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인지학은 종교인가 - 엘마르 슈뢰더 (9) 본문
이런 물질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이야기가 자연과학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많이 나왔는데, 이때 대표적으로 우리가 예를 들 수 있는 게 에밀 뒤부아-레몽(Emil du Bois-Reymond; 1818~1896)이라고 하는 물리학자이자 생리학자입니다. 이 사람이 1880년에 베를린 과학아카데미에서 독특한 얘기를 합니다. 그 얘기가 지금까지도 매우 유명합니다. 그리고 슈타이너도 그 얘기를 <교육과 예술>에서 집중적으로 해요. 뒤부아-레몽은 1880년 베를린 과학아카데미에서 과학의 7가지 “세계적 수수께끼”를 열거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1. 물질과 힘의 궁극적 본성
2. 운동의 기원
3. 생명의 기원
4. 자연의 합목적적 성질·효율적 성질
5. 단순한 감각적 성질의 기원·의식의 기원
6. 이성의 기원, 언어의 기원
7. 자유 의지
그는 1, 2, 5번에 대해 “Ignorabimus”(우리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7번에 대해 그는 “Dubitemus”(우리는 의심한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앞으로 영원히 모를 것이다.”라고 얘기합니다. 그게 라틴어로 “이그노라무스 에트 이그노라비무스(Ignoramus et Ignorabimus)”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미래형, 집단적인 미래형이에요.
이 시기에 괴테의 영향도 있고 여러 가지 관념도 있고요. 그런 것에 의해서 뭔가 사고를 통해서 우리가 가장 본질적인 걸 알아낼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천만의 말씀, 연구해 보니까 “나 모르겠어!”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정말 영원히 모를 거야”라는, 이런 인식에 대한 극단적인 불가지론 또는 비관주의 같은 걸 얘기한 거죠.
슈타이너가 <교육과 예술>에서 뒤부아-레이몽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거꾸로 인간에게서 굉장히 긍정적인 면, 비관주의 말고 굉장히 낙관주의적인 면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해 얘기합니다. 뭐냐 하면은 인식을 향한 욕구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욕구가 우리에게 더 커지고 이렇게 뭔가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자신이 계속해서 이야기해 온 인지학이야말로, 인간 안에서 이렇게 내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점점 커지는 이 인식에 대한 인간의 본성적인 욕구에 대한 답이 바로 인지학에 있다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런 인식에 대한 욕구에 상응하는 대답을 내놓는 것이 인지학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인간 안에는 누구에게나 정신적인 것 혹은 더 차원 높은 고차적인 것을 욕구하고 그걸 알기를 원하고 그것을 알 수 있는 가능성 같은 것이 있다, 즉 욕구와 능력 같은 것이 동시에 있다라고 말이죠. 구체적으로는 그런 고차적인 것 혹은 자연을 관찰하고 거기서 인식을 얻어서 정신적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초감각적 기관이 신체 기능처럼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인간이 수련하고 훈련시키면 도달할 수 있다라고 얘기한 거예요. 그러한 수련을 통해서 그야말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댈 수 있는 혹은 나중에 이것 때문에 그랬구나 설명할 수 있는 그런 경로가 있다고 얘기를 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경로 자체에 대해서 이렇게 수련하면, 스스로를 잘 다듬으면, 노력하면 어디까지 갈 수 있다고도 얘기할 수 있고, 그리고 어디까지 갈 수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이 경로가 이렇게 수련을 해왔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낳았구나, 라는 것을 그게 옳았구나, 라는 걸 확인할 수도 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런 수련 그리고 그 가능성 같은 것들은 이미 주어져 있다, 라는 거죠. 그런데 그걸 해나가는 거는 개인의 문제라고 합니다.
인지학적인 인식의 가능성이 인간에게 고차적인, 그런 비물질적인 것까지도 인식할 수 있다, 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는데요, 여기에서 다시 그럼 종교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오늘의 주제인 종교로 돌아가면 얘기가 또 하나 더 있습니다. 아까 처음부터 말씀을 이미 한 번 드렸었어요. 그러니까 인지학에는 사람들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어떤 개념이 하나가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은 그리스도의 본질이라는 게 있어요.
슈타이너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슈타이너가 그리스도 사건 혹은 그리스도라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반드시 처음에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하냐 하면 성서에서 얘기하는 골고타 사건이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라는 인물을 이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못 박아서 죽인 그 사건 말이에요. 성서가 서술하는 그런 예수의 죽음과 관련된 그 골고타 사건, 그 사건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의미, 차원 높은 의미 같은 것은 모든 종교에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다 그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이건 신앙의 표현이기도 한데요. 어느 종교에 속하든 간에, 어느 신앙 집단의 신앙 고백에 속하든 간에, 내가 불교 신자든 그리스도교 신자든 아니면 그 어떤 종류의 신앙적인 내용을 가지고 종교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든 간에 나에게, 나의 그런 종교성에 이 골고타 사건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이죠. 말하자면 이 골고타 사건이라고 얘기하거나 그리스도라고 얘기하는 것은 그것이 이름을 어떻게 붙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무엇에 대해서 종교적인 것을 이야기하고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와 골고타 사건은 의미가 있다, 라고 슈타이너가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골고타 사건이라든지 그리스도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슈타이너는 어느 기회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라는 어떤 인격체가 아니라 그 의미를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는ㅡ 자기를 완전히 버리고 그제서야 얻을 수 있는 인식과 관련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나를 완전히 버리게 만드는 학교 혹은 길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간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그런 자기를 버리는 학교에서 뭔가 수련을 하는 것, 그런 길을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라고 얘기하는데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그 어떤 의미 있는 자극 혹은 동기 같은 것들입니다. 즉 종교성을 향한 동기다, 라고 얘기합니다.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말, 그 의미가 무엇인가 하면 나를 포함해서 이 우주 만물이 가지고 있는 자연의 법칙성 같은 것 안으로 내가 깊이, 온전히 참여해 들어가는 것, 침잠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슈타이너는 이렇게 이야기해온 이른바 종교 혹은 인지학과 관련돼서도, 인간의 종교성이란 무엇인가, 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설명해온 그것의 구체적인 모습은 조금 전에 자기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게 뭘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근데 그것을 이렇게 구체적인 조형물 같은 것들로 표현해 본 적이 있어요.
(이어서)
'인지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크리스마스를 위한 오이리트미 (0) | 2024.12.03 |
---|---|
인지학은 종교인가 - 엘마르 슈뢰더 (8) (0) | 2024.11.12 |
인지학은 종교인가 - 엘마르 슈뢰더 (7) (0) | 2024.11.06 |
인지학은 종교인가 - 엘마르 슈뢰더 (6) (0) | 2024.10.31 |
인지학은 종교인가 - 엘마르 슈뢰더 (5) (0) | 2024.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