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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이행기 정의의 감정동학에 대한 사례연구 - 김명희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2. 4. 23. 23:49

한국 이행기 정의의 감정동학에 대한 사례연구

- 웹툰 <26년>을 통해 본 5·18 부인(denial)의 감정생태계

김명희 _건국대학교


(주요내용 발췌)

5·18 이행기 정의 모델이 지닌 한계는 그간 ‘트라우마’의 문법 속에서 재조명되어 왔다. 5·18 참가자들의 정신건강에 대한 연구는 이들의 정신적 고통 및 이를 뒷받침해주는 환경이 심각한 수준이며, 그 결과 약 30여 년이 지난 시점까지도 트라우마가 만성화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오수성·신현균·조용범 2006; 최정기 2006; 강은숙 2012; 김보경 2014).12) 특히 5·18 시민군 기동타격대의 생애사를 ‘사회적 트라우마티즘’의 프레임으로 분석한 강은숙(2012)은 이들의 트라우마가 처벌 없는 과거청산 및 보상과정과 연관이 있다는 점을 드러내 보여준다. 나아가 김보경(2014)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조직적 부인의 전략을 개념화였고, 이러한 부인이 민주화운동에서 발생한 외상 생존자들의 후유증을 악화시킨다는 점을 설명하였다. 진실의 은폐로 진정한 애도가 방해받고, 진상규명이 되지 않은 외상을 경험한 사람들의 주요 정서 중에 분노와 한이 심각한 점은 필연이다.13) 이들 연구는 이행기 정의의 사회적 맥락이 개인의 고통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12) 5·18 참가자들의 상이 후 자살자 비율은 10.4%로, 이는 OECD 국가 중 최고라는 한국의 자살률 0.02%의 무려 500배에 달하는 수치이며(김명희 2012), 유족들의 자살 문제는 광주트라우마센터의 창립 배경이 되기도 했다.

13) 국외 연구에서 크메르루주(Khmer Rouge) 통치하에 심각한 외상을 경험한 캄보디아 생존자 중 진상규명이 되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PTSD 발생 비율이 낮은 것으로 보고되었다(최현정 2015).


그러나 그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들 논의는 5·18 부인(denial)의 핵심 주체인 국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 보다 폭 넓은 부인의 문화 속에 편입된 다층적 행위자들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최근 새롭게 제기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2004년 무렵부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가 인간의 고통을 가리키는 국제공통어이자 사회적 통념의 일부로 부상하면서, 살아남은 자들 또는 목격자의 생존자 증후군은 통상의학적 프레임을 통해서만 인지되고 공론화되는 특징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 진단기준에서는 외상 사건 자체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생존자들의 의미와 해석보다는 공포감이나 두려움, 또는 무력감을 느꼈는지와 같은 주관적 반응이 진단의 전제 조건이다. 의학적 진단명이 취하고 있는 증상중심주의와 방법론적 개인주의로는 생존자가 다른 재난 희생자, 혹은 전체 공동체 구성원과의 관계에서 겪을 수 있는 죄책감, 부끄러움, 자기비하와 같은 상호주관적인 감정 경험이 의미 있게 고려되지 않는다(김명희 2015, 19). 바로 그렇기 때문에 외상적 기억을 개인적이고 의학적인 문제로 다루어 왔던 역사는 역설적으로 피해자를 수동적으로 대상화하고, 다중적 행위 자들의 공적 책임을 묘연하게 하는 심각한 정치적 결과를 초래했다. 라쉬(C. Lasch)의 말을 빌리자면, “인과응보의 정의(正義)가 치료적 정의(正義)로 옮아감에 따라, 도덕의 지나친 단순화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되었던 것이 바로 도덕적 책임감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1989, 269-270). 이것이 이 글이 이들의 고통에 대한 감정이론적 접근을 끌어 오는 이유이다.

유사한 맥락에서 5·18이 남긴 사회적 고통을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 패러다임에 입각해 포착하고자 하는 시도 또한 일정한 한계를 갖고 있다. 회복적 정의는 가해자의 처벌을 목표로 하는 기존의 응보적 정의(retributive justice)에 대비되는 패러다임이다. 여기에서 피해자, 가해자, 공동체는 정의 회복의 주체로서 처벌이 아닌, 어떤 피해가 발생했는지, 피해자의 욕구는 무엇인지, 회복을 위해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초점을 둔다. 간단히 말해 회복적 사법은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관계회 복, 당사자들과 공동체의 관계회복을 강조한다.14)

14) 통상 남아공 진실화해위원회나 르완다의 가차차 법정(Gacaca court)은 국가폭력을 겪은 사회에서 회복적 정의의 전례로 제시된다. 자세한 논의는 이재승(2014), 최현정(2015), 이영재(2012)를 참조하라.


그러나 이러한 회복적 정의 관념은 정치적 개혁, 재발방지의 보증, 체제의 이행, 피해자들의 권리신장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으며, 대규모 인권침해의 배후에 자리한 책임의 문제에 적용되기에는 한계가 있기에 ‘로컬리즘의 한계’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실제 <26년>에서 5·18 경험자들이 ‘그 사람’에게 복수하려고 하는 것은 국가권력이 학살을 명령한 사람과 관계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용서의 가능성은 복수(처벌)의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복수의 현실적 수단이 피해자에게 전적으로 결여된다면 용서할 기회조차 사라진다. 5·18 피해자들은 국가범죄로 인해 귀중한 가치(배우자·부모·자아)를 상실했으며, 나아가 국가가 범죄자의 처벌과정을 독점하고 피해자는 배제됨으로서 반사적으로 피해자는 구제와 회복의 기회마저 박탈당했다. 즉 <26년>에서 5·18 피해자들은 가해자들의 처벌과정에서 자신들이 배제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국가가 근본적으로 처벌권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처벌(impunity)에- 분노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국가폭력의 피해자가 복수할 수도 없는 상황, 그리고 응보적 정의를 실현해야 할 국가 공권력이 정치적 폭력의 가해자들을 처벌하지 않는 상황에서, 가해자들을 용서하겠다는 피해자들의 태도나 의향은 무망하다(이재승 2014, 175).

그런데 회복적 정의 모델과 응보적 정의 모델은 모두 피해자-가해자라는 이분법적 범주에만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피해자-가해자의 상호재 생산에 관여하는 다층적 행위자의 범주를 간과한다는 점에서 일치점을 보인다. 이 점이 필자가 5·18 부인 구조에 대한 ‘생태적 접근’을 제안하는 이유이다. 많은 외상 연구의 성과가 일러주듯, 외상에는 필연적으로 가해자-피해자-방관자의 구도가 존재하며 따라서 도덕적·정치적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 코언(2009)은 프로이트의 부인(denial) 개념을 바탕으로 국가와 사회가 인권침해에 눈감는 현상을 설명하였다. 그는 ‘제3자’나 ‘관찰자’라는 표현 대신에, ‘방관자’라는 표현을 쓴다. 방관자는 부인의 문화에 속한 개인 모두이다. 부인이란 외상의 결과에 대해 집단적으로 눈감고 공포의 실체를 일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도록 만들기에, 방관자는 외상을 발생시키는 일부분이며 결국 ‘공모자’가 된다. 현대 사회 개인들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타인의 고통에 주목하지 못하는 동시대적 부인(contemporary denial)을 형성한다. 모른 척하거나, 믿지 않거나, 침묵하거나, 폭력에 순종하거나 이를 당연시하는 등의 부인 행위를 통해 ‘알지만(know)’, ‘시인(acknowledge)’하지는 않는다(코언 2009, 66-69; 최현정 2015, 184).

이 지점에서 최근 학교 폭력에 대한 고찰과 대응이 가해자-피해자 관계에만 주목하던 관행을 벗어나 제3항, 방관자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생태적 접근으로의 전환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문재현 2012 참고). 예컨대 가해자-피해자 이분법의 개인주의적 접근 속에서 가해-피해는 일종의 순환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가해-피해 관계가 재생산되는 사회적 환경을 고려한다면, 목격자가 경험한 죄책과 부끄러움은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 사회화하는 실천적 동력이 될 도덕 감정이 될 수 있고, 사건의 부인과 회피의 국면에서 국가폭력의 재생산에 일조하는 방관자의 감정 경험으로 남을 수 있다.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에 기초한 개인주의적 접근의 한계를 넘어 가해자-피해자-방관자 관계를 사유할 수 있는 생태적 접근의 핵심적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그림 1>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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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논의에 기반하여,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둘러싼 관계적 행위자들의 정감적 결합과 역동적인 상호작용의 양상을 감정생태계라는 개념으로 포착할 수 있다. 한편 윌리엄스의 ‘감정구조’는 뒤르케임의 ‘집합의식(감정)’ 개념과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연대를 사회학적 탐구의 중심 의제로 상정했던 뒤르케임 사회학에서 ‘감정’은 외삽적(外揷, extrapolation)인 요소에 머물지 않는다. 근대 사회로의 이행 과정은 집합의식(conscience collective)의 변동 과정으로 설명된다. 집합의식은 “동일한 사회의 평균적 구성원들에게 공통적 믿음과 감정의 총체”이자 “사회의 정신적 유형으로서 그 나름대로의 고유한 특징과 생존조건 및 발전 양식을 가지고 있다(뒤르케임 2012, 128).” 행위 주체들이 경험하는 감정 또한 이를 둘러싼 사회적 조건과 사건의 경과 속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즉 “감정이 그것을 낳은 원인들로부터 유래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동시에 그 원인의 유지에 기여한다(뒤르케임 2012, 153).”17) 따라서 실천에서 이성의 역할은 동시대인들 이 자신들의 욕구, 감정을 잘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Durkheim 1953, 54). 이러한 방법론적 관점에서 감정생태계에 대한 성찰은 한국 이행기 정의의 재생산 국면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열어줌으로써, ‘비합리적 정서를 합리적인 정서로 변형하는’ 비인지적인 형태의 설명적 비판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17) 즉, 뒤르케임에게 감정은 과학적 탐구에 의해 설명되어야 할 피설명항으로 설정된다. 이러한 관점은 “감정은 과학적 연구의 주제가 되지만 과학적 진실의 기준일 수는 없다”는 언술에서 잘 드러난다(Durkheim 1982,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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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세상 속에서 가질 수 있는 타당한 유형의 감정이다. 아리스토 텔레스 또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온화의 덕을 갖춘 사람은 마땅한 때, 마땅한 상대에게, 마땅한 시간 동안 분노한다고 상정한다. 따라서 분노를 표출한 경우에 질문해야 할 것은 분노를 촉발한 사실이 정확했으며 그 속에 담긴 가치가 균형을 이루었는가이다. 즉 분노와 복수의 감정이 해악을 가한 자를 겨냥한다면 그것은 정의로운 것이며, 복수극은 정의 담론의 실마리가 된다(너스바움 2015, 36; 이재승 2014, 173 참고). <26년>의 복수 플롯은 응보적 정의 없이 강요되는 가해자-피해자의 회복적 정의의 불가능성을 정면으로 고발함으로써 한국 이행기 정의의 딜레마에 대한 재·해결을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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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논의가 한국 이행기 정의 과정에 시사하는 이론적·방법론적 함의와 과제를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26년>은 5·18 책임자 처벌의 과제가 결국 현실정치로는 해결되지 않고 2세대 자녀들의 응보적 정의를 통해 재·해결의 국면을 찾을 수밖에 없는 현실의 딜레마로부터 출발했다. 동시에 <26년>은 응보적 정의의 참된 실현이 정치적 폭력에 연루된 사회구조적 행위자들이 자신의 위치와 고통을 야기한 원인에 대한 구조적 성찰에 입각한 관계 맺기 를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점을 아울러 일러준다. 이는 응보적 정의와 회복적 정의의 과제가 상호 모순되는 것이라기보다, 서로 연동되어 있는 중첩된 과제임을 말해준다. 본디 정의(justice) 개념이 해당 국면의 정치적 역관계와 정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반영하여 구성되는 것이라면(최정기 2006, 4), 부인의 문화에 깊숙이 편입된 한국 이행기 정의 과정에서 <26년>이 역설하는 피해자-사회 중심의 진실규명과 정의 수립의 경로와 가능성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27)

27) 피해자-사회 중심의 진실규명과 정의 수립에 대한 제안으로는 강성현(2014)을 참고하라.


이 가능성을 공동체 기반의 이행기 정의 모델로 잠정적으로 개념화하여 <그림 3>으로 재구성해볼 수 있다.28)

28) 이 그림은 학교폭력 문제에 대한 생태적 접근으로의 전환을 제안하는 문재현(2012)의 틀을 재구성한 것이다. 문재현(2012, 23)의 ‘보살핌의 원’과 달리 이 모델에서 피해자와 방어자는 가해자의 폭력을 고립시키는 동맹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이와 같은 구상에서 피해자-방어자의 동맹을 가능케 하는 핵심적인 감정기제는 분노와 정의, 부끄러움과 공감을 매개로 한 연대일 것이다. 그러나 이 때 ‘공감’은 정서적인 동시에 인지적인(cognitive) 것이며, 관계적인 동시에 설명적인 차원을 갖는다는 점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관계적·정서적인 공감과 인지적·설명적 공감이 발현되는 과정은 곧 승화29)의 과정이다. 즉 분노와 부끄러움의 감정이 사회적 연대와 정의 회복을 향한 더 큰 공동체의 집합적 노력 속에 통합될 때 승화의 감수성은 발현된다. 이렇게 볼 때 정치적 폭력의 잔재들을 청산하는 가장 유력한 경로는 공동체의 감각, 즉 정의의 공동체의 발현인 사회성(sociality)과 연대성(solidarity)을 회복하는 것이다. 사회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가장 거대하거나 가장 부유해서가 아니라 가장 정의롭고 가장 잘 조직화되어 있어서이며, 가장 좋은 도덕적 구성을 갖고 있어서이다.30)

29) 프로이트에 따르면, 승화는 자기방어기전의 한 형태로 대리 대상이 더욱 높은 문화 목표로 나타날 때의 치환이다(프로이트 1997).

30) 자세한 논의는 뒤르케임(1998: 142) 참조. 이것이 곧 뒤르케임이 도덕적 아노미와 지적 아노미의 뗄 수 없는 연관을 지적하며 ‘유기적 연대’와 ‘사회성’의 회복을 그토록 논변했던 맥락이기도 하다.

김명희_한국 이행기 정의의 감정동학에 대한 사례연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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