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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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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학

인지학은 종교인가 - 엘마르 슈뢰더 (4)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4. 10. 10. 21:54

그런데 여기에 더해서요. 괴테 이야기를 한번 들어볼 필요가 있어요. 뭐라고 얘기했냐면 학문을 연구하거나 아니면 예술을 하는 사람, 그 사람들은 종교가 있는 사람이다, 라고 얘기해요. 굉장히 이상한, 묘한, 그런 좀 듣기 어려운 그런 얘기예요. 그런데 또 거기에 멈추지 않고요. 말하자면 자연과학이나 학문을 하는 사람도 종교를 가진 사람이다, 라고 하면서 뭐라고 덧붙이냐 하면요. 그 둘 중에 하나라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종교인이 아니다, 라고 얘기를 해요.

 

예술 학문 이거를 하거나 자기 스스로가 뭔가 이렇게 예술적인 걸 가지고 있거나 지식이 많거나 한 건 그 사람은 종교인인데 그런데 이건 정말로 좀 특이한 특별한 그런 언급이에요. 이걸 이게 정말로 뭘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우리가 더듬어서 느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일단 우리가 오늘날 종교라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라는 이야기해 볼까요?

 

Religion이라는 단어를 한번 이렇게 풀어헤쳐 보죠. 그래서 그 어원을 한번 따라가 보죠. 이 글자 자체가 앞에 한 부분하고 뒤에 또 한 부분인데, 그거는 거꾸로 즉 지나간 것 혹은 무엇인가의 원천 이런 것들을 향해서 나를 연결한다는 뜻이에요. 앞에 접두사하고 뒤에 붙은 말을 합치면 예를 들어서, 자기가 심각하게 자기 안에서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천천히 숙고한다, 라는 것이 포함돼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종교 안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이 되는 개념은 바로 믿음이죠. 신앙입니다.

 

그런데 신앙이란, 믿음이란 그것의 근거 같은 것을 캐물을 수 없는 그 어떤 것이에요. 그러니까 최종적인 것이에요. 그 뒤에 뭐가 있는 게 아니라 신앙의 대상 자체가 그냥 최종인 거예요. 신앙의 내용 같은 것들을 이야기한 사람, 우리에게 전달한 사람, 그들에게로 일단 먼저 가봐야 되겠죠. 그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세계 종교의 창시자들이에요. 그런데 이런 신앙의 창시자는요. 어느 한 때에만 있었다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게 아니라 세월이 흐르면서 역사 인류 역사 안에서 계속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말씀드린 걸 요약하자면 이런 거예요. 신앙이 아닌 종교의 핵심적인 내용은 신앙은 더 이상 뒤를 물을 수 없는 것, 추구할 수 없는 것, 그냥 내가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말 자체를 가만히 들으면요. 무엇인가를 내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이런 말은 현대인으로서는 살짝 좀 저항감. 거부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하는 말입니다. 사춘기를 지나는 아들 보고 있으면요. 그거 많이 느끼시잖아요. 걔네들은 우리가 제시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아요. 일단 저항합니다. 그런데 사실 인간은요. 살아가는 동안에 어느 부분은 계속해서 사춘기를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뒤를 묻고 싶다, 신앙이라고, 최종적인 것이라고 우리한테 던져지는데 내가 그냥 믿으면 된다는 거, 믿어야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뒤를 묻고 싶다든지 그 뒤를 추적하고 싶다든지 하는 그 노력 혹은 그것 자체, 그러한 그 생각 자체는요. 그것과 연결된 개념이 하나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자유입니다.

 

오늘날에는 종교적인 신념 같은 것을 인지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숫자가 사실은 근본적으로 조금씩 줄고 있어요. 현대가 늘 그랬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각각의 개인이 그런 식으로 내가 그냥 받아들이고 뒤를 캐묻지 않는다, 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현대인들에게는 조금 거리감이 생기는 것이구나, 그런 경향이 점점 심해지고 있구나, 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사람들에게서 자유에 대한 욕구 같은 것들이 커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점점 더 그런 자유에 대한 욕구에 의해서 사람들이 특정한 종교를 믿는, 혹은 그 신앙 고백 안으로 들어가기를 꺼리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거죠. 그런데 중국 같은 경우에는 조금 경우가 다릅니다. 이렇게 사람들 안에서 자유에 대한 욕구가 커져서 무신론자나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의 숫자가 많아진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건 뭔가 위에서부터 만들어낸 것이에요. 그렇게 만들어진 자유라는 것은 혹은 만들어진 종교성의 형태 같은 것들은 자유와는 전혀 상관이 없죠.

 

그런데 종교라는 말에, Religion이라고 알고 있는 그 단어 얘기하는 그 말에 숨어 있는, 무엇인가 나의 본질하고 그 무엇인가를 다시 연결한다는 그 단어의 원래 뜻, 그것에서 숨어 있는 거기에 들어 있는 뭔가가 있어요.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현대인이 묻습니다. 나하고 무엇을 다시 연결한다는 건 무엇에서 떨어졌으니까 다시 연결한다는 뜻 아니겠어요? 내가 무엇에서 떨어졌고 무엇에 다시 연결한다는 것인가? 예를 들어서, 옛날에 그런 통속적인 사람들한테 통용되던, 옛날의 관념이나 혹은 윤리나 그런 것들, 사고 같은 것들하고 지금의 나를 다시 연결한다고, 무엇인가에 나를 다시 연결한다는 게 그렇다면 도대체 뭘 의미하는 거지, 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종교라는 말에는 세상에 대한 관점, 이해 같은 것들이 늘 같이 따라다녀요. 세상을 보는 눈,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라는 것, 물론 여기에는 그 세계관 또는 세상을 보는 관점이라는 것은 과학 혹은 학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종교에서는 어떤 점에서냐 하면 그런 학문이나 과학적인 그런 것에 대한 세계관이 아니라 훨씬 윤리적이거나 도덕과 관련된 그러한 관점이에요. 바로 이 점에서, 종교와 관련된, 종교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 도덕, 윤리와 관련돼 있다, 라는 그 점에서 슈타이너의 이야기가 귀에 다시 한 번 들립니다.


슈타이너는 뭐라고 얘기하냐 하면 인지학은 도덕을 제시하지 않는다. 도덕을 변화시킬 뿐이다.”라고 얘기해요. 굉장히 중요한 얘기예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슈타이너는 인지학이 과학이다, 라고 얘기해요. 어떤 과학이냐, 정신에 관한 과학이다, 즉 정신과학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자리에서는 인지학은 인식의 통로다, 인식의 경로 혹은 길이다, 인식으로 이루는 길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말하자면 종교에 대해 이야기할 때와는 정반대의 이야기예요. 뭐를 인식하느냐, 인간 안에 있는 정신적인 것, 정신적인 내용 혹은 정신 자체를 내가 인지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이 정신과학이라는 말, 또는 내 안에 있는 그 정신을 인식한다는 이 말에는 둘이서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단어 두 개가 같이 들어 있어요. 그러니까 정신적인 것, 정신이라는 것하고 그다음에 뭔가를 알아낸다, 인식이라는 것입니다. 인식이라는 것, 무엇인가를 알아낸다는 것은 모두 각자가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무엇인가를, 어떤 노력을 통해서 얻어야 하는 결과 같은 것이에요. 예를 들어서 무엇인가를 전달하고자 할 때도 마찬가지고요. 결국 이 정신과학이라는 말에 들어 있는 것 중에서 중요한 본질은 개인, 개별자에게 호소하는 거예요.

 

그 첫 번째 내용이 개인, 개별자라고 하는 것은 개인, 개별자가 인지학을 통해서 정신을 파악할 수 있다, 인식할 수 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지학에는 신앙과 관련된 어떤 창시 혹은 창시를 주도한 사람, 이런 경우는 이런 존재는 없습니다. 말하자면 루돌프 슈타이너라는 사람은 인지학의 창시자라고 얘기하지만 그 사람은 새로이 나타난 두 번째 보살, 붓다라든지 깨달은 사람이라든지 아니면 뭔가 그런 종교적인 창시자는 아닌 거죠. 그냥 다만 방법을 제시한 사람, 그리고 자극을 준 사람에 불과합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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