계시된 것에 대해 “근거가 뭐야?”라고 캐물으면 화형을 당하기도 했죠.
말하자면 인지학은 인식으로 가는 길 위에 있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개인이 그 경로를 통해서, 어떤 인식을 얻기 위해서 하는 노력, 이것을 의미합니다. 슈타이너는 우선 이렇게 얘기합니다. “종교란 그 근본이 정신적인 것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경로와 같은 것이었다. 정신적인 세계를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경로 혹은 내용들이었는데 그 안에는 계시의 내용, 완전히 우리에게 드러나 있는 혹은 드러나서 전달되는 그것으로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전혀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일종의 종교적인 문화 같은 것들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문화라는 형태로 종교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 문화 안에서는 종교적으로 우리가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내용들도 있었고 그다음에 그것과 상관없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평범하게 알고 있는 내용 말고 문화적인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뒤를 캐묻지 않고 수용해야 하는 그런 내용들이 섞여 있었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흘러서 옛날의 그 전통 종교들이 지금 현재에도 이 관계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문화 같은 것들에 남아 있는 예 중 하나가 뭐냐 하면, 바로 위계질서 같은 것들이에요. 그러니까 그 위계질서 안에서 뭔가 이 계시의 내용을 직접 봤거나 그것을 이해했거나 거기에 직접 본인이 가지고 있거나 참여했다고 하는 상위 계급이 있고, 그렇지 못하고 무조건 뒤를 캐묻지 않고 믿어야 하는 하위 계급이 있어요. 이른바 그런 위계질서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현대인의 경우에는 옛날에 계시라고 했던 것, 즉 정신적인 깨달음 혹은 실체 같은 것들에 도달할 능력이 있고, 그것을 위해서 가고자 하는 성향 같은 것들은 모든 사람에게 다 있는데 말이죠.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다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계시의 내용이라면, 즉 우리에게 숨겨진 채로 전달됐는데 그것의 뒤를 다 캘 수 있다면 그것은 계시라기보다는 인식 아닐까, 라고 슈타이너가 이야기를 하는 거죠.
다른 기회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슈타이너가 훨씬 더 극명하게 혹은 날카롭게 이야기합니다. 이 이야기를 할 때 슈타이너의 마음이 굉장히 좀 격해졌어요. 슈타이너는 20세기 초까지 살았잖아요. 오늘날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상태 같은 걸 보면 이 사람들이 오늘날의 사람들이 아니라 옛날 사람들, 고대인이 하는 것 혹은 그 상태에 있는 것 같다라고 슈타이너는 말했습니다. 각 개인이 정신적인 것을 스스로 얻어내려고 노력하는 그런 현대인의 경향 또는 현대인이 원하는 것, 그게 아니라 마치 옛날 고대 사람이 하던 것하고 똑같은 걸 하고 있다는 느낌이 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슈타이너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얘기를 하는 거죠.
그런 경우에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아직 인지학적인 그 길에 있지 않다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물론 이것은 슈타이너가 굉장히 격렬하게 얘기한 거여서 지금 진지하게 받아들이실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인지학과 관련해서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에게는 신체가 있습니다. 그다음으로는 영혼이 있죠. 즉, 내면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적 움직임 혹은 감정이라든지, 뭔가 영혼 내면의 활동 상태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정신이라는 측면 혹은 정신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정신과 관련해서는 우리의 사고와 연결돼 있죠. 우리의 사고라는 것은 말하지 않았는데 말한 것으로 만드는 것, 우리 앞에서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 그게 뭐다, 라고 내가 내면에서 떠올리는 것, 확인하는 것, 이게 사고예요. 말하자면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됐어”라고 얘기하잖아요. 그리고 자기가 가진 생각을 언어로 표현합니다. 그러면 뭔가가 이제 드러납니다. 그 대상이 우리 눈앞에,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슈타이너는 사고의 우주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우리가 표상이란 말을 쓰잖아요. 표상(Vorstellung)이란 말은 어떤 그림이 앞에 떠 있다는 거잖아요. “사고의 우주가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게 바로 이런 자연 세계, 현실 세계에 대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게 바로 순수히 정신적인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차별 없이, 누구라도 그 사고의 우주 혹은 우주라는 사고 안에 한 부분으로 참여하거나 한 부분을 가질 수 있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런 사고의 우주 혹은 우주적 사고 안에서 사람들은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어요. 창조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이 만들어내는 그런 그 사고의 우주 혹은 우주적 사고 안에서 그 일부분에 참여하고 거기서 그걸 바탕으로 해서 뭔가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 앞에, 현재 지금 여기에, 우리 앞에 놓이게 된다, 라고 얘기합니다. 물론 나 자신은 거기에 속해 있거나 그것과 하나가 되는 건 아니죠.
예를 들어서 바다라는 게 있잖아요. 그러면 바다에서는 우리가 물을 이렇게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사고는 그런 사고라는 우주, 거대한 정신 자체 안에서, 거기에서 그걸 근거로 해서 가져오는 거죠. 거기에서는 뭔가 구체적으로 나 자신이, 내가 뭘 이렇게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사고라는 우주 안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고는 어디에나 있고 정말 곳곳에 보편적으로 편재하는 거예요.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작용, 영향 같은 것을 미칩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미치는 작용 또는 사고의 힘이라고 얘기하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아까 얘기한 인간이 뭔가 활동하게 된다, 영향을 미치거나 뭔가 뭔가를 하게 된다, 라는 것의 근원인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전제가 없으면 우리가 무엇을 한다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그런 정신적인 것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어떤 존재, 정신적인 것과 함께하는, 그것을 근거로 하는 존재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고, 그럴지 안 그럴지 모른다가 아니라 그럴 수 있다, 가능하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정신 또는 정신적인 것이 무엇이냐, 내가 그걸 다 증명하고 난 뒤에 내 앞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적인 세계 혹은 우주 정신 혹은 정신의 우주 같은 것들은 우리 앞에 이미 있어요.
여러분들을 휴식시간으로 잠시 보내드리겠습니다.
(이어서)
'인지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지학은 종교인가 - 엘마르 슈뢰더 (7) (0) | 2024.11.06 |
---|---|
인지학은 종교인가 - 엘마르 슈뢰더 (6) (0) | 2024.10.31 |
인지학은 종교인가 - 엘마르 슈뢰더 (4) (0) | 2024.10.10 |
발도르프학교라는 새로운 공동체 (0) | 2024.10.05 |
인지학은 종교인가 - 엘마르 슈뢰더 (3) (0) | 2024.1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