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신경증과 자아 (3) - 루돌프 슈타이너 본문
우리가 “의지 문화”라고 부르는 그것이 사실 가장 중요합니다. 제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신경증은 사람들이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 또는 자기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조차 모릅니다. 이것은 아스트랄체에 대한 자아의 통제력이 충분치 않기 때문으로 의지의 약화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알더라도 그것을 실행하지 못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확고한 의지를 갖고 해낼 수 없습니다.
의지를 강화하는 방법이 반드시 소망하는 바를 실현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소망을 이루지 못해도 손해를 보지 않는다면 말이죠. 우리 삶을 돌아볼 때 충족되면 좋겠지만 충족되지 않은 채로 두어도 좋을 수많은 욕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성취하면 여러분은 즐겁겠지만, 그것들 없이도 잘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체계적으로 탐구하다 보면,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의지를 강화한다는 것, 즉 아스트랄체에 대한 자아의 강화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훗날의 삶에서 이러한 수련 과정을 거친다면, 어린 시절의 교육에서 소홀히 했던 많은 것을 만회할 수 있게 됩니다.
방금 설명한 내용을 아동교육에 적용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아버지가 아들이 성취할 수 있는 소망을 거부한다면 아들은 반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반감을 불러오기 때문에 원하는 걸 억누르는 것이 교육적으로 올바른 원칙인지 의심스럽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아이나 학생을 지도하는 사람이 스스로 소망을 억누르고 아이가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특히 첫 7년 주기 동안 어린이에게는 강한 모방 충동이 작용하기 때문에, 어른의 모범을 따르며 자신의 소망을 억누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로써 얻어지는 것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합니다. 인지학에 대한 관심을 통해 우리의 사고가 올바른 방향으로 향할 때, 우리는 정신과학을 이론으로뿐 아니라 우리를 떠받쳐주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삶의 지혜로 알게 됩니다.
아스트랄체에 대한 자아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최근 두 차례 가졌던 강의에서 제시되었습니다.* 두 번의 강의에서 저는 하나의 문제에 대한 찬성 의견뿐 아니라 반대 의견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유연성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한쪽 면만을 봅니다. 하지만 삶에서 이런 식으로 다뤄야 할 문제는 결코 없습니다. 찬반은 늘 존재하지요. 우리는 어떤 사안에 대해 항상 찬성과 반대를 함께 나타내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좋습니다. 인간의 허영심과 이기심은 대부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선호합니다. 따라서 반대하는 이유를 나열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 1912년 1월 8일(“How to Disprove Theosophy”), 1912년 1월 10일(“How to Prove Theosophy”).
사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기를 너무나도 원하기 때문에 찬성할 만한 이유가 많은 일을 하고 반대할 만한 이유가 많은 일을 무시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여기에는 인정해야 할 불편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거의 모든 일에는 언제나 반대의 이유가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사실 그들의 생각만큼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은 보편적 진리이자 진실이지만, 만사에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고려하는 것이 습관화될 때 비로소 효과적인 진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결과는 한 가지 예를 통해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의지가 너무 약해서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일을 처리하도록 내버려두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스스로 행동해야 할 이유를 찾기보다, 가만히 앉아서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즐겨 묻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리고자 하는 내용도 찬성뿐 아니라 반대의 이유 역시 많은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의지가 약한 어떤 사람이 다른 두 사람과 마주하고 있다고 해 봅시다. 한 사람이 “이렇게 해”라고 말합니다. 다른 한 명은 “하지 마”라고 말합니다. 의지가 약한 사람에게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승자가 되겠지요. 의지가 약한 사람이 내린 “예” 또는 “아니오”라는 결정은, 의지력이 더 큰 조언자에 의해 내려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현상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조언하는 두 사람 없이 오로지 나 혼자서 결정해야 한다고 해 봅시다. “예” 또는 “아니오”의 이유를 내 안에서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라고 답한 뒤, 나가서 해야 할 일을 한다고 해 보겠습니다. 이 “예”라는 답변은 내가 나에게 말한 것이기 때문에, 내 안에서 강한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이렇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 전에 자아를 의식 속에 둘 때, 결정을 내리는 방식만으로도 강함이 약함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식으로 아스트랄체에 대한 자아의 통제력이 크게 강화되기 때문입니다. 방금 설명한 내용을 실행하면 의지를 강화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두운 측면도 있습니다. 하나의 사안을 두고 찬성과 반대에 대한 이유들을 효력 있게 주장한 다음, 이제 이런저런 이유의 영향을 받아 행동하는 대신 태만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의지는 강화되지 않고 약화될 뿐입니다. 겉으로는 “아니오”의 방향을 따랐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저 게으르고 안이했을 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무기력하고 지쳤다고 느낀다면, 선택을 미루는 것이 더 낫습니다. 내적으로 강해져 영혼 앞에 놓인 최종적인 찬성과 반대를 실제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러한 일들이 적절한 때에 영혼 앞에 제시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아스트랄체에 대한 자아의 통제력은 또한, 우리와 주변 세계 사이에 장애물을 만드는 모든 것을 영혼 안에서 몰아낼 때 강화됩니다. 그러나 인지학을 따르는 사람은 정당한 비판이 객관적이라면 그러한 비판을 억눌러야 한다고 느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나쁜 것을 좋게 말하는 것은 쉽지만 나약한 행위이므로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객관적으로 비판해야 할 것과 단순히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 때문에 격분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것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더 많이 독립시킬수록 더욱 좋습니다. 따라서 주변 사람들을 그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분이 불쾌하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행위를 하지 않을 때 우리의 자아는 강화됩니다. 다시 말해, 기분이 불쾌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단념하고, 문제로 보이는 것만 판단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에서 적용하기가 정말로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거짓말을 했을 때 반감이 올라오는 걸 억누르는 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거짓말을 알아차렸다고 하더라도 즉시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는지 날마다 관찰하고, 그가 우리에게 한 일보다는 이 관찰이 우리의 판단 근거가 되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사람 내면에 있는 것을 고려하게 되고, 그의 행동이 여러분에게 미친 영향을 판단 근거로 삼지 않게 됩니다. 그 사람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의 개인적 관계는 무시해야 합니다.
자아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내리는 판단의 상당 부분을 자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숙고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열 번 중에 한 번만 우리 영혼에서 그렇게 판단하는 경험을 한다면 충분할 것입니다. 열 번 중 아홉 번은 판단내리지 않는다 해도 우리의 삶은 결코 피해를 보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여기에서 제시한 것들은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이러한 문제들을 고려하는 것 또한 지금 우리의 과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목적이 있는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삶 그 자체를 보통의 경우와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아플 때마다 약국에 가서 약을 사오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질병에 덜 취약해지고 덜 괴로운 방식으로 삶을 꾸려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스트랄체에 대한 자아의 영향력, 에테르체에 대한 아스트랄체의 영향력, 그리고 물질체에 대한 에테르체의 영향력을 강화할 때 사람들은 덜 괴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자기교육과 ‘아동교육에 미치는 영향력’은 우리의 근본적인 인지학적 신념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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