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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적 자유주의의 한계와 근대적 세계관 - 이영록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2. 8. 14. 11:06

서구적 자유주의의 한계와 근대적 세계관

 

이영록 (법학박사)

조선대학교 법학과 교수

 

 

그렇다면 서구적 자유주의가 코로나19 사태의 대응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서구적 자유주의, 그리고 그와 결합한 근대법의 형식을 근원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근대적 세계관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근대적 세계관이 가정한 세계와 코로나19 사태가 보여준 세계의 실제가 다른 데서 그 근본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근대적 세계관은 갈릴레이, 베이컨, 데카르트, 뉴튼, 로크를 통해 완성된 자연과학적 기계적 세계관이다.* 기계적 세계관은 근대가 지속되는 동안 한때는 거센 반발에 부딪치기도 했고, 어느 정도는 퇴색의 과정을 겪어야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서구 근대화의 토대가 된 인식틀로서 지금까지도 여전히 우리의 사고 형식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상당한 정도로 규정하고 있다.

 

* 프리초프 카프라ㆍ우고 마테이 지음 / 박태현ㆍ김영준 옮김, 「최후의 전환」, 경희대대학교 출판문 화원, 2019, 29-30면. 기계적 세계관을 정리하는 데는 이 책의 도움이 컸다. 

 

기계적 세계관에 따르면, 전체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부분의 총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전체는 그 구성 요소들을 잘 알면 알수록 더 잘 그리고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의 복잡한 구조와 성격을 최소 단위로 분해하여 단순화한다. 이를 바탕으로 이들이 결합하여 구성하는 다음 단계의 독자적 단위를 이해한다. 이런 방식으로 부분을 종합해 감으로써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근대성의 업적이 전체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들을 식별하고, 단위 부분의 성질과 그 결합구조를 이해하는 데 집중한 것은 당연했다. 기계적 세계관의 토대를 제공한 물리학이 분자에서 원자, 그리고 아원자로 끊임없이 물질의 최소 단위를 찾고자 연구를 이어온 것은 기계적 세계관의 관심사를 잘 보여주는 표본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계적 세계관이 가정하는 바에 따르면, 각 부분 단위들의 결합은 그 단위 요소들의 실체를 바꾸지 않는다. 각 부분 단위들은 각기 고유 성질을 유지하면서, 그 성질에 따라 전체에 결합한다. 따라서 전체의 기능은 전적으로 부분들의 고유한 작동에 의존한다. 인식적 차원에서 이런 전제는 목표를 위해 인간의 조작적 개입을 의미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기술에 새로운 방식을 창출하였다. 만일 전체 체계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문제가 된 부분을 찾아내어 본래의 기능을 발휘하도록 되돌려 놓음으로써 문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점은 기계적 세계관의 또 다른 가정과 연결된다. 그것은 근대 물리학이 그랬듯이 세계 내 모든 작동은 철저히 인과법칙에 따른다고 전제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론적으로는 모든 인과법칙은 지적 탐구를 통해 인간의 인식 대상이 된다. 따라서 세계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세계 내 모든 인과법칙의 파악으로 가능하며, 인과법칙을 통해 미래에 대한 예측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한 체계의 기능 조작도 인과법칙을 활용함으로써만 목적 달성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이로써 체계는 통제 가능한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인과법칙의 인식은 관찰 및 측정의 방법으로 가능하며, 또한 검증된다. 따라서 관찰이 가능한 외적 사실만이 체계의 범주에 포함된다. 다시 말해서 관찰이 불가능한 내용은 체계 탐구의 대상에서 의식적으로 혹은 은연중 제외된다. 이를 통해 세계 또는 체계는 수학적 확실성을 가지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자연과학에서 시작된 기계적 세계관은 그 눈부신 성과에 힘입어 곧 인문학과 사회과학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법학은 아마도 기계적 세계관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분야일 것이다. 특히 법이념 차원에서 개인적 자유주의와 법형식 차원에서의 법의 성격 그 자체에서 기계적 체계론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두 차원의 결합을 통해 법은 근대 사회를 형성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물론 서구의 자유주의가 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 자유주의 형태 중에 기계적 세계관에 가장 전형적인 것은 아마도 로크(J. Locke)적 자유주의가 될 것이다. 그러나 기계적 세계관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한, 그 한도에서는 모든 자유주의에 이 글의 서술이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구의 자유주의가 갖는 근대적 특성은 무엇보다도 개인이 체계의 중심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이제 개인의 고유한 성질은 법적인 측면에서 자유로운 이성적 존재로 파악된다.** 이로부터 근대적 소유권이 자유주의와 결합한다. 자유는 자신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물질을 매개하지 않고는 의미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반면에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공유재는 의미가 축소되거나, 최대한 사적 소유권으로 분할된다. 국가 역시 개인들의 자유롭고 이성적인 결합으로 이해된다. 최근에는 이런 형이상학적 성격의 가정을 완화하고자 하는 정치적 자유주의가 주장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정치적 자유주의 역시 정치의 영역에서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이라는 개념 구성에 근거한다는 점에서는 근대의 기계론적 사고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기 어렵다.

 

** 사실 기계적 체계론과 자유주의 사이에는 항상적인 갈등이 존재한다. 체계 내 모든 것이 인과법 칙에 종속한다면, 엄격한 의미에서 자유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데카르트는 물질 과 정신을 구분하는 이분법을 제안함으로써, 기계적 세계관을 자연에 한정하려고 했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측면에서 근대적 세계관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지만, 다른 한편으 로는 확산되어 가는 기계적 세계관과의 충돌을 예정한 것이었다. 그 후 근대 내내 결정론과 자유 의지론의 대결은 오늘날까지도 완전한 해결을 보지 못한 채 이르고 있다. 자유주의를 기초한 로크 역시 자유는 결과적으로 외적 강제 내지 방해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되어(김효명, “결정론 과 자유”, 철학사상 제28조,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2008, 297면), 외적 방해 없이 행한 행위가 정말로 자유롭게 결정된 행위인지에 대한 핵심적인 질문은 피해 간다. 그러나 로크는 외적으로 표 현된 행위만을 법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법을 기계적 체계론에 입각해 구축할 수 있었다. 

 

자유주의의 국가 또는 법은 바로 개인의 자유를 잘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 개인의 자유는 이제 국가(법)의 정당화의 근거가 된다. 이념적으로 모든 개인의 자유가 잘 보장되는 상태가 전체적으로도 이상적인 상태이다. 이런 이상적인 자유의 균형 상태가 깨졌을 때, 혹은 그럴 가능성이 현저할 때, 국가의 법을 통한 개입이 정당화된다. 즉 누군가의 자유가 합리성을 넘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했을 때, 혹은 그럴 위험이 현저할 때, 앞에서 말한 자유주의적 책임과 예방 체계가 작동한다. 그리고 자유의 침해 사실 혹은 그 우려는 인과관계의 확실성에 의해 입증될 것이 요구된다. 이는 체계를 교란한 개인을 인과관계의 확실성에 기초하여 제자리에 위치시킴으로써 체계 전체를 보호하고자 하는 접근 방식이라는 점에서 기계적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기계적 체계론의 영향은 법 자체의 형식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먼저 법적 판단과 관련하여 법적 요건들을 개별화하여 그 각각에 대해 충족 여부를 판단하고, 그 결과로써 법적 효과를 부여하는 방식은 전체를 최소 요소로 분해하여 전체 결론에 도달하려는 전형적인 기계론적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 이 모든 단계에서 ‘예/ 아니오’의 이원적 판단 형식에 따르는 것도 과학적 방법론에 기초한 기계적 세계관과 법체계 사이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기계적 세계관의 영향은 또한 근대법학이 성질에 따른 체계적 분류를 중시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무엇보다도 근대법학은 법을 법 외적인 것으로부터 분리하여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체계로 구축하고자 하였으며, 법체계 내부적으로도 공법과  사법의 구별이라든지, 실체법과 절차법의 구별, 더 세부적으로는 각 법 분과의 구별과 같이 독자의 구조와 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구획을 통해 전체를 이해하려 하였다. 물론 법학의 이런 성격들은 법의 전문화의 길을 열었던 고대 로마법에서도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체계 전체를 설명하는 방법으로 철저하게 관철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였다. 법적 분류만 하더라도 생활세계 또는 현상적 차이에 따른 분류가 아니라, 독자의 원리에 따른 논리적 분류를 시도하고, 그것으로 전체를 통관하려는 시도는 기계적 체계론의 법학적 가지인 이성법론에 의해서였다.

 

한편 이런 법 형식의 발전은 자유주의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자유주의의 경제적 발현인 자본주의가 근대적 법 형식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법은 자유에 대한 강제적 개입의 구체적 조건과 방법, 효과를 규정한다. 따라서 자유의 확보를 위해서는 법과 비법(非法)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법 자체가 명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합법의 영역과 불법의 영역이 명확히 구분되어야 하고, 합법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조건과 절차가 분명해야 한다. 그런 조건에서만 개인은 국가의 강제적 개입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근대적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서로 다르게 자란 자유주의 법이념과 근대법의 형식은 서로를 지지하면서 발전해 갔다.

 

그런데 근대법에 내재한 이런 기계적 체계론의 특성은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현대적 거대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는 무력하다는 사실을 노출하였다. 이런 구조적 결함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사회가 갖는 그물망 구조의 밀접한 연계성에서 기인한다. 이런 연계성으로 인해 하나의 사건이 순식간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사건들로 폭증한다. 또는 하나의 작은 문제가 발단이 되어 사회 전체에 엄청난 부담을 안기는 문제로 순식간에 비화한다. 이 때문에 개별적 차원에 국한된 접근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어렵게 된다.

 

또한 그물망 형태의 밀접한 연계망은 무수한 항들 사이의 인과관계의 얽힘과 상호영향으로 인해 개별적 인과관계의 파악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확실성을 확대한다. 그 결과로 법적 요건 판단에 역량을 초과하는 부담을 안기거나, 대다수의 사건들을 요건 미충족으로 배제해 버린다. 이것은 우리가 각자 자유로운 이성적 존재라는 특성을 독립적으로 유지하면서 상호 결합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함을 명확히 보여준다. 왜냐하면 각 개인의 차원에서는 자신의 행동이 초래할 인과적 결과의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합리적 판단이 어려우며,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촘촘한 연계망을 통해 문제를 확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문제 상황의 복잡함은 경직된 형식의 법으로 대처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출처 : 이영록. "팬데믹 (pandemic) 시대, 법을 다시 생각하다." 법학연구 66 (2021): 2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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